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와 민들레: 상징이 실재를 지배하는 세상
이곳 캐나다에서는 봄부터 민들레와 전쟁을 치르는 집들이 많습니다. 공수부대처럼 민들레 홀씨들이 집 앞 정원에 날아들어 잔디밭을 점령하기 때문입니다. 그 뿌리는 얼마나 깊은지 쉽게 제거하기 어렵습니다. 마트마다 민들레를 죽이는 약, 민들레를 뿌리까지 뽑는 기구들을 팝니다. 그래서 정원 수호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은 도대체 언제부터 잔디로 정원을 가꾸게 된 걸까요? 우리 삶에 있어 유용함을 찾아보기 힘든 잔디는 이렇게 대접을 받는데 약초도 되고, 차(茶)의 재료도 되는 유용한 민들레는 왜 천대받게 되었을까요? 도대체 언제부터 사람들은 집 앞이나 공원에 잔디를 심기 시작했을까요?
그 시작은 중세 말 프랑스와 영국 귀족들의 저택에서부터입니다. 최초의 기록은 16세기 초 프랑수아 1세가 지은 루아르 계곡에 있는 샹보르성의 잔디밭이라고 합니다. 스프링클러도 없고 잔디 깎는 기계도 없던 당시에는 사람들이 직접 물을 주고 깎아 줘야 했습니다. 이렇게 무용한 잔디를 많은 인력과 돈을 들여 가꾼다는 것만으로도 부를 과시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재력이 있는 귀족들이 앞다투어 잔디 정원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풀이 무성하게 자라 관리되지 않은 잔디밭은 곧 그 귀족의 몰락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힘과 재력을 잃게 되면 가장 먼저 정원을 통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단 며칠만 관리하지 않아도 잡초와 풀들이 자라나기 때문이죠. 그렇게 잔디는 유럽의 귀족문화를 점령해 나갔습니다. 개인 저택뿐만 아니라 공공건물에도 잔디를 깔기 시작했습니다. 권위의 상징이었으니까요. 귀족들의 스포츠 문화에도 침투했습니다. 그들은 잔디밭에서 골프나 테니스를 쳤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미군이 참전하게 되면서 미군도 유럽에 깔린 멋진 잔디밭을 보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유럽에 동경을 가졌던 미국인들이 따라 하지 않을 수 없었겠죠. 더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20년에는 모터가 달린 잔디 깎는 기계가 발명되면서 미국의 대저택뿐만 아니라 중산층 가정에도 잔디밭이 보급됩니다. 넓게 펼쳐진 잔디 위에서 파티를 하는 것이 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후 집 앞이나 관공서, 공원에도 잔디가 깔렸습니다. 잔디는 스포츠계도 평정했습니다. 한때 귀족들의 스포츠였던 골프, 테니스를 비롯해 야구, 축구, 럭비와 같은 대중 스포츠에도 잔디가 깔렸습니다. 심지어 중동의 부자들도 잔디가 살기 힘든 사막 가운데 잔디를 심고 엄청난 관리비를 들이며 부를 과시합니다. 이와 같이 불과 400년 전만 해도 쓸모없던 풀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민들레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한때 민들레는 민초들의 사랑을 받는 식물이었습니다. 『본초강목』에는 머리카락이 검어지고 뼈가 튼튼해진다고 해서 다양한 증상에 약재로 쓰였습니다. 『동의보감』에도 여드름, 결막염, 중이염, 인후염, 편도염, 위궤양, 위염 등 염증 질환에 많이 쓰이는 약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양에서도 일찍부터 차로 마시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유용한 민들레는 잔디 때문에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무용한 잔디 때문에 유용한 민들레가 잡초 취급받는다는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사실 자연의 입장에서는 잔디나 민들레나 그냥 식물의 한 종일뿐입니다. 그 밖에 우리가 무심해 이름도 모르고 잡초라 부르는 많은 풀과 꽃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자연인데 인간이 인위적으로 상징화하는 것입니다. 상징화하면서 서열과 가치가 생깁니다. 과거 유학이 발달한 동아시아에서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사군자라 하여 유독 아꼈던 이유도 상징화 때문입니다. 선비의 절개와 기개, 지혜와 고귀함의 상징으로 만든 것이죠. 그것 자체가 다른 식물들보다 특별히 유용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포착된 모든 것이 그렇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상징화됩니다. 상징화를 통해 서열이 매겨지고, 악하고 선한 것, 성스럽고 속된 것, 귀한 것과 천한 것으로 나뉩니다. 이런 것들이 서로 엮여서 상징체계가 됩니다. 같은 상징체계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룹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문화라고 합니다.
