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여기 있다
맹재범
접시와 접시 사이에 있다
식사와 잔반 사이에 있다
뒤꿈치와 바닥 사이에도 있는
나는 투명인간이다
앞치마와 고무장갑이 허공에서 움직이고
접시가 차곡차곡 쌓인다
물기를 털고 앞치마를 벗어두면 나는 사라진다
앞치마만 의자에 기대앉는다
나는 팔도 다리도 사라지고 빗방울처럼 볼록해진다
빗방울이 교회 첨탑을 지나는 순간 십자가가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쪼그라진다
오늘 당신의 잔고가 두둑해 보인다면 그 사이에 내가 있었다는 것, 착각이다
착각이 나를 지운다
빗방울이 바닥에 부딪혀 거리의 색을 바꿔놓을 때까지 사람들은 비가 오는지도 모른다
사무실 창문 밖 거리는 푸르고 흰 얼굴의 사람들은 푸르름과 잘 어울린다 불을 끄면 사라질지도 모르면서
오늘 유난히 창밖이 투명한 것 같아
커다란 고층빌딩 유리창에 맺혀 있다가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있었다
나는 도마였고 지게차였고 택배상자였다
투명해서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무엇이 없다면 아무것도 될 수 없다
밖으로 내몰린 투명인간들이
어디에나 있다 사람들은 분주히 주변을 지나친다
나를 통과하다 넘어져 뒤를 돌아보곤 다시 일어서는 사람도 있었다
너무 투명해서 당신의 눈빛을 되돌려줄 수 없지만
덜컥 적시며 쏟아지는 것이 있다
간판과 자동차와 책상과 당신의 어깨까지
모든 것을 적실 만큼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