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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나와 궁극적으로 자연으로 돌아간다. 곧 자연은 인간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인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은 자연과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낳아주고 다시 거두어주는 자연에 대해 그래서 인간은 감사한다.
자연이 인간에게 베푸는 은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다시 거두어들일 때까지 자연은 인간에게 대지로부터 먹을 것을 제공한다. 이런 과정은 규칙적으로 반복된다. 이런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살면 큰 무리가 없다. 실로 자연은 삶의 터전이자 인간의 동반자다. 이처럼 자연에 감사하며 그것과 공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난 인간은 급기야 ‘자연법’을 모든 법의 기준으로 삼았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존경심이 얼마나 대단한 지는 경제학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애덤 스미스의 물리학에 대한 인상은 얼마나 대단하였던지 그는 당시 물리학을 “일찍이 인간이 해온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존 스튜어트 밀은 “부의 생산에 관한 법칙과 조건이 물리학적 진실의 성격을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경제사회를 자연세계와 동일하게 취급하였다.
그 후 신고전학파경제학은 물론이고 마르크스경제학 나아가 최근에 새로이 등장하고 있는 진화경제학도 모두 자연과학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이를테면, 신고전학파 경제학, 마르크스경제학과 진화경제학은 각각 ‘뉴턴의 고전물리학’, ‘양질전환의 법칙’ 과 ‘다윈의 진화생물학’으로부터 경제와 사회를 이해한다. 급기야 자연은 경제학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으로 될 뿐 아니라 경제학의 규범으로까지 승격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연에 대한 이런 짝사랑과 달리 자연이 인간에게 항상 자애롭지만은 않다. 자연은 아무런 이유 없이 인간을 괴롭힌다. 그것도 예기치 않게 말이다. 자연은 한발, 한파, 홍수, 태풍은 물론 지진과 같은 대재앙으로 돌연 인간을 공격한다. 자연의 규칙에 감사하며 무한히 신뢰를 보내던 인간은 자연의 배신에 분노한다. 결국, 동반자적 관계가 유지되기위해 자연은 인간에 의해 어느 정도 관리될 필요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자연에 감사하며 그 법칙을 존중하였기 때문에 자연은 변함없이 인간의 동반자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가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성서에 의하면 신은 자연과 인간을 엿 새 만에 창조하였다. 창조자가 창조물의 소유자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소유자는 자신의 소유물에 대해 처분권을 행사할 수 있다. 나아가, 자신의 대리인에게 소유물에 대한 처분권을 위임할 수도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세기 1장 28절) 이로써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릴 권리를 ‘공식적으로’ 얻게 된 것이다. ‘자연통치권신수설(神授說)’이라고나 할까.
신으로부터 자연을 통치할 권리를 부여받자마자 인간은 이 ‘공권력’을 무제한적으로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 신이 유일신인 ‘하나님’일 경우 이 권력은 최고의 정당성을 갖게 된다. 이때부터 자연은 인간의 동반자로부터 지배대상으로 전락하여 버렸다.
이제부터 인간은 일치 단합하여 자연이라는 ‘공공의 적’을 정복하고 본격적으로 착취하기 시작한다. 그러한 정복전쟁에는 신의 가호가 항상 따르니 결코 두렵지 않았다. 이러한 ‘성전’은 서양에서 자본주의와 산업화가 시작되었을 때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캘빈주의 교리에 힘입어 자본주의적 탐욕이 정당화되고 새로운 생산기술이 도입되자 인간은 자연의 존재가치와 존재이유를 고려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수탈하기 시작하였다. 자원채취과정에서 자연은 훼손되고 파괴되었다. 죽은 물질에 대한 가공기술이 생명체에게마저 적용되면서 리버풀과 맨체스터는 검은 연기로 뒤덮였고 라인강은 쓰레기와 썩은 물로 흘러 넘쳤다. 이 때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착취’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에 못지않았다. 기계와 탐욕 앞에서 실로 자연은 죽어갔고 생명은 모욕당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세계의 지속가능성 마저 위협하였다.
<4대강 살리기> 프로젝트가 MB정부에 의해 착착 실행되고 있다. 나도 강이 죽어가고 있거나 인간을 지나치게 괴롭히면 인간에 의해 강은 어느 정도 관리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진행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을 복원하고 생명을 살리기 위한 방안은 미흡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 강의 건강성을 유지시켜 주던 모래톱과 자갈, 바위는 물론 퇴적침전물마저 깨끗이 ‘척결’하고 그 자리에 콘크리트바닥으로 발라버릴 모양이다. 비전문가인 내가 보기에도 이건 강을 살리거나 관리하는 것과 거리가 한참 멀다. 오로지 토목기술을 동원한 강에 대한 정복의지만 오만하게 하늘을 찌를 뿐이다. <4대강 살리기>를 통해 역설적으로 강은 죽어 가고 있으며 생명은 모욕당하고 있다.
그런데도 자연에 대한 이명박 ‘장로님’의 정복욕망은 그칠 줄 모른다. 그와 그의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동반자에 대한 윤리와 예의가 없다. 후안무치하다. 신의 가호를 받음인지 몰라도 장로님의 의지는 최근 더 결연해졌다. 마치 십자군원정을 준비하는 사람 같다.
이 결연한 원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성장배경이 된 토건업체의 이익이 증가할 것이다. 4대강 사업으로 주식시장에서 건설주가 인기를 끌고 있다니 정말 그런가 보다. 그리고 일용직들의 일자리가 단기적으로 늘어갈 것이다. 그리고 이 탐욕스럽고도 무심한 자들의 표에 힘입어 보수 세력의 권력은 연장될 것이다.
한 줌 보수 세력의 재산과 MB의 권력을 지켜주기 위해 우리는 너무나 큰 손실을 치러야 한다. 우리의 삶의 터전이자 영원한 동반자를 훼손하면서. 그것도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말이다. 창세기의 말씀이 이 후안무치한 행동에 “능력을 주셨다면” 참으로 유감이다.
한성안/영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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