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한 사람들
시1:12-14
들어가는 말
기독교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반응한 사람들의 역사라는 생각을 합니다. 19세기 말, 우리 민족을 찾아와 기이한 일을 베푸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 가운데 어떤 베푸신 은혜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은혜를 베푸실 때 누가 어떻게 쓰임을 받았을까요?
1885년, 아펜젤러와 함께 한국 최초 개신교 선교사로 최초 입국한 언더우드선교사는 평양을 거쳐 황해도 소래교회(한국 최초의 개신교회)를 방문하면서 자기들이 교회를 세우기 전에 이미 소래교회가 세워진 것을 보고 “우리는 이 땅에 씨를 뿌리러 온 것이 아니라 이미 뿌려진 씨의 열매를 추수하러 왔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언더우드 아펜셀러 게일 선교사님들이 지방 전도여행을 나서기도 전에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를 찾아와 세례를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조선말로 된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을 통해 이루어진 교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국 개신교 복음화의 시작은 중국 우장에서 활동하는 존 로스의 노력에 기인한다.” – 조지 길 모어
다음은 여호와께 받은 은혜를 존 로스, 김청송, 백홍준, 서상륜, 이응찬은 무엇으로 보답하였는가?에 대한 자료를 소개합니다.
역사적 배경
조선말기 현상: 광야에 선 조선 민족
- 정치: 보수(대원군;쇄국정책)와 개혁(민비 민영익)의 첨예한 갈등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
- 사회 - 부패: 탐관오리
- 경제 - 대기근
본문
1. 존 로스
1841 스코틀랜드 생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의 선교 도전 받음.
1872년 스코틀랜드 장로교 연합선교회 파송 선교사
같은 해 M. A. Stewart와 결혼한 후
캐나다를 횡단하여 일본 중국 산동성 지푸 도착 영구 우장, 봉천에서 거주.
제1차 여행
존 로스 선교사가 고려문을 방문하게 된 동기:
토마스 순교소식을 윌리엄슨선교사로부터 듣고 조선에 깊은 관심을 가짐, 그러나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서양선교사가 성경을 들고 조선을 찾아가는 것은 당시에는 목숨을 건 일
1874년 가을, 동역자 맥킨타이어 선교사와 고려문 찾아감.
1개월여에 걸친 긴 여행은 영구 우장을 출발하여 봉천, 홍경을 거쳐 압록강 상류인 임강(臨江) 유역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압록강을 건너려고 그 곳 주민들에게 도강(渡江)과 월경(越境)의 안내자가 되어줄 것을 간청했으나 아무도 응하지 않았을 뿐더러, 배를 빌려 주는 사람조차 없어서 멀리 한국의 산천만 바라다보고 그냥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통화현 부근의 산골인 한인마을에서 조선 상인들에게 한문 성경을 팔며 전도를 시도하였다. 조선인 한 사람을 사귀게 되었다. 그는 한문성경보다 양목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몇 권의 한문 성경을 주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성경을 가지고 아들에게 읽힌 것이 인연이 되어 몇 해 뒤에 이 사람 아들이 봉천까지 로스 목사를 찾아와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성서번역사업에 가담하였다.
로스는 한국 땅을 밟아 보려던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조선을 향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존 로스는 맥킨 타이어와 성경을 조선어로 번역하기로 마음을 모은 후,
2차 여행 1876년 봄, 천 리가 넘는 위험한 여행길에서 돌아오는 길에 한 번 더 조선 사람들을 만나보려고 압록강 안동 맞은편에 있는 고려문의 국제시장에 들렀다. 조선어 선생을 물색에 나섰다. 지식이 있고 한문을 잘 읽을 수 있는 사람, 의주 청년 이응찬을 찾았다.
로스와 맥킨타이어는 그에게서 한국어와 한국의 풍속 등을 배웠다. 로스 선교사는 훗날 최초의 한국 역사 책 (History of Corea, Ancient and Modern; with Description of Manners and Customs, Language and Geography, 존 로스의 한국사, 존 로스 저, 홍경숙 역, 살림) 을 집필했다.
고려문(지금의 책문)은 만주의 압록강 하류 봉황성 남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이 고려문은 17세기 중엽 만주의 후금(後金)이 중원을 통일하고, 남만주 서북편 일대에 긴 울타리를 친 후 조선의 내침을 막기 위해 고려 문중의 육문을 설치하여 한국의 사신과 상인들의 왕래를 고려문으로 제한하였다. 이 때부터 중국으로 들어가거나 중국에서 한국으로 나오려면 반드시 고려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로스 목사는 고려문에 위치한 중국인 여관에 여장을 풀고 매일같이 시장에 나가서 조선인을 만났다. 당시 고려문에 나온 조선인들은 서양인과 그들 나라에 대한 두려움만큼 호기심도 강했다.
