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소문(한국소통문화연합) 고전, 역사, 과학, 문화, 예술, 여행, 단체, 인물 탐방/2020.11.3
독립운동가 최재형
안중근 의사를 뒷받침한 최재형 선생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경기도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러시아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를 탐방하는 시간이 있었다.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최재형 선생이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지원했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다. 함경북도 경원 송 진사댁 노비였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9살 되던 해 황토비와 폭염 그리고 장마로 경원지역에 콜레라가 발생하였다. 오랫동안 가뭄과 홍수까지 당한 경원지역의 소작농들은 송 진사댁의 도움을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수전노인 송 진사는 창고를 열지 않았다. 노비였던 재형의 아버지는 송 진사를 설득했지만 되려 매만 벌었다. 그 와중에 재형의 어머니가 콜레라에 걸리자 송 진사는 외딴곳에 버리라고 명했다. 그렇게 쓸쓸히 죽은 아내의 죽음을 목격한 재형의 아버지는 소작농들의 반란에 동조해 대문을 열어주고 식구들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넜다. 예로부터 함경도 지방 사람들이 계절 농사를 짓던 아라사 땅, 집도 없이 토굴에서 생활이지만 노비에서 벗어나 자유의 삶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재형의 아버지는 없는 살림에도 재형을 학교에 보냈다. 하지만 일손이 턱 없이 부족했던 터라 살림을 꾸리던 형수는 이를 못마땅히 여겨 재형을 구박한다. 결국 이 구박에 못 이겨 재형은 돈을 벌기 위해 포시에트 항구로 무작정 떠났다. 곧 도착할 것 같았던 항구는 무려 이틀이나 걸렸다. 노숙에 먹지도 못한 9살 소년은 동사 직전 포시에트 항구 창고 앞에서 사람들에게 발견되었다. 다행히 자식이 없었던 마음씨 좋은 선장 부부에게 입양되어 학업을 계속하였고, 선장 부부와 세계 일주를 겸한 무역업을 배우게 된다. 선장 부부의 도움으로 러시아 국적을 갖게 되었고, 은퇴한 선장 부부의 도움으로 모르스키 상사에 통역으로 취직하였다. 10여 년 만에 아버지를 만나러 지신허로 찾아갔지만, 대부분의 조선인이 얀치헤로 이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얀치헤에 도착해 아버지를 만나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 정착해 가정을 꾸린다. 마침 블라디보스토크에 군대가 이주하며 병영을 건설이 한창 이어 중국인 노동자들에게 통역사로 초빙되었다. 이 과정에서 도로 건설 현장에 투입된 조선 사람들이 러시아 사람들과 마찰을 겪자 이들을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 이를 좋게 여긴 도로 건설국에서는 얀치헤 구간의 통재로 최재형에게 맡겼고, 그 공으로 은급 훈장을 받게 되었다. 공사 후 얀치헤 읍을 관리하는 프리아무르 주 총독은 최재형을 안치헤 읍장인 도헌으로 선정했다. 도헌이 된 최재형은 조선 사람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부대가 들어오면 고기와 우유가 부족할 것을 내다보았다. 한인들에게 돼지와 닭을 키우게 하고, 열심히 밭을 일궈 채소와 꽃을 가꾸게 하였다. 또한 연어 산란철이 되면 공동으로 연어 잡이를 도왔다. 그 결과 얀치헤 읍의 재정도 풍성해져 문화휴식 공원을 만들었다. 재형은 자신이 이렇게 성공한 이유는 학교에서 배움 때문이라 생각하고, 2천 루블을 내놓아 학교를 세웠다. 또한 조선인들이 거주하는 마을마다 32개의 소학교를 세웠고, 고등중학교를 세우고 우수한 졸업생을 선발해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로 유학을 보냈다. 1903년 초가을 간도 관찰사 이범윤이 최재형을 찾아왔다. 이범윤은 마패를 보이며 간도 땅을 지킬 최소한의 무기를 요청하였다. 최재형은 15년 넘게 양치헤의 도헌으로 있으며 학교를 세웠기에 자금이 충분치 않았지만 이범윤에게 상당한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이 돈으로 이범윤은 간도에서 장정들을 모집해 군대를 만들어 간도 주민을 보호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1904년 2월에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재형을 찾아온 이범윤은 조선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일본과 싸우기 위해 국적을 바꿔 러시아 군인이 될 수 있는지 물었다. 갑자기 찾아온 이범윤과 그의 부대를 먹이고 입히는 일이 당장 최재형에게 떨어졌다. 최재형은 도헌의 자리에서 물러나 러시아 군납 사업에 박차를 가하며 이범윤 부대에게 무기를 대고, 의병들에게 군복과 식량을 대었다. 기대와 달리 러일전쟁은 1905년 일본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이범윤은 최재형에게 의병을 하루빨리 조직해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자고 주장했지만, 의병 조직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최재형은 낙담한 이범윤에게 노보키예프스크에 있는 학교에서 한인 학생들을 가르치게 했으며, 이범윤 부대를 위해 넓은 집을 사서 노보키예프스크로 이사했다.
