늙은 철근쟁이의 죽음
김 해 화
1
첫 추위가 밀려와
어제 콘크리트 친 슬라브가 꽁꽁 얼어붙은 십이층
곱은 손으로 옹벽 철근을 넣고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는데
이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김씨가 아무래도 오늘 밤을 못 넘길 것 같다고
노가다판 흘러 흘러 사십년
이 땅의 길이란 길 길이 끊긴 곳마다의 다리란 다리
공장이란 공장 아파트란 아파트
손닿지 않은 곳 없다고 큰소리 치던 그 김씨 할아버지가
오늘밤을 못 넘기겠단다 이럴 수가
그저께까지도 일 나와 철근 가공을 하고
막걸리 잔을 들면서 껄껄 웃으시던 분이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서둘러 찾아간 산동네 김씨의 셋방엔
소식을 듣고 온 철근쟁이들이 꽉 차 있다
안 빠지고 일 나오던 분이 이틀이나 안 나오고
추위가 밀려왔는데 연탄이나 들여놓으셨나 궁금해서 들렀더니
세상에 이 모양이여…
이형은 목이 메이고
김씨에게서 철근일 배웠다는 오야지 박씨는
눈물이 그렁그렁
아까 까지도 의식이 있어 병원으로 모시려했더니
본인이 한사코 마다하시네
평생 병문안 빼고는 병원 구경 안했는데
죽으면서 병원 갈 거냐고 하시면서…
이북이 내 고향이지
피난 나온 게 아니라 직장이 이남이었는데
삼팔선 그어지고 전쟁 후엔 휴전이 되면서
여엉 고향에 못 가고 말았지
나는 지금 이남에 잡혀 있는 게야
참 좆같은 이남살이지
얼굴을 찡그리며 술잔을 들던 그 김씨가
가쁜 숨 몰아 쉬며 말없이 누워 있다
일가친척 아무도 없어
급한 소식 알릴 곳도 없는 양반
형제처럼 자식처럼 철근쟁이들
침통하게 고개 숙이고 눈물 글썽이고 둘러앉은 속에
이제 먼 길 떠나려는 사람
평생 오른 노부리 다 합하면
하늘인들 못 오를까
평생 놓은 다리 다 합하면
임진강 아니라 바다인들 못 건널까
평생 닦은 길 다 이으면
북녘 고향 아니라 세상 끝인들 못 갈까
어디로 가려는 걸까 이제 떠나는 길
소주 몇 병이 비워지고 자정이 지났는데
끙 신음소리 끝에 눈을 뜬 김씨가
젖은 눈으로 방안을 돌아보며
마른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대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형님! 오야지 박씨가 울음을 터뜨리고
호랑이 눈썹 김씨형님이 갑자기 소주 한 병을 들어
병나발을 불더니
김씨 곁으로 다가가 두터운 손으로
감기지 않은 눈을 감겨주며 중얼거렸다
거그 가시거든 인자 철 그만 미고
*히로시나 해 놓으시오
우리들이 가서 철 미어다가
잘 깔 것인께
오늘 살아 있는 우리가
내일의 삶을 기약할 수 없는 하루살이 인생
그 억울함이 기름을 부어
우리들의 서러움은 더욱 뜨거워가고
숨이 막힐 것 같아 방문을 열고 나와 입술을 깨물며
아직도 새벽이 먼 하늘을 우러르는데
내 뜨거운 설움 위로 날리는 눈발
첫눈이 내린다
2
공사가 끝나고 나면
시뻘겋게 녹이 슬어 공사장 한 구석에 파묻혀버리거나
운 좋으면 고물상으로 팔려 가는
철근 기레빠시들
우리 철근일 하는 노가다들도
기레빠시 신세와 다를 게 뭐냐
젖은 눈을 닦으며
호랑이 눈썹 김씨형님은 연거푸 술잔을 비운다
눈이 젖는 것은 김씨형님 만이 아니다
화장장에서 발길을 돌린 우리들도
충무 미륵도 앞바다까지 다녀 온 오야지 박씨도
이형도 박형도…
시켜놓은 안주가 그대로 남아 차디차게 식도록
우리들은 술잔 끝에 설움만 씹었다
죽음도 많이 겪어보고 억울한 죽음도 많았네만