로스는 정열적으로 그에게 조선어를 배우기도 했거니와 뜨거운 마음으로 그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응찬은 존 로스목사와 매킨타이어 목사가 번역하고 있던 누가복음 조선어 번역을 도와 그의 손과 발처럼 일을 했고 매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응찬에 이어 이성하, 백홍준, 김진기, 이익세 등도 만주에서 세례를 받았다.
성경 번역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간행되었고,
1887년에 이르러 <예수셩교젼서>라는 이름의 신약전서가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존 로스 선교사! 그는 조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조선에 깊은 관심을 가진 선교사였기에 한국 기독교전파에 혁혁한 공을 세운 선교사다. 그를 통해 만들어진 최초 한글 성경이 보급되기 시작되면서 기독교신자들과 교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는 1910년까지 선교사역을 다하고, 귀국! 1915년 8월 6일에 숨을 거두어 에든버러 뉴잉턴 Newington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이런 아름다운 문장을 남기고 있다.
“맞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조선인 학자가 한 명이라도 없었다면, 나는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2. 김청송 : 조선인 최초의 개신교회 이양자 교회 산파
김청송은 약 장사로 생계를 잇고자 심양까지 찾아왔으나 그것조차 여의치 못하여 삶의 한계에 도달하고, 절망의 끝자락에서 로스 선교사를 만났다. 성경 인쇄 식자공으로 부름을 받고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복음서 인쇄의 일을 하는 가운데 기독교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영접하였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는 신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복음에 대한 타오르는 열정을 가진 인물이었다.
1882년 누가복음이 3000부 인쇄 되었다. 그는 식자공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고 매서인이 되어 평안북도 강계 맞은 편, 압록강 건너에 있는 그의 고향 집안현(輯安縣)의 한인촌(韓人村)으로 찾아갔다. 쪽 복음을 짊어지고 고향인 집안현 한인촌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쪽 복음을 전하는 권서인이 되었다. 산골짝 깊은 곳에 도피하여 살던 조선인들에게 복음과 성경을 전했다. 그가 전한 성경과 소책자는 수천 권이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75명이 로스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1883년 봄, 김청송은 로스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수천 권과 전도문서를 가지고 고향에 돌아와 그곳 한인들에게 이것을 값싸게 보급하기 시작했다. 바보스럽다고 할 정도로 둔하고 센스가 없었던 김청송이었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6개월도 가지 않아 그의 노력은 결실로 이어졌다. 그에게서 복음서와 전도문서를 받은 이들이 읽고 또 읽어 그 속의 진리를 발견하고 주님을 믿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선교의 결실이 있자 김청송은 곧 로스 선교사에게 이를 보고하고 와서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성서번역과 출간에 전념하는 관계로 충분한 여유가 없었던 로스로서는 김청송의 부탁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다시 6개월의 시간이 흘러 김청송의 계속적인 전도사업으로 더 많은 회심자가 생기게 되었고, 심지어 1884년 늦은 가을에는 김청송이 반포하는 로스 성경을 읽은 수명의 집안현 조선인들이 더 구체적인 진리를 알기 위해 천리 길을 걸어 로스를 직접 찾아오는 사건이 발생했다. 로스는 더 이상 방문을 연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884년 11월 중순 제임스 웹스터(James Webster)를 동반하고 동북만주 산간지대를 무대로 한 집안현을 찾아갔다.
“외모, 옷차림, 예절과 언어에 있어서 신사다운 약 12명의 한인 무리”의 대단한 환영을 받으며 그곳에 도착한 로스 일행은 동네 촌장 농부집에서 사역을 수행했는데, 그 사랑채에는 남자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복음이 농업을 생업으로 하는 이 순박한 한국인 농민들의 영적인 눈을 열어 준 것이다.
(1884년 11월)“4촌락에서 모두 75명이 세례를 받고 교회에 입교했다.”
한국인에 의해서, 그것도 평신도를 통해 16세부터 72세 사이의 75명의 농사짓는 가장(家長)들이 복음을 통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것이다.
조선인 최초의 개신교회가 고조선의 중심지이자 고구려의 수도인 집안현 이양자(裡楊子)에 서게 된 것이다.
1년 후 1885년에는 25명이 더 세례를 받아 집안현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는 순수 세례교인만 100명으로 불어났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하던 때였다. 로스가 보낸 1884년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들 100명 이외에도 조선인 마을에서 세례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600명이나 되었다.
