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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선사 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
제1절 선사 시대의 전개
Ⅰ. 선사 시대의 세계
1. 인류의 기원
Australopithecus | 남유인원. 최초의 인류 | 300~350만년전 | 직립 보행. 간단한 조잡한 도구 사용 |
Homo habilis | 손재주가 있는 사람 | 200만년전 | 손을 자유자재로 사용 |
Homo erectus | 곧선사람(直立猿人) | 50만년전 | Beijing. Jawa. Heidelbergensis. 불 사용.언어 |
Homo sapiens | 슬기 사람(고인. 고생인류) | 20만년전 | Neanderlthalensis.협동 사냥.시체 매장 |
Homo sapiens sapiens | 슬기슬기 사람(신인. 현생인류) | 4만년전 | Cromagnon man. Grimldi man |
2. 문명의 발상지
문명 | 시기 | 지역 |
Mesopotamian civilization | BC 4000 | the Tris & the Euphrates |
Egyptian civilization | BC 3500 | the Nile |
미노아문명Göbekli Tepe문명(Aegean civilization) | BC 2500 | 지중해 동부 the Agean Sea(에게 해) |
인도 인더스 문명 (Indian civilization | BC 3500 | 인도 the Indus & the Ganges |
중국 황하문명(Chinese civilization) | BC 2200 | 중국 황하 기슭 the Yangtze and Yellow river basin |
페루 안테스 문명(the Norte Chico civilization(Caral or Caral-Supe civilization)) | BC 3000~1000 | 페루의 안데스 문명 : 안데스 산맥의 서쪽 해안지역 |
중앙아메리카 문명(Mesoamerica) | BC 1800 | 멕시코 멕시코만지역의 마야, 아즈테카 the Balsas River |
중국의 황하문명 : 황하기슭
인도의 인더스 문명 : 인더스 강 유역
메소포타미아 문명 :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 강 유역
이집트 문명 : 나일강 하류
중앙아메리카 문명 :
페루의 안데스 문명 : 안데스 산맥의 서쪽 해안지역
Ancient Civilizations flourished in the period between 4000 to 1200 BCE. These cultures are sometimes called Bronze Age Civilizations.
Civilizations became possible when irrigation systems were developed that significantly increased the total food supply so that tens of thousands of humans could, for the first time, live closely together in city-states and centrally controlled kingdoms. The earliest civilizations were all located on rivers.
The earliest civilizations are:
Mesopotamian Civilization about 4000 BCE on the Tigris Euphrates River
Egyptian Civilization about 3500 BCE on the Nile River
Minoan Civilization on the Island of Crete about 2500 BCE
Indus River Civilization on the Indus River about 2300 BCE
Civilization of North China about 2200 BCE.
The map below shows the earliest centers of civilization in the world.
Ⅱ. 우리 나라의 선사시대
1. 구석기시대
한반도의 구석기는 약 70만전부터 시작되었다. 구석기 시대는 돌을 다듬는 기법에 따라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한다.
한반도의 구석기는 약 70만전부터 시작되었다. 구석기 시대는 돌을 다듬는 기법에 따라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한다.
시기 | 연대 | 내용 |
전기 | 50~100만년전 | 뗀석기(打製石器). 하나의 석기를 다용도로 사용했다(一石器多用途). 주먹도끼(兩面核石器, hand ax), 뾰쪽찍개, 주먹찌르개(충북 청원 만수리). 찍개(외날찍개, 打截器, chopper), 양면찍개(양날찍개, 兩面打截器, chopping tool), 긁개(搔器, scrapper) |
중기 | 10~4만 년전 | 몸돌석기(石核石器). 여러 석기를 만들어 용도별로 구별해서 사용했다(一石器一用途). 긁개(搔器, scrapper), 밀개(削器, end-scrapper), 찌르개(尖頭器, 手鎬, point), 돌칼(石刀), 송곳(錐) |
후기 | 4~1만년전 | 잔석기(細石器). 돌에다 쐐기 같은 것을 대고 형태가 같은 여러 개의 정교한 석기를 제작했다(同種石器 大量生産). 잔석기(細石器)와 이음도구(모음연장, 複合道具). 슴베찌르개. 톱. 창(槍). 활(弓). 작살 |
주먹도끼
빗살무늬토기
가락바퀴
2. 신석기 시대
시기 | 연대 | 내용 |
전기 | 50~100만년전 | 뗀석기(打製石器). 하나의 석기를 다용도로 사용했다(一石器多用途). 주먹도끼(兩面核石器, hand ax), 뾰쪽찍개, 주먹찌르개(충북 청원 만수리). 찍개(외날찍개, 打截器, chopper), 양면찍개(양날찍개, 兩面打截器, chopping tool), 긁개(搔器, scrapper) |
중기 | 10~4만 년전 | 몸돌석기(石核石器). 여러 석기를 만들어 용도별로 구별해서 사용했다(一石器一用途). 긁개(搔器, scrapper), 밀개(削器, end-scrapper), 찌르개(尖頭器, 手鎬, point), 돌칼(石刀), 송곳(錐) |
후기 | 4~1만년전 | 잔석기(細石器). 돌에다 쐐기 같은 것을 대고 형태가 같은 여러 개의 정교한 석기를 제작했다(同種石器 大量生産). 잔석기(細石器)와 이음도구(모음연장, 複合道具). 슴베찌르개. 톱. 창(槍). 활(弓). 작살 |
2. 신석기 시대
한반도의 신석기 시대는 약 8000년전부터 시작했다.