이번같이 가슴을 치는 설움은 첨이네
우리 아버님이 가셨을 때도 이러지는 않았는디
오야지 박씨가 한숨 끝에 술잔을 들이킨다
찌푸린 하늘 아래
새벽부터 서둘러 당일치기로 초상을 치르고
희끗희끗 먼 산봉우리에만 쌓인 첫눈을 보며
화장장에서 돌아와 김씨의 짐을 정리해
태울 것은 태우고 남길 것은 남기며 보낸 하루
오야지 박씨의 고향 미륵도 앞바다에 뼛가루를 뿌리러
함께 갔던 박씨와 이형 박형이 밤늦게 돌아오고
산동네 아래 조그만 식당에 모여 벌어진 술자리
마셔도 마셔도 술은 취하지 않고
어제 보다 더 추워진 밤은 깊어 가는데
한 사람이 비우고 간 자리의 어둠은
바깥 골목보다도 더 캄캄하고 춥다
근디 그 형님 까막눈이었능가 오늘 짐 챙김스러 봉께 공책이나 수첩은커녕 데스라 해 논 종이쪼가리 한나 없드라고
술잔을 들다 말고 김씨가 말을 꺼낸다
그 양반 사연이 많은 양반이재
대구폭동 때 철도노동자였는데 폭동에 적극 가담한 폭도였데
결국 직장 잃고 전쟁 후에 노가다꾼이 된 모양인데
가만히 보면 아는 것이 무척 많은 양반인데
아직까지 손에 연필 드는 것을 본 적이 없어
세상이 하도 무서우니 자신의 과거를 다 감추고 싶으셨겠지
김씨 할아버지를 가장 잘 안다는 오야지 박씨가
얘기를 끝내며 내 빈 잔에 술을 채운다
나는 고개 숙이고 앉아
가슴에 살아오는 김씨의 이야기를 듣는다
함부로 해방이 어떻고 입으로만 해쌓는것 아니다
맨날 아파트 아파트 허면서 느그 집 하나 못 짓고
넘의 집만 짓는 느그 신세를 제대로 보고
그것을 깨는 길부터 닦아야재
보름 전 간조날 저녁
막둥아 술 한잔 사그라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
노가다 사십 년에 참 많은 사람들 만났다만은
요새 젊은 놈들 보믄 좀 맘이 놓인다
생각허는 것들이 사람다워졌어
너는 이 현장에서 처음 만났다만은
겉으로 보기엔 성질이 급하고 가벼운 것 같아도
생각이 깊고 뼈가 곧아 무겁기로 치면 중량급이지
좋은 놈 만났으니
오늘은 내가 가슴에 묻어두었던 이야기 좀 헐란다
소주 세 병을 비우며
차근차근 들려주시던 흘러 흘러 사십년
살아있는 것이 부끄럽다 그 때 산으로 가서
차라리 싸우다가 죽어 산에 묻혔어야 헐 일인디
다시 때가 올 줄 알았더니…
술잔을 들 때 떨리던 손
그 손에 총칼을 들어 미제와 반동집단에 맞섰던
시월 인민항쟁의 전사
막둥아 술 한잔 들어라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아 그 김씨 할아버지가
내 앞에 앉아있다 한 손에 소총을 힘있게 들고
백발이 성성한 전사가 앉아있다
자 받아라 싸움은 이제 너희들 몫이다
나를 향해 휙 내미는 소총
김씨 할아버지! 외치다 말고 퍼뜩 정신이 들어 둘러보니
사람들이 놀라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암말도 않고 앉아있더니 꿈꿨냐?
김씨형님이 자기 잔에 술을 채워 내게 권하고
내가 연거푸 두잔의 술을 들이켠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멍해 있고
나는 머리를 흔들어 뒤엉킨 생각들의 갈피를 잡으며
주머니를 더듬어 낮에 챙겨 넣은 김씨할아버지의 갈쿠리를 만져본다
싸움은 이제 너희들 몫이다
자꾸 머리를 치는 전사의 목소리
자 술잔들 비우고 집으로들 가야재
고생들 했어
낼은 아침에 늦더라도 나와서 일들 해야재
일꾼이 일손 놓고 있는 것 저승에서도 좋아헐 양반 아니여
오야지 박씨의 말이 끝난 뒤에도
쉽게 술자리는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