1908년 어느 날 이범윤 관찰사를 찾는 낯선 남자가 최재형을 찾아왔다. “저는 대한제국에서 온 의병 안중근입니다.” 그는 조선에서 의병활동을 하기 어려워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갔으나, 이미 일본군이 간도 파출소를 설치하였고, 이범윤이 간도를 떠났다는 것을 알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오게 되었다고 소개하였다. 이곳에서 안중근은 이위종을 만나 헤이그에서 이준 검사가 목숨을 버린 상황을 들으며 분개했다. “일본이 더 큰 야욕을 부리기 전에 힘을 모아 국내 진공작전을 펴야 합니다.” 이 말에 힘을 얻은 이범윤은 자신이 조직한 사포대만으로도 충분하니 최재형에게 무기를 구해줄 것을 요청한다. 며칠 후 최재형은 의병활동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했다. 총장에는 최재형, 부총장에는 이범윤, 회장에는 이위종, 부회장에는 엄인섭, 서기에 백규삼이 뽑혔다. 안중근과 최재형은 한인 마을을 찾아다니며 의병 자금을 모았다. 안중근은 수청 지역에서 6천 루블을 모금했고, 최재형은 1만 루블을, 이위종은 1만 3천 루블을 지원했다. 동의회는 <해조신문>에 동의회 취지문을 개제했다. ‘해조신문’에 실린 동의회 취지문을 보고 연해주의 각 지역에서 총을 보내와 100여 정이 모였다. 1908년 6월 초, 의병 300여 명을 모아 이범윤을 총대장에, 안중근은 참모장에 올랐다. 7월 7일, 드디어 100여 명의 소규모의 의병부대가 국내 진공작전을 개시했다. 최재형과 이범윤이 총지휘를 맡고, 안중근과 엄인섭이 보조하면서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원군에 주둔 중인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하여 대승을 거뒀다. 8월에는 압록강을 따라 목재를 옮기려고 세운 일본군의 시설물 등을 전부 파괴했으며, 신아산 부근에서 벌인 홍의동 전투에서도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홍범도 부대와 연합하여 일본군을 몰살하는 큰 쾌거를 이룩했다. 안중근은 전투 중 생포한 일본 군인과 상인들을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살려주지만, 이들 때문에 의병부대의 상황이 일본군에게 알려지며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안중근의 의병부대가 패하게 되는 단초가 되었다. 이 일로 의병들은 안중근을 원망하며 뿔뿔이 흩어졌으며, 일본은 러시아 정부에 압력을 넣어 러시아 한인들의 의병 활동을 금지했으며, 이위종을 국외로 추방토록 하였고, 최재형에게도 독립운동을 못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는 사이 회령의 영산 부근에서 벌인 전투에서도 일본군에게 참패를 당하며 의병들이 흩어졌다. 이 과정에서 안중근은 자신이 살려 보낸 일본 포로들 때문에 의병부대가 패했다며 괴로워했다. 최재형은 이런 안중근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대동공보사로 보냈다. ‘대동공보’는 폐간된 해조신문의 인쇄 기계를 최재형이 사들여 만든 신문으로 1908년 11월 18일 한글로 첫 신문을 발행했다.