공동체가 다르다는 것은 지역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상징체계가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까마귀는 불행을 상징하지만, 일본에서는 지혜로움을 상징합니다. 같은 대상을 두고도 각각의 상징에 따라 인식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상징은 큰 힘을 가집니다. 상징을 지배하는 사람은 공동체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권력자와 종교지도자들은 상징을 통해 국가를 통솔하였습니다. 그래서 지배자들은 상징체계의 변화를 싫어합니다. 상징체계의 변화는 곧 권력구조의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들일수록 상징을 실재보다 더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상징을 실재인 것처럼 속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을 강력한 상징체계 속에 묶어 두려고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성경에서는 상징과 권력이 어떻게 작용할까요? 유대 민족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던 최초의 상징이라고 한다면 언약궤와 성막을 들 수 있습니다. 씨족사회에서 민족사회로 진화하는 과정에는 다양한 지파와 부족을 아우를 수 있는 강력한 상징체계가 필요합니다. 아직 공동체로서 연대의식이 부족한 유대인들을 한 공동체, 한 민족으로 묶었던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에게는 이집트군의 철병거보다 더 무서운 것이 내부의 분열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그는 돌판 두 개로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짐작하셨겠지만 바로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들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하나의 민족국가로 만들어 주는 상징적인 역할을 한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가져온 두 돌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두 돌판이 곧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징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 돌판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질서를 재편합니다. 두 돌판은 언제나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한가운데 위치하게 합니다. 가장 중심에는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 그 바깥은 두 돌판을 담은 언약궤, 언약궤 바깥은 지성소, 지성소 바깥은 성소, 성소 바깥은 성막, 성막 바깥은 제사를 맡은 레위인, 그리고 사방으로 열두 지파가 포진합니다.
성막의 모든 기물이 상징적일 뿐만 아니라 배치와 구도도 철저히 상징적입니다. 두 돌판이 담긴 언약궤를 중심으로 한 성막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이며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하신다는 상징코드입니다.
종교가 체계화되고 권력이 커질수록 상징체계도 더욱 견고하고 복잡해집니다. 모세 시대만 하더라도 유대교의 상징체계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예수님이 계시던 헤롯성전 시대가 되어서는 유대교의 상징체계가 복잡하고 견고해서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들과 같은 종교 엘리트들만이 전유물이 되었습니다. 상징체계를 지배하는 사람들이 곧 힘과 권력을 가집니다. 예수님은 인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상징체계를 무너뜨리고 사람들이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기 바라셨습니다. 상징의 의미보다 상징 자체를 신성시하고 실재화하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오해를 받으셨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려는 자,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방탕한 자로 여겨졌습니다.
예수의 정신을 이어받은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대교회 때는 예수 정신이 살아 있어서 상징은 상징으로서만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부터 상징이 실재를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찬식과 같은 상징적인 예식도 실재로 둔갑해 버렸습니다. 성례와 유형 교회가 상징을 넘어 구원을 좌지우지하는 힘과 권력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붓다로부터 시작된 원시불교는 상징의 허상을 잘 드러내는 가르침과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교세가 커지면서 불교 또한 상징이 복잡해지고 견고해졌습니다. 앞에서 언약궤를 중심으로 성막 혹은 성전이 상징체계에 따라 배치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한국의 불교 사찰 배치 또한 엄격한 상징체계 속에 실재가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찰에 처음 들어서면 속세에서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가다듬고 집중하는 일주문을 지나 불법에 방해가 되는 사악한 무리를 벌하는 금강문 혹은 사천왕문을 지나서,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불국정토의 땅으로 들어가게 되는 불이문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기본적인 상징체계이고 훨씬 조잡한 상징체계도 많이 있습니다. 돈과 함께 기와에 이름과 소원을 적어 바치는 기와불사, 입시철이면 입시생을 둔 부모들이 그렇게 모여든다는 대구 팔공산 갓바위의 선본사 관봉석조여래좌상이 그렇습니다. 갓바위는 워낙 사람들이 많이 찾다 보니 ‘해동제일기도성지’라는 상징적인 타이틀을 내걸고 더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입니다. 기독교에서 만들어 놓은 수십 가지의 헌금들처럼 불교도 다양한 형태의 시주와 불사가 있습니다.
이러한 헌금이나 시주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종교 또한 세상 가운데서 유지되려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인간의 욕망, 불안, 두려움을 악용하여 돈을 뜯어내는 상징코드들입니다. 이들 상징은 사람들을 통제하기 좋도록 권력자들의 입맛에 맞게 가공됩니다. 권력자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평화와 번영의 상징으로, 권력자에게 반하는 사람에게는 공포와 저주의 상징으로 둔갑합니다. 같은 것이 사랑의 상징이기도 했다가 증오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이들 상징체계가 누구를 위해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해하려면 누구의 이익과 권력을 대변하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원래 기독교에서 상징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인간의 이해 차원에서 고안된 것입니다. 상징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보다 쉽게 종교와 신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이 상징을 장악하고 절대화하면서 돈과 권력을 쥐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종교를 넘어 정치, 사회, 문화 모든 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상은 나무나 돌로 만들어진 형상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 형상이 상징으로서의 역할을 넘어 실재인 것처럼 둔갑한 것이 우상입니다. 상징을 상징으로 볼 수 있을 때, 상징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상징이 지시하는 실재를 볼 수 있을 때 진리 안에서 참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 책 <부드러운 예수님, 뻣뻣한 기독교인, 조현정, 김재현 지음> 중에서 조현정의 글
-CN드림 칼럼 <조현정의 시대공감>
첫댓글 민들레 혹자는 민들레를 악당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민들레가 갖는 상징성은 많은 문인들과
서민들의 애환을 표현하면서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이렇게 성경말씀과 민들레의 비유가
멋진 글은 수작이라 해야겠지요 고맙습니다. 좋은글...
고맙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상장의 노예가 아니라 상징을 가지고 노는 어린이라 생각합니다. 부족한 글에 깊이 있는 답글을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