시기 | 연대 | 내용 | 출토 |
전기 | BC 8000~BC4000 | 원시민무늬토기(原始無文土器), 덧무니토기(隆起文土器), 눌러찍기무늬(押印文土器) | 제주도 한경 고산리, 고성 문암리, 강원 양양 오산리, 부산 동삼동, 웅기 굴포리 서포항, 평북 만포동, 의주 미송리, 경남 통영 상로대도, 여수 송도와 안도, 신안군 흑산도 |
중기 | BC 4000~BC2000 |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 | 서울 암사동, 평양 삼석구역 호남리 남경, 경남 김해 수가리, 함붇 웅기 굴포리 서포항, 평남 청호리, 경기 하남시 미사동, 부산 동삼동, 홍해도 봉산 지탑리, 평남 대동군 청호리 |
후기 | BC 4000~BC1500 | 납작빗살무늬토기(平底櫛文土器), 물결무늬토기(波狀文土器), 번개무늬토기(雷文土器), 타래무늬토기(渦文土器, 螺旋文土器) | 청진 농포동(農圃洞), 온천 궁산리(弓山里), 봉산 지탑리(智塔里), 부천 시도(矢島), 춘천 교동(校洞), 굴포리 서포항(西浦港) |
종교
animism(精靈信仰) | 자연현상에 영혼이 있고 풍요를 비는 의미에서 태양과 불 숭배 |
shamanism(巫覡信仰) | 인간과 영혼을 매개하는 무당과 주술을 믿는 사상으로 고조선의 단군 |
totemism(토템思想) | 씨족의 기원을 특정 동식물과 연계해서 숭배한 것으로 단군신화의 곰, 호랑이 |
영혼불멸사상(靈魂不滅思想) | 사람은 죽어도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상으로 영혼숭배(靈魂崇拜), 조상숭배(祖上崇拜) |
태양숭배(太陽崇拜, sun worship) | 태양을 신격화하여 신앙하고 숭배하는 것. 환인(桓因). 일월성신과 천지신명(日月星辰과 天地神明), 연오랑과 세오녀(延烏郞 及 細烏女, 朴寅亮 殊異傳), 천부경(天符經, 81자의 대종교 경전) |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구분 | 구석기 시대 | 신석기 시대 |
시작 | 약 70만년전 | BC8000년전 |
도구(유물) | 뗀석기(打製石器). 주먹도끼. 슴베찌르개 | 간석기(磨製石器). 가락바퀴. 뼈바늘. 농경관련 유물(돌괭이. 돌보습. 돌삽. 돌낫) |
토기 | 이른민무늬토기. 덧부늬토기. 빗살무늬토기 | |
경제 | 수렵. 어로. 채집 | 수렵. 어로. 채집. 신석기혁명(농경과목축) |
사회 | 이동생활. 무리사회. 평등사회 | 정착생활. 부족사회. 족외혼.평등사회 |
주거 | 동굴. 바위그늘. 막집 | 강가나 바닷가의 반지하의 움집 |
예술 종교 | 주술적 의미 :고래. 새 그림 | 조개껍데기가면. 조가비 치레걸이.animism. totemism. shamaism.영홍불멸사상, 조상숭배 |
유적지 | 평남 상원 검은모루 동굴. 경기 연천군 전곡리. 충남 공주시 석장리 | 서울특별시 암사동.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 평양 남경. 김해 수가리. |
제2절 국가의 형성
Ⅰ.고조선과 청동기 문화
1. 청동기 시대
가. 시기
신석기시대말인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의 요령(遼寧, 랴오닝), 러시아의 아무르 강(Amur River, 黑龍江, 헤이룽강)과 연해주(沿海州, Primorsky Kray)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토기(각목돌대문토기, 刻目突帶文土器) 문화가 앞선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 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시대로 들어간다. 이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으로 한반도에 청동기시대가 본격화된다. 세계 4대 문명인 Egypt(Nile강), Mesopotamia(Euphrates와 Tigris강), India(Ganges와 Indus강) 및 중국(黃河)문명도 청동기문화이다.