이후 최재형은 홍범도와 함께 의병을 모아 다시 일본을 압박할 계획을 세우지만, 얀치헤에 있는 러시아 군인들이 최재형의 의병 사무소를 급습해 총기와 탄약을 압수해 버렸다. 러시아에 귀화한 한인을 러시아 군인으로 강제 징집하였고, 귀화하지 않은 한인들을 추방하기 시작하자 더 이상 의병활동을 진행할 수 없었다. 의병 활동에 소극적인 최재형에게 불만을 품은 이범윤의 부관은 최재형을 암살하려 시도했지만 천운으로 생명은 건질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이 자신 때문이라 자책하던 안중근은 김기룡과 강기순을 데리고 최재형을 방문했다. 세 명 모두 왼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저희는 이대로 의병활동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언제든 기회가 오면 다시 일어나자는 뜻으로 동지 열두 명이 왼손의 약지를 잘라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 독립이라고 쓰면서 맹세했습니다.” “저와 엄인섭 동지는 이토 히로부미를 엄단하고, 김태훈 동지는 이완용을 암살하기로 맹세했습니다. 만약 성공하지 못하는 날엔 우리 모두 자결하여 조선 동포에게 속죄하기로 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여가 지난 어느 날, 대동공보사에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외신이 날아들었다. 안중근은 대동공보를 통해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언제, 몇 시 기차를 타고 와서 언제 내리는지 철저하게 조사를 시켰으며 거사 계획을 최재형에게 보고했다. 최재형은 편집 기자인 이강에게 취재하는 척하며 안중근과 긴밀하게 연락하도록 했으며, 행동대장으로 우덕순과 조도선이 안중근을 돕기로 했다. 최재형은 며칠 후 안중근을 집으로 불러 브라우닝식 8연발 단총을 내주며 의거의 성공을 기원했다. 또한 사격 연습을 위해 자신의 집 골방을 내주었다. 1909년 10월 21일 안중근은 우덕순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했다. 편집기자 이강은 대동공보 하얼빈 지국장에게 안중근과 우덕순을 소개하는 편지를 써서 안중근에게 주었다.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은 거사를 완벽하게 성공시키려면, 동청철도의 출발지인 남장춘과 관성자,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가 도착할 하얼빈과 채가구 모두에서 거사를 준비하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경비와 인력 부족으로 최종적으로 하얼빈과 채가구 두 곳에서만 거사를 진행하기로 하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채가구에 정차하면 우덕순과 조도선이 기차에 뛰어올라 저격하기로 하고, 만일 실패하면 종착지인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토 히로부미는 10월 25일 하얼빈에 도착할 예정이었지만, 26일 오전 도착으로 일정이 변경되어 채가구에서 거사는 물거품이 되었다. 26일 새벽 안중근은 하얼빈역에 도착하였다. 하얼빈역은 러시아 병사들의 삼엄한 경비 속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 혼잡했다. 열차는 오전 9시 하얼빈역에 도착했고,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기차 안에서 회담을 하며 30여 분 후에 이토 히로부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러시아 군악대의 환영 팡파르 속에 의장대 사열을 마친 이토 히로부미가 귀빈 열차 쪽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한 발, 두 발… 일곱 발까지 총성이 울렸다. 이어 러시아 병사들의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잠시 후 안중근의 힘찬 외침이 하얼빈 역에 울려 퍼졌다. “코레아 우라! (대한제국 만세!)”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 세 발을 정확히 쏘았고, 나머지 네 발은 함께한 수행원에게 날아갔다. 이토 히로부미는 급히 기차 안으로 옮겼지만, 30여 분 만에 목숨이 끊어졌다.