로스와 함께 선교여행에 참여했던 제임스 웹스터의 지적대로,“그들의 복음에 대한 훌륭한 이해와 신앙은 결코 인위적인 것으로 볼 수 없다. 그리고 이 골짜기들에 시작된 하나님의 위대한 사업은 조선을 복음화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잘 시사해 주고 있다. ”집안현의 복음 전도는 그곳 중국인들의 방해로 어려움을 받기도“ 했지만, 김청송의 복음의 열정과 복음을 전해 받은 이들의 순수한 신앙, 그리고 끊임없는 로스와 맥킨타이어 선교사의 후원과 지도로 놀랍게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1884년 11월 중순, 로스의 방문과 세례로 태동된 집안현 이양자교회는 그로부터 14년 후인 1898년 이성삼, 임득현을 집사로 임직했고, 그 주변에 수많은 교회들이 태동되는 모체가 되었다. 이양자교회는 김양선 목사의 지적대로,“만주의 모교회가 되었으며 동교회가 발전되어 남북만주 일대에 천여 개의 한인 교회가 설립되었고, 십여 개의 노회와 총회가 조직되었으며 4, 5개의 중학교와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김청송은 만주 집안 지역 복음화에 헌신한 것을 기점으로 평양지역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쓰임을 받았다.
3. 백홍준 : 최초의 공식적인 개신교 순교자
존 로스가 고려문을 처음 방문했던 때, 양복지를 원하는 조선상인 한 사람이 큰 이윤을 기대하며 존 로스를 찾아왔다.
존 로스는 그에게 양복지 대신 쪽복음 마가복음 한 권을 선물로 주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아들에게 읽어보라 넘겨 주었다. 그는 마가복음에 매료되어 책 전체를 읽자고 중국에 찾아갔다. 그가 바로 백홍준이다.
그의 헌신적 전도를 통해 의주지역에 세례 지원자가 100여명에 이르렀다.
1883년 이성하는 권서인으로 의주에 잠입하여 말로 복음을 전하다 성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중국에 들어가 다량의 로스 역 한글 성경을 가지고 의주 연안에 있는 구연성(九連城) 만주인 여관에 투숙했지만 워낙 국경의 경계가 삼엄하여 월경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는 할 수 없이 가지고 있는 성경 일부를 압록강에 버리고 일부는 소각시켰다. 이성하는 그 후 여러 차례 모험을 통해 국내에 잠입하여 성경을 반포하며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하였지만 건강이 악화되는 바람에 사퇴하였다.
백홍준(白鴻俊)이 1884년 가을부터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백홍준은 이성하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반입하다 적발된 후 한 가지 착상을 생각해 냈다. 성경을 한 장씩 뜯어내 돌돌 말아 종이 새끼를 만든 다음 시장에서 사온 여러 권의 책과 함께 묶어서 짐을 짊어지고 무사히 통과한 후에 헌 책은 모두 버리고 성경책으로 만든 종이끈을 다시 풀어 성경을 만들어 그것으로 전도하는 것이었다. 그 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다량의 한글성서를 고지 속에 넣어서 국경을 넘는 데 성공한 백홍준은 자기의 고향 의주를 중심으로 복음을 증거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향뿐만 아니라 근처 강계, 부성, 삭주 등지를 다니면서 전도의 지경을 점점 넓혀 갔다.
1885년에는 약 18명의 신자들이 예수를 믿고 자기 집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그 후 언더우드의 첫 조사로 임명받아 의주 지역의 복음의 확장에 큰 기여를 했다. 1889년 언더우드는 백홍준의 전도를 받은 의주 사람 김이련(金利鍊)과 그의 아들 김권근 등 33인을 압록강 건너편으로 데리고 가 세례를 주고 의주교회를 창설했다. 압록강 국경까지 가서 세례를 준 것은 국내에서의 세례를 금지한 국법을 존중하여서였다. 1892년 백홍준은 로스를 비롯한 외국인과의 내통 사실이 발각되어 국법을 어겼다는 죄명으로 검속되어 2년 동안 봉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해서 백홍준은 조선인으로서는 최초의 공식적인 개신교 순교자가 된 셈이다.
1915년 코리아 미션 필드(The Korea Mission Field)에 털리(R. T. Turly)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1897-98년 사이에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회 그레이함(J. N. Graham)과 복음 전파회(the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의 스프렌트(F. H. Sprent), 그리고 영국 및 해외 성서공회에 의해 선교 사역지 일부를 할당받은 필자는 강계로부터 압록강 서부 계곡을 따라 전도여행을 떠났다. 우리는 몇 주간의 전도여행 후에 그리스도인들이라고 고백하고 모든 우상 기물들을 버리고 세례 받기를 원하는 600명 이상의 가장(家長)들이 있음을 발견했다.