국사교과서 고대사 부분 변경 내용
고조선 건국 :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
청동기시대: 신석기시대말인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의 요령(랴오닝), 러시아의 아무르 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토기문화가 앞선 빗살무늬토기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시대로 들어간다. 이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으로 한반도에 청동기시대가 본격화된다.
한국 청동기시대의 상한은 종래 기원전 10세기에서 20~15세기까지 올라 갈 수 있다.
나. 청동기시대의 생활
⑴ 거주지(居住地)
구릉지대에 살았고 집터는 대체로 직사각형으로 움집(竪穴住居, 土幕, 庴幕)의 깊이가 낮아져 점차 지상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이며 움집 중앙의 화덕은 한쪽으로 옮겨지고 저장구덩(貯藏穴)도 따로 설치하거나 한쪽 벽면을 밖으로 돌출시켜 만들었다. 주춧돌을 이용하기도 했고 나지막한 구릉 위에 토성(土城)이나 목책(木柵)과 환호(環濠)로 외부침입에 대비하였다. 주거용 외에 창고, 공동작업장, 집회소, 공동의식장소 등도 있었다.
⑵ 유적지
충남 부여 송국리. 여주 흔암리(欣岩里)
유적지 | 내용 |
충남 부여 송국리 | 탄화미, 민무늬토기 |
경기 여주 흔암리 | 탄화미 |
경남 김해 패총 | 탄화미 |
전북 부안 | 탄화미 |
대동강 유역 | 탄화미 |
인천 강화. 황해도 은률, 강원 춘천, 전북 고창, 전남 화순, 전남 장흥 | 고인돌 |
평북 의주 미송리 | 미송리식 토기 |
경기 가평, 가원 정선 | 덧띠새김무늬토기(각목돌대문토기) |
전남 순천 우산리 | 고인돌에서 비파형동검 출토 |
⑶ 유물
① 청동제품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 遼寧式銅劍), 거친 무늬거울(多鈕粗文鏡), 청동검(靑銅劍), 화살촉(靑銅鏃), 청동창(靑銅戈), 청동방울(靑銅鈴), 방패형동기(防牌形銅器)
② 토기
밑바닥이 좁고 아가리를 뒤집어 겹으로 만든 (二重口緣, 이중구연) 적갈색을 띤 민무니토기(無文土器), 덧띠새김무늬토기(각목돌대문토기, 刻目突帶文土器. 경기 가평. 강원 정선), 미송리식토기(평북 의주 미송리 동굴), 붉은간토기(홍도(紅陶), 적색마연토기(赤色磨硏土器), 단도마연토기(丹塗磨硏土器)), 흑도(黑陶), 가자무늬토기(架子文土器)
비파형동검(요녕식동검)
거친무늬거울
반달돌칼
미송리식토기
민무늬토기
③ 기타
반달형돌칼(半月形石刀), 바퀴날도끼(달도끼, 환상석부, 環狀石斧), 홈자귀(有溝石斧) 등 석기
바퀴날도끼(달도끼, 환상석부, 環狀石斧)
④ 무덤
고인돌(支石墓, dolmen), 돌널무덤(石棺墓), 돌무지무덤(積石塚)이 있었고 말기에 독무덤(甕棺墓)과 널무덤(木棺墓)도 생겨났다. 선돌(立石, menhir)과 함께 거석문화를 형성하는 고인돌(支石墓, dolmen)은 무게가 수십톤, 큰 것은 수백톤에 달하고 이렇게 큰 돌을 옮기려면 많은 씨족원을 동원할 수 권력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고인돌은 전국 각자에 분포하고 있으며 그 방식은 네 개의 판석(板石)을 네모지게 짠 위에 널따란 덮개돌(蓋石)을 올려 놓은 탁자식(卓子式, 北方式), 매장의 주체부를 지하에 두고 그 위에 작은 돌이나 돌무지(積石)로 지탱된 덮개돌을 올려 놓는 기반식(基盤式, 南方式) 및 전혀 받침돌 없이 덮개돌을 직접 매장부 위에 올려 놓은 개석식(蓋石式)외에 묘역식고인돌(墓域式支石墓), 원형고인돌묘(圓形支石墓, 경남 산청군 매산리, 경남 진주시 초전동)이 있으며 2000년 고창, 화순, 강화고인돌은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고인돌의 부장품으로서 간돌칼(磨製石劍)이 주로 발견되고 청동기, 비파형동검(전남 순천시 우산리 고인돌)도 출토되기도 한다. 돌널무덤(石棺墓)은 지하에 널찍한 직사각형의 돌로 상자 모양의 널(棺)을 만들어 그 안에 시체를 매장하고 둥글게 흙을 덮은 것으로 고인돌에서 한단계 진화한 것으로 때로는 고인돌과 결합되어 있기도 한다. 돌무지무덤(積石塚)은 돌널(石棺) 위에 돌을 쌓아 올린 것으로 웅진 시도, 통영 연대도・옥시도, 춘천시 진천리등에서 보인다. 청동기 말기에서 철기시대에는 옹기 안에 사람의 뼈를 추려서 매장하는 독무덤(甕棺墓)과 널무덤(木棺墓)도 유행했다. 독무덤(甕棺墓)은 2차장의 성격이 짙고 어린이 무덤일 가능성도 있다.