세계 여러 나라의 언론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과 안중근의 의거를 앞다투어 보도했다. 안중근은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 15가지’를 들면서 이토 히로부미의 죄를 나열했다. 최재형은 대동공보에 이 내용을 특별 보도했다. 최재형은 하얼빈역이 러시아가 담당하는 지역이었고 제3국에서 체포되었으니, 국제재판소에서 재판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최재형은 대동공보사의 대표이자 변호사인 미하일로프에게 안중근의 변호를 맡게 했다. 그러나 일본은 안중근을 국제법으로 재판하지 않고 일본 법정에 세웠으며 철저하게 비공개로 재판을 몰고 갔다. 일본은 변호를 허락했지만, 막상 재판에서는 변호사들이 일본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변호를 거부하고, 대신 일본인 변호사인 가마타와 미즈노에게 변호하게 했다. 안중근은 감옥에서 <동양평화론> 집필에 들어갔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을 마칠 수 있도록 보름 정도 사형 집행을 늦춰달라고 청원했지만, 3월 26일 뤼순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최재형은 안중근의 시신이라도 잘 모시려고 온갖 방법으로 알아보았지만, 일본은 어디에 묻었는지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안중근이 순국한 후 최재형은 안중근의 가족을 돌보았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었다. 러시아 공사 이범진은 이 소식을 듣고 목을 매 자결하면서, 모든 유산을 최재형에게 남기며 조국을 되찾는 데 쓰라고 유언을 남겼다. 일본은 안중근의 배후로 최재형을 지목하고, 밀정을 풀어 단서를 찾으려 미행을 시작했다. 최재형은 가족을 데리고 슬라비얀카로 이사했다. 이후 슬라비얀카에는 비정규 의병부대인 파르티잔이 늘어나면서 항일 투쟁의 중심지로 변해갔다. 일본이 계속 러시아 정부에 압력을 넣자 러시아는 이범윤, 유인석, 이상설 등 한인 지도자 40여 명을 체포하고, 이범윤을 비롯한 한인 지도자 8명을 이르쿠츠크로 추방했다. 또한 국권 회복운동에 관한 논설을 실었던 <대동공보>도 폐간되었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들이 모여 사는 개척리를 러시아는 강제 철거하고, 러시아 기병부대의 병영으로 삼았다. 쫓겨난 한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 언덕에 신개척리 마을을 만들고 새롭게 한국을 부흥시킨다는 뜻으로 '신한촌'을 건설하였다. 최재형은 청년근업회 신문인 <대양보>의 사장으로 취임해 대양보신문사를 신한촌으로 옮기고, 일주일에 두 번씩 목요일과 일요일에 신문을 발간하였지만 이 역시 항일단체임이 드러나 폐간되었다. 최재형은 이상설과 논의해 러시아와 일본의 간섭 없이 일할 수 있는 묘안을 짜냈다. 러시아에 사는 한인 동포에게 실업을 권장하며 일자리를 소개하고 교육을 보급한다는 취지를 앞세워 '권업회'를 설립했다. 권업회 임시의회 총재로 최재형이 선출되었고, 부총재로 홍범도가 선출되었다. 1911년 말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공식 창립총회를 열어 총재인 최재형은 의장에 이상설을, 부의장에 이종호를 그 외 의병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을 위원으로 뽑았다. 권업회 회원 수는 무려 9천여 명에 가까웠는데, 러시아 한인 마을 57곳에 사는 한인 대부분이 가입하였다. 권업회 창립 후, 대양보의 인쇄기계를 사들여 권업회 신문을 발행하였다. 주필에 신채호, 이상설, 장도빈을 임명하여 완전한 한글판 <권입신문>을 발간하였다. 1914년 6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일본은 러시아와 동맹국이 되어, 러시아에 사는 한인 지도자 28명을 추방하라고 러시아에 압력을 넣었다. 1916년 러일 신협약이 체결되자,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사는 한인들을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최재형은 체포되어 우수리스크군 소재지에 감금되었고, 권업회는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게 되었고, 권업신문도 폐간되었다.
