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선사 시대 문화와 국가 형성
제1절 선사 시대
Ⅰ. 구석기문화
1. 시기 구분 기준
한반도의 구석기는 약 70만전부터 시작되었다. 구석기 시대는 돌을 다듬는 기법에 따라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한다.
시기 | 연대 | 내용 |
전기 | 50~100만년전 | 뗀석기(打製石器). 하나의 석기를 다용도로 사용했다(一石器多用途). 주먹도끼(兩面核石器, hand ax), 뾰쪽찍개, 주먹찌르개(충북 청원 만수리). 찍개(외날찍개, 打截器, chopper), 양면찍개(양날찍개, 兩面打截器, chopping tool), 긁개(搔器, scrapper) |
중기 | 10~4만년전 | 몸돌석기(石核石器). 여러 석기를 만들어 용도별로 구별해서 사용했다(一石器一用途). 긁개(搔器, scrapper), 밀개(削器, end-scrapper), 찌르개(尖頭器, 手鎬, point), 돌칼(石刀), 송곳(錐) |
후기 | 4~1만년전 | 잔석기(細石器). 돌에다 쐐기 같은 것을 대고 형태가 같은 여러 개의 정교한 석기를 제작했다(同種石器 大量生産). 잔석기(細石器)와 이음도구(모음연장, 複合道具). 슴베찌르개. 톱. 창(槍). 활(弓). 작살 |
2. 대표적 유적지
시기 | 유적지 | 내용 |
전기 | 평양 상원(詳原) | 검은 모루동굴(洞窟), 용곡리 동굴:화석으로된 사람뼈 출토 |
연천 전곡리(全谷里) | 주먹토기(Acheulean style) |
충북 청원 만수리 | 주먹찌르개(手鎬. 尖頭器) |
경기도 남양주 호평 | 뚜르개 |
제천 점말 동굴 | |
단양 금굴 | 70만년 유적지로 가장 오래됨. 외날 긴찍개, 흰날 주먹도끼. Acheulean(아슐) 및 Levallosian(르발로와) 석기 발견, 동물화석 발견 |
파주 적성면 | 주월리(舟月里), 가월리(佳月里) |
충남 공주 석장리(石壯里) | 좀돌날석기의 몸돌 부분 처음 발견, 불땐 자리(爐址)와 기둥 등이 있는 집터 |
중기 | 함북 웅기 굴포리(屈浦里), 부포리(鮒浦里) | |
평양 상원 용곡리(龍谷里) | |
평남 덕천 승리산(勝利山) 동굴 | homo sapiens(古人, 슬기인) 화석 |
평양 역포구 대현동(大峴洞) | homo sapiens(古人, 슬기인) 화석 |
강원 양구 상무용리(上舞龍里) | |
경기 연천(漣川) 남계리(楠溪里) | |
경기 양평 병산리(屛山里) | |
충남 공주 석장리(石壯里) | |
충북 제천 명오리( 鳴梧里) | |
충북 단양 적성면 애곡리 수양개(垂楊介) | 고래와 물고기 등을 새긴 조각 |
제주도 빌레못 | |
경남 통영 상노대도 | 조개더미(貝冢) 최하층 |
경북 거창 임불리 | |
강원 홍천 하화계리 | |
후기 | 함북 웅기 | 굴포리(屈浦里), 부포리(鮒浦里) |
평남 덕천 승리산(勝利山) | homo sapiens sapiens(슬기슬기인) 뼈화석(2개의 이발이 박혀있는 35살 가량의 남자의 아래턱뼈 1점) 발견 |
평양 만달리동굴(萬達里洞窟) | homo sapiens sapiens(슬기술기인) 뼈화석(24~30살 가량 남자의 거의 완벽한 머리뼈 1점과 아래턱뼈 2점) 발견 |
충남 공주 석장리(石壯里) | 평지 집자리. 화덕자라(爐址). 고래와 물고기 등을 새긴 조각 |
충북 청원 문의면 노현리 두루봉동굴 | 혈거(穴居). 4만년전의 3~4살되는 어린 두사람(홍수아이)의 뼈 발견. |
충북 청원 옥산면 t로로리 | 쌀재배 흔적으로 1만 4천년전 볍씨 출토(세계에서 가장 오래딘 볍씨) |
충북 단양 적성면 애곡리 수양개(垂楊介) | |
충북 단양 상시리(上詩里) |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homo sapiens, 슬기슬기인. 新人) 머리뼈 화석 출토. 바위 그늘(주거) |
경기 광주 실촌읍 곤지암 | 주먹도시. 슴베찌르개 |
강원 양구 상무용리(上舞龍里) | |
단양 금굴 | |
함북 종성 동관진(潼關鎭) | |
충북 보은 장내리(長內里) | |
제주 한경면 고사리 | 작살. 화살촉 |
3. 구석기 시대의 생활
가. 거주지
구석기인들은 동굴(평양 상원 검은 모루동굴, 충북 청원군 두루봉동굴), 바위그늘(충북 단양 상시리), 강변의 언덕 또는 평지(충남 공주 석장리 집자리)에 막집을 짓고 살았으며 기둥을 세워 만든 움막집에서는 8~10명 정도 가족이 살았을 것이다.
나. 식생활
주로 짐승을 사냥하거나(狩獵) 물고기를 잡거나(漁撈) 나무열매를 채집(採取와 蒐集)하여 먹고 불을 발견한 이후에는 음식을 익혀 먹었다.
다. 도구
돌을 깨뜨려 만든 뗀석기(打製石器)와 짐승의 뼈를 가공한 골각기(骨角器) 등의 연장을 사용하였고 사냥(주먹도끼. 찍개. 찌르개. 필매돌), 조리(긁개. 밀개), 공작용(새기개)으로 제작되었다.
라. 사회
구석기사회는 계급이 없는 평등사회였으며 가족단위(氏族社會)로 이동하면서(移動社會) 사는 무리사회(群社會, horde)를 이루었다.
마. 예술
충남 공주 석장리 움막 문앞에 석상, 사람, 새, 사슴 등이 새긴 선각화(線刻畵) 등 구석기인들은 예술활동을 보여주는 유물이 발견되었고 예술활동은 사냥의 번성을 비는 주술적 의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