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녀 아델 드 바츠 드 트랑껠레옹의 생애
1) 탄생
아델 드 바츠 드 트랑껠레옹(Ad́éle de Batz de Trenquelléon)은 1789년 6월 10일 프랑스의 훼가롤 지방에 있는 트랑껠레옹 성에서 때어나 같은 날 본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아델이 태어난 해는 프랑스 사회에 있어서 혼란과 동요를 가져오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프랑스 근위 대장이었던 아버지 샤를르 프랑소와 남작은 신심 깊은 사람으로서,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중에도 하느님 안에 굳은 뿌리를 내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 우르슬라는 훌륭한 귀족가문의 자손으로서 우수한 크리스챤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으며 그녀는 뛰어난 정신과 관대한 마음, 그리고 깊은 동정심과 견고한 덕행으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슬기로운 아내’라 불려질 정도로 그녀는 모든 이로부터 존경받고 칭송되었다. 아델은 그녀의 어머니를 “나의 거룩한 어머니”라 부르곤 했다. 아델은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의 필요한 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들을 대하는 태도를 어머니에게서 배웠다. 또한 아델은 갈멜회의 회원이 되겠다는 바램을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어린 아델은 자기 인형에게 갈멜 수도복을 입히기를 좋아하고, 자기 성소를 식별하기 위해 단식을 하기도 했다.
2) 망명생활
1791년 왕권주의자들과 성직자들을 위협하는 공포정치가 시작된다. 아델의 아버지 샤를르 드 트랑껠레옹 남작이 영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1797년 9월 27일 아델의 가족은 스페인으로 망명을 하게 된다. 1801년 1월 6일 아델이 11살 때 스페인의 산 세바스티안의 산타마리아 성당에서 첫영성체를 하게 된다. 아델이 첫영성체를 하는 산타마리아 성당 근처에는 갈멜 수녀회가 위치해 있었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지내는 몇 달 동안 아델의 마음속에는 갈멜회 수녀가 되려는 바램이 더욱 자라났고, 프랑스로 돌아갈 때가 되자 이 수녀회에 들어가기 위해 주저함 없이 산 세바스티안에 남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성소를 존중하기는 했지만, 너무 빠른 결정을 내리기 전에 13세가 될 때까지만 기다리라는 충고를 했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프랑스에 갈멜 수녀회가 재건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성소를 따르기 위해 산세바티안으로 되돌아오겠다는 다짐을 받고 나서야 함께 1801년 11월 4일 가족과 함께 산 세바티안을 떠나 트랑껠레옹 성으로 돌아왔다.
3) ‘작은회’
어머니가 아델의 교육에 대해 걱정하는 동안 아델의 남동생 샤를르는 한 가정교사에게 맡겨졌다. 이 선생은 쟌 밥티스트 듀크르노라는, 혁명 때문에 실현시키지 못한 수도생활의 계획을 가졌던 깊은 영성의 소유자였다. 그는 샤를르의 가정교사뿐 아니라 기꺼이 아델의 교사와 영적 지도자가 되어 주었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갈멜회에 입회할 준비기간처럼 여겨졌었다. 그녀는 어머니와 의논을 한 후, 이 생각을 실현시키기 위해 듀크르노 선생에게 매일의 영적 생활을 위한 확실한 의무들이 적힌 “생활 규칙”을 만들어 달라고 청했다. 이 규칙은 8개의 항으로 이루어졌으며, 아델은 그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은 다음 관대한 마음으로 따르려 노력한다. 이것은 그녀의 삶의 지표가 되고 인간적, 지성적 영적 성장에 도움을 주었다. 1803년 2월 6일, 아델은 쟌느 아가다와 함께 아쟝의 쟈쿠피 주교에게 견진성사를 받았다. 쟌느는 마음의 친구이고 사도직 현장에서 훌륭한 협력자가 되었다. 듀크르노씨는 이 두 친구사이에 신앙을 살아갈 깊은 바램이 있음을 알아채고 이러한 경향은 하나의 단체를 형성하는데 좋은 구성요소가 된다는 점을 생각한다. 그리하여 1804년 8월 5일, 아델과 쟌느에게 “작은 회”를 설립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이 회의 목적은, 그 핵심 안에 다른 사람을 끌어들임으로써 크리스챤으로서의 고행과 덕행을 훈련하기 위한 상호간의 영적 도움과 경쟁심을 부추기는데 있다.