1917년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가 볼세비키 혁명으로 물러났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정부는 대지주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주요 공공시설을 구가의 소유로 만들었다. 러시아 혁명으로 극동 지역은 혁명파인 적위파와 반혁명세력인 백위파가 싸우는 내전에 휩싸였다. 최재형을 비롯한 의병들은 한인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전로한족대표자회의>를 만들었다. 1918년 2월, 미국과 영국 등 열여섯 나라가 러시아 혁명이 극동으로 번져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시베리아에 국제간섭군을 파견했다. 일본은 7만여 명의 군인을 파견하여 시베리아 전 지역을 장악하려 했다.
1919년 1월, 러시아 전역에 사는 한인 대표들이 니코리스크 한족회로 모여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대표를 선출하였다. 그 과정에서 임시정부를 세워야 할 필요성을 느낀 임원들은 한족상설회의 이름을 <대한국민의회>로 바꾸고,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박영효를 부통령으로,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하는 임시정부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처음으로 조직했다. 1월 22일 고종 황제가 급서하자 신한촌에 있는 대한국민의회 건물에도 조기가 걸렸다. 이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검거를 피해 많은 독립투사들이 연해주로 몰려들었다. 대한국민의회는 회장 문창범, 부회장 김철훈, 서기 오창환을 선출하고, 외교부장에 최재형, 선전부장에 이동휘를 임명하고, 이동휘를 간도에 파견하여 독립운동을 선전 선동하게 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 모인 독립투사들은 흩어져 있는 독립단체를 하나로 통일하고 임시정부를 세우기로 하였다. 새 정부의 이름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하고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정하고 당분간 상하이에 본부를 두기로 하였다. 재무총장에 임명된 최재형은 외교를 통한 임시정부에 반대해 무장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취임하지 않았다. 국제간섭군 명분으로 러시아 땅에 진주한 일본은 러시아 황군인 백군과 손을 잡았다. 한인들의 적은 일본이었기에 러시아 황군과 결합한 일본을 상대로 싸우는 파르티잔 부대와 협력하여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최재형은 전 재산을 내놓고 집을 떠났다. 1920년 3월, 아무르 강 하구 니콜라예프스크에서 한러 연합부대가 일본군을 섬멸한 니항 사건이 일어났다. 최재형은 혁명군의 참모장인 아들 파벨과 함께 파르티잔으로 싸웠다. 연전연승을 하던 파르티잔들은 일본군의 총공세에 밀리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신한촌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가까운 우수리스크에 있는 가족들이 걱정되었다. 4월 4일 밤 블라디보스토트 주재 일본군 사령관은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일대에 있는 혁명군에게 무장을 해제하라고 명령했다. 최재형은 이날 야음을 틈타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를 뒤쫓던 기토에게 발각되어 우수리스크 일본군 임시 감옥으로 끌려갔다. 최재형의 죄목은 의병조직인 동의회 총재, 대동공보 사장, 권업회 총재, 상하이 임시정부 재무총장 등이었다. 다음 날, 일본군은 최재형을 비롯한 일곱 명을 다른 감옥으로 이송하였다. 말이 이송이지 재판도 없이 사형에 처했다. 61세의 나이로 최재형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시신이나 묘지는 찾지 못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안중근 의사를 뒷받침한 최재형 선생ㅡ인터넷서점 인터파크도서 - http://book.interpark.com/blog/postArticleView.rdo?blogName=joyjunyi&listType=B&listSize=3&postNo=5887844&prdIpTp=20
청년 안중근과 검사의 인연, "난신적자" - 전우용 교수 페북 : 네이버 블로그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eonjunews&logNo=222134150255&proxyReferer=http:%2F%2Fblog.naver.com%2Fjeonjunews%2F222134150255
절약 정신으로 지은 집, 축구장 6배 크기 정원이 있는 40년 대작 '죽설헌(竹雪軒)' - YouTube - https://m.youtube.com/watch?v=C1k480JJkz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