⑤ 경제생활
종래 사냥(狩獵, 수렵), 고기잡이(漁撈, 어로), 채취와 수집(採集, 채집) 생활 외에 조, 피, 수수, 기장, 콩, 보리 등 밭농사 중심의 농업이 이루어 졌으며 BC 8세기경 일부 저습지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여주 흔암리, 부여 송국리, 부안, 김해 패총과 대동강 유역 등지에서 탄화미가 발견되었다.
⑥ 사회변화
생산경제의 발전과 사회진보로 인해 사회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분화되고 사유재산 제도로 빈부격차가 생겨나고 선민사상(選民思想)을 바탕으로 주변 지역을 정복하여 군장국가(성읍국가)가 생겨났다.
⑦ 예술
종교나 정치적 요구를 반영하여 암각화로 울산 반구대 바위그림(巖刻畵. 사슴. 고래. 거북. 새. 호랑이. 물고기. 멧돼지. 곰. 토기. 사람. 배와 어부. 사냥 등 200여 그림)와 고령 양전동 바위그림(巖刻畵. 동심원. 삼각형 등 기하학무늬) 등이 있다.
2. 고조선(古朝鮮)의 등장
가. 고조선(古朝鮮) 사회의 성장
⑴ 단군신화 (檀君神話)
① 위서(魏書)에 실린 단군신화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천왕(桓雄天王)이 하늘 아래에 내려가 다스리기를 원해 환인은 천부인(天符印, 청동검, 청동거울, 청동방울) 3개를 주며 하늘 아래에 내려가 홍익인간(弘益人間, 인간을 널리 유익하게 함)하라고 하였다.
환웅은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 妙香山이 아닌 白頭山) 마루터 신단수(神檀樹)아래에 신시(神市)를 열었다.
② 단국신화(檀君神話)의 고조선(古朝鮮) 건국 기록
단국신화(檀君神話)가 나와 있는 책은 삼국유사(三國遺事, 1281년 일연(一然, 普覺國師), 제왕운기(帝王韻紀, 1287년 이승휴(李承休)), 세종장헌대왕실록지리지(世宗莊憲大王實錄地理志, 1454년), 응제시주(應製詩駐, 1462년 권람((權擥)),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1476년 신숙주, 노사신등),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1481년 노사신(盧思愼)ㆍ강희맹(姜希孟)ㆍ서거정(徐居正) 등), 신동국여지승람(1531년 이행(李荇)・윤은보(尹殷輔)・신공제(申公濟) 등), 동국통감(東國通鑑, 1485년. 서거정(徐居正)등),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 1615년 한백겸(韓百謙)), 동사(東事, 1667 허목(許穆. 남인))¹,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 1672년 홍여하((洪汝河, 남인)), 동사강목(東史綱目, 1778년 안정복(安鼎福)), 동사(東史, 1803년 이종휘((李種徽 소론))², 아시조선(兒時朝鮮, 1927년 최남선(崔南善)),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1948년 신채호) 등이 있다.