이 ‘작은 회’는 다른 소녀들에게도 빠르게 퍼져나가 매년 성장을 거듭하였다. 아델은 이 단체에서부터 더욱 뿌리 깊은 열의를 위한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다. 8개항이었던 규정이 여러 가지 추가하게 되었고, 아델은 단체의 문을 ‘특별한 그룹으로 형성하게 될 노인들을 위하여도’ 열어주었다. 1805년 4월 23일 20살의 쟌느 디슈의 결혼으로 인해 ”작은 회“에 약간의 변화가 있게 되는데 그것은 쟌느의 여동생 아가다가 아델과의 정기 주간 편지를 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편지는 이렇게 해서 아쟝에 있는 ”작은 회“ 회원들과의 연락 중심이 되었다. 여기서 다루어졌던 주제들은 주로 우정, 일반적인 죽음, 전례력에 따른 구원의 여러 가지 신비, 영성체하는 기쁨, 축일이나 기념일을 위한 특별예식들, 마리아의 모범과 덕행, 겸손,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받아들임 등이다.
4) 샤미나드 신부님과의 만남
1808년 여름, 아델의 어머니는 친구의 집에서 우연히 샤미나드 신부의 친구이자 협력자인 보르도의 라퐁씨를 만나게 된다. 라퐁씨는 그녀에게서 아델의 “작은 회”에 대해 듣고, 그것이 샤미나드 신부의 신심회와 닮았다는데 깊은 인상을 받는다. 라퐁씨는 샤미나드 신부에게 아델과 “작은 회”를 소개하면서, 1808년부터 아델과 샤미나드 신부간에 서신교환이 시작된 것이다. 아델에게 있어서 동정녀 마리아는 단지 하나의 모델일 뿐 아니라, 자애로운 어머니요, 우리의 특별한 수호자요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위한 변호자이심을.. 그녀의 편지 안에서, 아델은 자연스러움과 깊은 신심으로 마리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는 샤미나드 신부와의 관계를 가짐으로서 마리아에 대한 시야도 넓어졌으며 성모님과의 깊은 관계에 들어가게 된다. 1813년, 아델과 “작은 회”의 친구들은 샤미나드신부의 대리자로서 르몽 신부가 지도하는 보르도의 “젊은 여성들의 모임”에 가입되었고 아델은 아가다 디슈와 다른 회원들에게 각자의 위치에서 수도자처럼 살 것을 제안하였다.
5) 아델의 ‘소중한 계획’
샤미나드 신부는 아델의 “소중한 계획(Cher projet)에 동의하는 한편 그가 프랑스 땅에서 사도적 선교사로서 일하는 14년 동안 체계화 된 ”그의 계획“을 보여주었다. 그는 아델이 세우려 준비하고 있는 수도 공동체의 목적에 대해 조언을 했다. 아델과 그녀의 동료들이 마리아 이름으로 모인 수도회 안에서 확장되고 힘을 얻으며 그 자신과 같은 ”선교사“들이 되라는 제안을 한 것이다. 아델은 교외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설립을 바랬고, 샤미나드 신부는 그것을 도시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샤미나드 신부는 그녀의 소견에 동의하였지만, 아직 불완전하다는 것을 느끼고 그 자신이 규칙을 작성하였다. 공동체 설립은 아쟝 교구 안에 있는 마리아 정신으로 모인 수도회 정신에 맞게 사도직 방향을 정하고, 그에 따른 조직을 할 적절한 시기를 찾고 있었던 샤미나드 신부에 의해 늦추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지연은 섭리였다. <백일 천하>라 불리는 1815년 3월 20일부터, 나폴레옹이 되돌아왔던 그 기간에 있었던 종교 박해로 샤미나드 신부가 유배지로 추방되어 아델과의 연락이 두절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아델 입장에서 보면 간호하던 병환 중이던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가족에 대한 부담에서 자유스러워 질 수 있었다. 샤미나드 신부와의 접촉이 다시 시작되었다. 샤미나드 신부는 장래 수도공동체의 특별한 목적을 구체화하였다. 그것은 다른 수도 공동체들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순수하게 ”사도적“이고 ”선교사적“인 것이어야 한다. 또한 사람들 안에 마리아 이름으로 모인 수도회들을 확장시킴으로써 ”크리스챤들을 배가시키는“것이어야 한다.
6) 마리아의 딸 수도회 창립
1816년 5월 25일 아델은 자신과 함께 가족을 떠난 친구 5명과 함께 공동생활을 시작함으로서 마리아의 딸 수도회 창립을 하게 된다. 1817년 7월 25일 ‘Marie de la Conception’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아델과 8명의 동료가 종신 서원을 했다. 수도회원의 증가와 함께 활동들은 ‘꽁그레가씨옹(Cogregation)“의 활성화, 아장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무료 학교, 교리수업, 첫영성체 준비, 개인 또는 그룹마다의 피정, 젊은 여성들에게 재봉을 가르치기 위한 작업실, 불쌍한 걸인들을 위한 일 등 점차로 늘어났다. 규칙적인 서신을 통한 샤미나드 신부의 지도아래, 아델은 자주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데서 오는 커다란 체험들을 맛보았다. 점점 수녀회가 체계화되어 가면서 과중한 일들은 위장장애로 괴로워하는 아델의 건강을 계속 악화되게 하였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그녀는 자신이 책임을 맡고 있는 딸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위로하며 규칙에 충실하도록 격려하는가 하면 동정 마리아와 성체의 형상으로 계시는 예수님께 대한 신심을 북돋아 주었다.