4. 서상륜: 최초의 권서인, 최초의 교회 설립
콜레라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중국을 드나들며 만주에서 동생 서경조와 함께 홍삼장사를 하였다. 이후 홍삼을 중국에 판매하는 한편 약재나 비단을 입수하여 국내에 판매하는 행상으로 생활하였다. 1876년(고종 13) 행상으로 만주 뉴좡(牛莊)에 갔다가 서상륜, 경조 형제는 의주 사람으로 홍삼을 팔겠다고 봉천, 영구로 돌아다녔다. 그러나 행상은 실패했고 형인 상륜이 장티푸스에 걸려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에 빠지고 말았다. 이 때 로스 목사는 모두가 멀찍이 달아나는 장티푸스 환자 서상륜을 손수 이끌고 선교회에서 경영하는 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그리고 그가 완쾌될 때까지 정성을 다하여 간호했다. 1878년의 일이었다.
서상륜은 병석에서 일어나자 로스 선교사와 매킨타이어 선교사에게 조선말을 가르쳐 주는 일을 하다가 성경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 로스 선교사의 전도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아우와 함께 신자가 되었다. 이응찬, 백홍준, 김진기 등과 함께 그리스도교 신자로 1879년, 로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1882년 로스 선교사와 함께 최초로 누가복음을 한국어로 번역하였다. 이후 만주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 사는 동포에게 전도하였다. 그리고 로스 목사의 성경 조선어 번역을 도와서 불철주야 일을 했고 출판이 끝나기까지 로스 목사와 함께 지냈다.
서상륜은 영국성서공회에 의해 한국 교회사상 최초 권서인으로 임명되었다. 아직 개신교가 허락되지 않던 때에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1883년 중국에서 구입한 성경전서들을 보따리에 싸서 입국을 시도하다가 국경지대에서 적발되어 의주군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당시 의주부청의 집사로 근무하던 장로교 교인이었던 김효순(金孝順)의 도움으로 탈출, 고향인 의주로 되돌아왔다. 압록강 세관에서 성경은 모두 빼앗기고 기독교 탄압이 계속되자 상황이 불리함을 깨닫고 동생 서경조와 함께 은신해 있다가 간신히 몸만 피신하여 고향의주로 돌아왔다. 그는 고향 의주에서 전도를 하며 복음을 전하다 이 사실이 관가에 알려져 체포위기에 놓이자 그의 삼촌이 살고 있는 황해도 장연군 송천리로 도피하였다. 황해도 장연군 솔내(松川) 마을로 이주하여 교회를 세우고 전도활동을 시작하였다..
소래교회는 1883년 5월 16일 존 로스 선교사를 통해 예수님을 만난 서상륜, 서경조 형제에 의해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세워진 초가집 예배당이다. 서경조 형제가 열심히 전도하여 신자들이 모이자 한국최초의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는 순수 우리 선진들에 의하여 세워진 최초자생교회라 할 수 있다. 솔내교회는 한자어인 松川교회로 불리기도 했지만 소래교회로 후세가 기록하고 있다. 동생이며 동역자였던 서경조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서울지역에서도 세례지원자가 300여명에 이르렀다. 서상륜은 그때도 귀하게 쓰임을 받았다. 새문안교회, 연동교회, 승동교회 설립의 밑거름이 되었다. 예를 들어, 1887년 경성에 새문안교회가 설립될 때, 설립교인 14명 중 13명이 그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이었다.
5. 이응찬: 최초의 개신교인
약재 상인으로 돈을 벌려고 압록강을 건너던 중 풍랑을 만나 모든 것을 잃어버림: 의주 사람인 그는 행상인이 되어 물건을 잔뜩 장만한 뒤 압록강을 건너는 배를 탔다. 그러나 배가 만주땅 거의 다 가서 파선하는 바람에 물건을 몽땅 물에 빠뜨리고 무일푼의 신세로 낯선 땅에 떨어졌다. 돌아갈 노자도 없이 막막한 지경에서 떠돌이 신세가 되어 있던 터에 조선 복음전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조선 행상인들과의 접촉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장로회 선교사 존 로스 목사를 만났다.
조선어를 가르쳐 주는 교사로 로스 선교사에게 스카웃 됨
조선어 성경 번역에도 친구들과 함께 참여
돈은 없고 개성 상인 술꾼 아편쟁이였던 그가 어떻게 조선사람으로 최초의 개신교인이 되었을까? 나라 밖 만주땅 영구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 해가 바로 한일수호조약으로 문호가 개방된 1876년이었다.
번역자를 구하는 존 로스를 만나 마약보다 더 강한 복음에 정복됨
콜레라 지역에 들어가 복음 전하다 순교
마무리하는 말
여호와께 받은 은혜를 존 로스, 김청송, 백홍준, 서상륜, 이응찬은 무엇으로 보답하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