⑵ 고조선의 발전
① 고조선의 성립
고조선은 BC 2333년 아사달(阿斯達, 王儉城, 왕검성)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며 청동기를 배경으로 성장하였다. 고기(古記)에는 단군은 백성들에게 개수(盖首, 상투)와 변발(編髮)을 가르쳐 주었으며 단군 아들 부루(夫婁)는 중국 도산(塗山)에 가서 하나라 우(禹) 임금과 여러 제후를 만났다는 기록이 있다.
② 고조선의 성장
고조선은 BC 3세기경 부왕(否王, 기부(箕否))과 준왕(準王, 기준(箕準)) 등이 왕위 세습이 나오고 왕 밑에 상(相), 경(卿), 대부(大夫), 대신(大臣), 장군(將軍), 박사(博士)와 같은 관직의 분화를 알 수 있으며 중국의 전국 7웅 연(燕)과 대치하였으며 고조선의 영토는 서쪽으로 요하를 넘어서 난하(灤河) 또는 대능하(大凌河)를 경계로 연나라와 접했다. BC 284년경 연나라 진개(秦開)가 침입하여 요동군(遼東郡) 설치하기도 하였고 철기(명도전, 반량전, 오수전)가 유입되었다. 그리고 한반도 남부에 고조선 유이민 유입되어 세형동검(細形銅劍) 등장하였다.
③ 고조선의 위치
㉮ 대동강 중심설 : 삼국유사. 정약용. 한치윤 등 실학시대의 사학자들
㉯ 요동중심설 : 권람의 응제시주. 17~18세기 남인학자들. 신채호. 정인보. 최남선 민족주의사학자들
㉰ 이동설 : 요동에서 대동강 유역으로 이동.
나. 위만조선(衛滿朝鮮)
⑴ 위만의 집권
한은 노관(盧綰)을 옛 연의 땅에 연왕(燕王)으로 봉했는데 노관은 한에 반하여 북쪽 흉노(흉노)로 망명해 버렸다(후에 살해됨). 정국이 바뀌는 동안 중국으로부터 동쪽으로 망명하여 오는 자가 더욱 많아졌는데 위만(衛滿)이 1000여명을 이끌고 망명하여 국경수비 임무를 맡다가 준왕(準王)을 내좆고 왕이 되었다(BC 194~180). 준왕(準王)은 남쪽 진국(辰國)으로 한왕(韓王)이라고 칭하였다고 하고 위만조선은 진번, 임둔 등을 복속하였다.
⑵ 한나라와의 충돌
한은 흉노가 위만조선과 연결하는 경우에 받을 위협에 두려워 하였고 BC 128년 예군(濊君) 남려(南呂)가 28만 주민을 이끌고 한에 내속하자 예(濊, 압록강 중류와 동가강(佟佳江) 유역 일대)의 땅에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고 위만조선에 입력을 가하려 하였지만 예인의 반항으로 수년만에 중단되었다. 위만조선이 남방의 진국과 한나라의 중계무역 이익을 독점하고 위만조선과의 한과의 창해군 복립에 대한 정치적 교섭이 실패하자 조선 장수(裨王 長)를 살해하고 달아난 요동군 동부도위 섭하(涉何)를 조선군이 보복 살해하자 한무제(漢武帝, BC 141~87)가 침공하여 1년만에 왕검성 함락(BC 108)되어 우거왕(右渠王)은 살해되고 끝까지 저항하는 성기(成己)의 노력은 실패하였다.
한나라 칩입 |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 5만,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 왕검성 공격 |
공손수 전권부여 | 제남태수 공손수(公孫遂) 누선장군 체포, 군대병합하여 좌장군과 조선 공격 |
우거(右渠王) 항복 거부 | 조선상 노인(路人), 상 한음(相 韓陰)(韓陶), 이계상 참(尼谿相 參), 장군 왕겹(王唊) 항복 권유, 우거 거부, 노인(路人. 도중 사망), 한도(韓陶), 왕겹 도주 항복 |
우거왕 살해 | 이계 상 참(參)이 사람을 시켜 우거왕을 죽이고 항복했으니 왕검성에서 대신 성기(成己) 항거 |
성기 살해와 멸망 | 좌장군 순체가 우거 아들 장(長)과 노인 아들 최(最)을 시켜 성기 모살 교사. 조선 항복. 한사군 설치 |
⑶ 한의 군현
① 한사군 : 낙랑군(樂浪郡), 진번군(眞番郡), 임둔군(臨屯郡. BC 108년) 현도군(玄菟郡, BC 107년)
② 진번군, 임둔군을 폐하고 낙랑군(진번 15현중 7현), 현도군(+임둔군) 관할에 둠(BC 82년)
③ 현도군 만주 흥경(興京) 방면으로 이동(BC 75년)
④ 요동 땅에서 독립된 세력을 펼치고 있던 공손씨 공손탁(公孫度)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이 옛 진번땅에 대방군(帶方郡) 설치(AD 204년경)
⑤ AD 313년 고구려 15대왕 미천왕(美川王) 낙랑 축출, 백제 13대왕 근초고왕(近肖古王) 대방군 314년 축출
⑥ 신과 후한 교체기에 낙랑 토호 왕조(王調)가 낙랑태수 유헌(劉憲)을 죽이고 반기를 들어 6년간 자치를 쟁취했으나 새로 파견된 낙랑태수 왕준(王遵)에 의하여 평정되었다(BC 36년). 최리(崔理)는 스스로 낙랑국왕이라 칭하면서 백성을 다스렸다.