7) 아델의 죽음과 덕행
말년에, 그녀는 방에서 성체를 모셔야 했다. 그녀가 영성체를 하는 경건한 자세는 그녀의 딸들에게 눈에 보이는 교육이 되었다. 한 수녀는 이렇게 말한다. “아델은 경탄할 만한 인내심으로 계속되는 고통을 받아들이며 이것이 자신을 정화시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그녀는 살아있는 열성으로 다음과 같이 반복하여 말하기도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위해 고통 받으셨으니, 내가 그분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리고는 목에 걸고 있던 십자가에 따뜻한 사랑의 입맞춤을 하는 것이었다.
아델 수녀는 공동체에 관한 모든 일, 그리고 살아있든 죽었든 그녀의 모든 딸들에 대해 염려하였다. 이것은 그녀의 어머니다운 배려였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이 없도록 늘 살폈고, 이러한 세심함은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 1년 전부터 아델의 병실에서 함께 잠자던 벵상수녀가 있었는데, 아델은 그녀가 잠자는 데 방해받지 않도록, 다른 수녀들에게 소음을 내지 말라고 부탁하는 동시에 아델 자신도 고통으로 인한 신음소리를 내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었다.
병자성사를 받는 동안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이도록 격려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오히려 그녀 자신이었다. 이 성사는 그녀에게 많은 위안이 되었다. 전에는 매우 나빴던 안색이 마치 천상의 표시를 획득한 듯 평안함을 되찾은 것이다.
이 성사가 끝난 후, 아델은 벵상 수녀에게 침대에서 떠나지 말라고 부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주님이 내 마지막 바램을 공동체에 이야기하라고 명하시는 것 같아요. 아무런 기운이 없지만, 하느님이 그것을 바라신다고 믿어요.” 그리고 벌써 모임 때 했던 ‘형제적인 사랑, 누가 원장이 되었든 그 안에 하느님이 계심을 믿고 의지와 순명을 하라는 부탁’을 반복하였다.
그때부터 아델은 오직 하느님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자주 부활의 희생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분에 대한 이야기 듣기를 좋아했다. 그녀의 육신이 이 땅에 있는데도 마음은 벌써 하늘에 가 있는 듯이 보였다. 거룩하신 스승, 주님의 몸이 가까이 오신다는 종이 울리면, 그녀는 힘차고 사랑에 넘치는 목소리로 “나의 선하신 예수님이 오신다.” 외치곤 하였다. 영성체 후에는 기쁨과 거룩한 명랑함이 그녀의 얼굴에 빛났으며 “얼마나 아름다운 날인가, 주님의 날입니다.”라고 자주 말하였다. 저녁이면 예수성심 성화를 청하여 십자가, 동정 마리아 성화상과 함께 침대 발치에 놓게 하였다. 그리고는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입가에는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한번은 아델을 깨우던 어떤 수녀가 “오, 아름다우신 분 얼마나 크신 분인가!”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혹시 동정 마리아를 만난 것이냐고 물었다. 아델 수녀는 마비 상태에서 깨어나며, 혹시 그녀가 탈혼 상태에 빠진 것으로 보였을까봐 염려하며 “네, 그녀의 성화였어요”라고 겸손하게 대답했다. 어쩌면 이때 아델에게 성모님이 오셨는지도 모른다. 1828년 1월 10일(39세) 한 순간, 있는 힘을 다하여 “호산나, 다윗의 아들이여!” 라고 외쳤다.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말이다.
쾌활한 성격과 불타는 믿음으로 마리아의 모범을 따랐던 아델은 마리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그의 자녀들을 사랑했듯이 자신도 하느님께 믿음을 두며 이웃의 필요에 주의를 기울였다. 자신을 모두 바쳐, 모든 이를 향한 깊은 겸손과 성실한 애덕을 실천했던 것이다. 지칠 줄 모르는 사도였던 아델은 1986년 ‘가경자’로 선포되었고, 본회 창립 200주년 경축기간이였던 2017년 5월 4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의해 복녀로서의 칙령이 공포되었고 2018년 6월10일 프랑스 아좡교구에서 시복식을 거행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아델 수녀님의 수도명인 "마리 들라 꽁셉쑝(원죄없으신 마리아)" 이름으로 1월 10일 미사 전례 안에서 그녀의 축일을 기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