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선생님의 책 『노란집』에는 자 신이 살던 집에 피 어난 붓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모란이 봄의 끄트 머리라면 붓꽃은 여 름의 시작이다.” 이 처럼 붓꽃은 여름이 시작될 무렵, 풀숲 이나 야산 등 어디 서든 쉽게 볼 수 있 는 꽃이다. 여름이 되면 힘차게 줄기를 세우고 꽃을 피우지 만, 가을이 되면 생 을 다한 듯 초라한 모습으로 변한다. 그럼에도 땅속에서는 부지런히 뿌리를 내리고, 어떤 환경에서도 월동을 하 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녔다. 그리고 이듬해 봄, 꽃들의 축제가 끝나갈 즈음이면, 풀내음 가득 한 들판 곳곳에서 꽃을 피우며 여름의 시작을 다시 알리는 고마운 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꽃봉오리의 모습이 먹을 머금은 붓처럼 생겼다고 하여 ‘붓꽃’이라 부르고, 서양에서 부르는 이름 ‘아이리스(Iris)’는 그리스 신화 속 여신의 이름이서 유래하였다. 그래서 붓꽃을 자주 그렸던 빈센트 반 고흐의 ‘붓꽃’ 그림도 ‘아이리스’라는 제목으로 혼재되어 사용 한다. 생각해 보면, 박완서 선생님이 말년을 보낸 구리의 ‘노란집’ 처럼, 고흐 역시 인생 후반기를 보낸 프랑스 아를의 집도 ‘노 란집’이라 불렀다. 다만, 선생님의 “노란집”이 초여름에 붓꽃 이 피어오르는 평온함의 이미지라면, 고흐의 “노란집”은 귀 자르기 사건이 벌어진 씁쓸한 기억의 공간이었다. 이후 고흐 는 거처를 요양원으로 옮겨서, 그곳의 정원에서 피어나는 꽃 과 나비, 풀과 나무를 화폭에 담으며 자신의 내면을 그림으로 표현해냈다.
정신병원에서 시작된 예술적 생명력
오래전부터 고흐에게는 우울증과 신경증이 있었다. 그것이 이토록 심각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 이었다. ‘귀 자르기 사건’으로 두어 달 남짓 입원 치료를 받고 돌아왔지만 고흐의 증세는 가라앉지 않았고, 불안해진 노란집의 이웃 주민들까지 민원을 제기하여 경찰이 찾아오는 등, 시간이 갈수록 고흐의 몸과 마음은 지쳐갔다. 결국 그는 스스 로 입원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가 찾아간 곳이 프랑스 남부 생 레미 드 프로방스 (Saint-Rémy-de-Provence)에 위치한 정신병원이었다. 당시 그의 심정은 참담함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흐가 그린 《정신병원의 복도》 의 분위기는 냉랭하고, 불안감이 끝없이 이어지는 공간이다. 그 복도 안에서 한 남자가 길을 잃은 듯 서 있다. 어쩌면 그것은 고흐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생 레미 병원의 실제 모습 이 그림과 다를지라도, 고흐가 느낀 병원은 이처럼 고독하고 불안이 감도는 곳이었다. 그렇게 복잡한 감정 속에서도 고흐는 자신의 예술적 생명력을 되살리기 위해 병원의 이곳저곳 을 살폈다. 그때, 행운처럼 다가온 공간이 바로 꽃과 나무가 있는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이곳 은 병원 내에서 유일하게 그에게 창작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마음 놓고 그림을 그릴 수 있 는 장소였다. 정원에 나가기 위해 매번 외출 허가를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외부 와 단절된 이 공간은 창작 활동에만 몰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었다. 스스로 고립을 원 했던 고흐에게는 오히려 좋은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생 레미 병원에서 그린 첫 작품
고흐는 생 레미 병원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두 점의 그림을 작 업 중이라고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보냈다. 《붓꽃》과 《라일락 덤불》이 었다. 그리고 숲과 정원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면서 의욕이 되살아났 고, 화가로서의 감각도 금세 회복 되는 것 같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고흐의 말대로 《붓꽃》과 《라일락 덤불》은 식물들이 붓질의 방향에 따라 살아 움직이듯 생동감이 넘친 다. 특히, 보라색의 붓꽃들 사이에 홀로 당당하게 꽃을 피운 하얀 붓꽃은 외롭지만 힘 있는 꽃대 위에 큼직하고 밝은 꽃을 피웠 다. 희망과 자신감 있는 고흐의 마음이다. 고흐는 자신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에 몰입해 그림을 그려야 한다 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그의 생각과 병원의 환경은 다행히 잘 맞아떨어졌다. 생 레미 요 양원은 비교적 자율적인 생활이 가능했으며, 고흐는 병원 건물 밖으로 외출할 수 있었던 유일 한 환자였다고 한다. 덕분에 그는 병원 생활 중에도 수많은 꽃과 자연을 주제로 한 작품을 남 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