진번군의 군치였던 잡현(霅縣)과 소명(昭明)・대방(帶方)・함자(含資)・열구(列口)・장잠(長岑)・제해(提奚)・해명(海冥) 등 남부도위 소속 7현
라. 고조선사회
⑴ 8조금법에 나타난 고조선 사회
한서 지리지 연조(漢書 地理志 燕條)에 3조가 나와 있다.
①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相殺, 以當時償殺).
② 남의 신체를 상해한 자는 곡물로써 보상한다(相傷, 以穀償).
③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소유주의 집에 잡혀들어가 노예가 됨이 원칙이나, 자속(自贖:배상)하려는 자는 50만 전을 내놓아야 한다(相盜, 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人五十萬).
⑵ 환단고기에 나타난 8조금범
① 사람을 죽이면 그 즉시 죽음으로 갚는다(相殺以當時償殺) :
② 사람을 상해하면 곡식으로 갚는다(相傷以穀償)
③ 도둑질하는 자는 남자는 재산을 몰수하여 그 집의 종이되고 여자는 계집종을 삼는다(相盜者男沒爲其家奴女爲婢)
④ 소도(성역)를 훼손하는 자는 둔다(毁蘇塗者禁錮)
⑤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시킨다(失禮義者服軍)
⑥ 게으른 자는 부역에 동원시킨다(不勤勞者徵公作)
⑦ 음란한 자는 태형으로 다스린다(邪淫者笞刑)
⑧ 남을 속인자는 잘 타일러 방면한다(行詐欺者訓放) 자신의 잘못을 속죄한 자는 비록 죄를 면해 공민이 될 수 있지만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시집가고 장가들 수 없었다(欲自贖者雖免爲公民俗猶羞之嫁娶無所讐)
이리하여 백성이 마침내 도둑질하지 않았고 문을 닫고 사는 일이 없으며 부인은 정숙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전야와 도읍을 개간하고 음식을 그릇에 담아 먹었으며 어질고 겸양하는 교화가 이루어졌다.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상)
⑶ 의미
① 사람의 생명과 사유재산보호
② 노비제 옹호 및 노비의 순장제도(旬葬制度M 8C 강상무덤에서 100여명 매장)
③ 범죄를 수치로 여김
④ 가부장적 사회(霍里子高의 箜篌引, 公無渡河歌)
公無渡河 공무도하
公竟渡河 공경도하
墮河而死 타하이사
當奈公何 당내공하
임이여, 그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기어코 물속으로 들어가셨네.
원통해라, 물속에 빠져 죽은 임.
아아, 저 임을 언제 다시 만날꼬.
⑤ 여성의 정절 중요시
⑥ 화폐사용
마. 고조선사회의 변화
한사군 설치이후 법조항이 60여개로 증가하여 풍속이 각박(刻薄)해졌다.
3. 철기의 사용
가. 철기시대(鐵器時代)
철기는 BC 4세기경 중국에서 압록강 중류, 청천강 상류를 거쳐 대동강으로 철기문화가 유입되었다. 청동기는 일부 지역에서 사용되었지만 철기는 전국에서 사용되었다.
나. 유물
⑴ 중국과의 교류 흔적
명도전(燕, 齊나라 화폐), 반량전(秦나라 화폐), 오수전(漢나라 화폐)과 및 붓 출토로 중국과의 교류를 알 수 있다. 특히 경남 창원 다호리(茶戶里) 널구멍(土壙木槨墓)에서 철제농구, 청동검, 칠기고배(漆器高杯), 붓 등이 발견되었는데 붓은 한자가 사용되었음을 증명한다.
⑵ 청동기 문화
종래 중국식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과 거친무늬거울(多鈕粗文鏡)은 세형동검(細形銅劍)과 잔무늬거울(多鈕細文鏡)로 바뀌었고 거푸집(鎔范, 鎔笵)이 만들어 졌다.
⑶ 농기, 무기
철제 무기와 농기가 제작되었으며 철제농기구의 이용으로 생산량이 급증했다.
다. 주거지와 무덤 장식
주거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통적인 취락 형태를 보이고 주거는 직사각형의 움집에서 점차 지상가옥으로 바뀌었고 무덤은 청동기 말에 나타난 널무덤(木棺墓), 독무덤(甕棺墓)이 만들어 졌다.
초기철기시대
한국고고학에서 사용되는 시대구분 용어로 여러 논란이 있지만 기원전 4세기대에서 한군현(漢郡縣) 설치이후 한(漢)의 발달된 철기문화(철제무기류, 단조철부 등)가 본격적으로 남한지역에 파급되는 시기인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三韓時代) 이전인 기원전 2세기까지 약 300년간의 기간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는 한국식동검(세형동검), 세문경(잔무늬거울), 청동제 의기 및 무기, 철제 농공구 등이 출토된다.
청동기와 철기시대
청동기시대 | 철기시대 | |
시기 | BC 20・15세기~BC 4세기 | BC 4세기~BC 1세기 |
농기구 | 간석기(반달돌칼. 바퀴날도끼) | 간석기. 철제농기구 |
무기 |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 요녕식동검) | 세형동검(細形銅劍). 철제무기 |
청동거울 | 거친무늬거울(多鈕粗文鏡) | 잔무늬거울(多鈕細文鏡) |
토기 | 민무늬토기. 미송리식토기 | 덧띠토기.검은간토기 |
기타 유물 | 명도전(燕, 齊나라 화폐). 반량전(秦나라 화폐). 오수전(漢나라 화폐). 및 붓. 거푸집(鎔范, 鎔笵) | |
집자리 | 신석기 시대의 원형, 방형의 바닷가, 강가의 움집에서 청동기 초기철기시대에는 배산임수의 지형에 장방형의 움집을 지상가옥의 형태로 제작 |
Ⅱ. 여러나라의 성장
1. 부여
가. 지형과 경제
⑴ 위치: 만주 송화강 유역의 평야지대(農安)에 위치하여 농경에 유리했다.
⑵ 농경목축 : 관리들의 명칭을 가축에서 따온 것도 목축이 성행했음을 보여준다.
⑶ 경제 : 말, 주옥, 모피 등이 특산물로 유명하다.
나. 전개
⑴ 이미 1세기 초에 왕호 사용, 중국과 외교 관계
⑵ 3세기 말 선비족의 침략으로 쇠퇴하고 결국 고구려 문자왕때 편입(494)
다. 정치
⑴ 왕 아래 馬加, 牛加, 狗加, 豬加의 사출도가 있었고 그 외 使者 등의 관리 존재
⑵ 가(加)들은 四出道를 다스림
⑶ 왕이 직접 통치하는 중앙과 합쳐 5부족 연맹 형성
⑷ 오곡이 익지 않으면 왕에게 책임을 물었다.
라. 사회
⑴ 법률이 매우 엄하였다.
①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다.
②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12배를 배상하게 했다(一責十二法).
③ 간음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④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은 사형에 처하고 그 시체를 산 위에 버려 썩게 한다(가부장적 가족제도 성립)
⑵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뉘었다.
지배층 | 가(加) |
호민(豪民) | |
피지배층 | 하호(下戶) |
노비(奴婢) |
⑶ 제천행사 : 원시시대 수렵사회의 전통인 영고(迎鼓, 12월)(농경사회의 전통을 보여주는 것)
⑷ 점복유행 : 소를 죽여 그 굽으로 길흉을 점치기도 했다(牛蹄占法)
⑸ 장례풍습 : 순장(旬葬). 흰옷.
마. 의의 : 연맹 왕국의 단계에서 멸망하였지만, 고구려, 백제의 원형이 됨
2. 고구려(高句麗)
가. 지형과 경제
⑴ 위치
동가강 유역의 졸본(卒本, 桓因, 환인)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⑵ 지형
산악지대이므로 토지가 농사에 적합하지 않아서 식량이 모자랐다. 활발한 정복과 약탈(掠奪)을 전개했다(전투가 생산활동).
⑶ 경제
토지가 척박하여 초기부터 평야지대로 진출하고자 하였고(掠奪經濟) 부경(桴京)이 있었다.
나. 건국
BC 37년 주몽(朱蒙)은 부여의 지배 계급 내의 분열, 대립 과정에서 박해를 피해서 남하하여 독자적으로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다. 정치
⑴ 5부족 연맹 : 계루부(桂婁部), 소노부(消奴部, 涓奴部, 연노부),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절노부(絶奴部)
⑵ 활발한 정복전쟁 : 요동 진출, 옥저 정복
⑶ 왕 아래에 상가, 고추가 등의 대가들이 있어 각기 사자, 조의, 선인 등 관리를 거느리고 독립된 세력 유지하였다.
⑷ 제가회의(諸加會議) : 중대한 범죄자가 있으면 사형에 처하고,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라. 사회
⑴ 부여와 비슷한 사회계급 구성
⑵ 제천행사 : 국동행사로서 동맹(東盟, 10월)이 있었다.
⑶ 조상신숭배 : 주몽(朱蒙), 류화부인(柳花婦人)
⑷ 데릴사위제(婿屋制, 서옥제)
⑸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 levirate)
⑹ 혼수품에 수의(壽衣, 繸衣) 포함
⑺ 점복의 풍습
3. 옥저(沃沮)
가. 지형
함경도 지역의 동해안에 위치했다.
나. 경제
⑴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었다.
⑵ 어물과 소금 등 해산물이 풍부했다.
⑶ 고구려에 포목, 어물, 염을 공납하였다.
다. 정치
⑴ 선진문화의 수용이 늦었고 일찍부터 고구려의 압박과 수탈로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⑵ 읍군(邑君)이나 삼로(三老)라는 군장이 다스렸다.
라. 사회
⑴ 부여족의 한 갈래이다.
⑵ 민며느리제(豫婦制)
⑶ 사후세계를 인정했으며 사람이 죽으면 뼈를 추려서 가족공동무덤인 목곽에 안치했다(骨葬制, 家族共同墓制).
4. 동예(東濊)
가. 지형
강원도 북부, 동해안 지방(원산지역)에 위치했다.
나. 경제
⑴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했다.
⑵ 단궁(檀弓), 과하마(果下馬), 반어피(班魚皮)를 생산했으며 명주, 삼베 등의 방직기술이 발달했다.
한 대(漢代) | 옹어(鰅魚) |
위진남북조시대(魏晋南北朝時代) | 반어(班魚) |
수당이후(隋唐以後) | 해표(海豹) |
다. 정치
읍군(邑君)이나 삼로(三老)라는 군장이 다스렸다고 고구려 태조왕 무렵에 고구려에 복속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라. 사회
⑴ 제천행사 : 무천(舞天)
⑵ 족외혼(族外婚, exogamy)
⑶ 책화(責禍) : 다른 부족의 경계를 침범하면 노비와 소, 말 등으로 배상해야 했다.
5. 삼한
가. 지형 및 경제
⑴ 한강 이남에 위치하여 농업이 발달했다.
⑵ 수리시설이나 벼농사를 위한 저수지를 축조했다.
김제 벽고(碧骨堤), 밀양 수산제)(水山堤, 제천 의림지(義林池), 상주 공검지(恭儉池), 의성 대제지(大堤池)
⑶ 변한지역에는 철 생산이 활발했고 철을 낙랑과 왜에 수출했고 철을 교역에서 화폐처럼 사용했다.
나. 정치
⑴ 융합문화
고조선 유이민의 남하로 새로운 문화가 보급되어 토착 문화와 융합하면서 마한, 진한, 변한의 연맹체 형성했다(BC 194년 준왕(準王) 진국에 와서 진왕(한왕)이 되었으며 위만조선말기 조선상 역계경(歷谿卿)이 20000명을 거느리고 진국이주).
⑵ 진왕(辰王)
목지국(目支國)의 지배자가 마한왕 또는 진왕(辰王)으로 추대되어 삼한을 통치했다.
다. 제정분리사회(祭政分離社會).
⑴ 정치적 지배자로 거수(渠帥, 渠率), 신지(臣智), 험측(險側), 번예(樊穢), 살해(殺奚), 불예(不例), 견지(遣支), 읍차(邑借) 등의 군장이 있었다.
⑵ 제사장(祭司長)으로서 천군이 신성지역인 소도(蘇塗)를 다스렸다.
라. 사회
⑴ 5월 수릿날의 기풍제(祈豊祭), 10월 계절제(十月祭)를 통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⑵ 무덤양식으로 주구묘(周溝墓), 움무덤(土壙墓), 돌널무덤(石棺墓)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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