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손(祖孫)
天地(천지) 開闢後(개벽 후)에 陰陽(음양)이 肇判(조판)하니
天氣(천기)는 下降(하강)하고 地氣(지기)는 上陞(상승)하여
人物(인물)이 品生(품생)하니 三才(삼재)가 되었어라.
天地(천지)에 五行(오행)이요 사람의 五倫(오륜)이라.
祖子孫(조자손) 됨이 根本(근본)이 다 있도다.
山岳(산악)은 氣脈(기맥) 놓아 丘陵(구릉)을 내었으니
丘陵(구릉)은 子孫(자손)이요 山岳(산악)은 祖先(조선)이라.
祖上(조상)이 높이 앉아 子孫(자손)을 撫恤(무휼)하는 듯,
江海(강해)의 潤氣(윤기)로서 溪澗水(계간수) 되어 있어
갈래갈래 흘러내려 江海(강해)로 모여드니,
江海(강해)는 祖宗(조종)이요 溪澗(계간)은 諸孫(제손)이라.
諸孫(제손)이 한데 모여 祖宗(조종)께 뵈는 듯,
山水(산수)도 이렇거든 사람인들 다를쏘냐.
뿌리 없는 元體(원체)가 나며, 元體(원체) 없는 枝葉(지엽)이랴.
祖先(조선)의 氣脈(기맥)으로 後孫(후손)이 생겼으니
옛일을 생각하면 同根一體(동근일체) 아닐쏘냐.
代遠(대원)하다고 放心(방심) 말고 祖先墳墓(조선분묘) 찾아가서
雨露東風(우로동풍) 百五節(백오절)과
霜落秋高(상락추고) 重九月(중구월)에
諸子孫(제자손) 한데 모여 瞻掃封瑩(첨소봉영)하여라.
豺獺(시뢰)도 報本(보본)하거든 사람이야 無情(무정)하랴.
古墓荒墳(고묘황분) 되어 있어 白楊不老(백양불로)하게 되면
木根(목근) 미쳐 可盧(가로)하고 牛羊踐踏(우양천답)하느니라.
墳崩堦頹(분붕개퇴)하게 된다면 그 묘에 子孫(자손) 있다 하랴.
한 代(대)를 잃은 후면 다시 알기 어려우니
後孫次次(후손차차) 알게 하여 先代墳墓(선대분묘) 잃지 마라.
2. 해석
천지가 처음 열리면서 음양이 나뉘었다.
하늘의 기운은 아래로 내려오고 땅의 기운은 위로 올라가 온갖 생물이 태어났으니, 하늘과 땅과 사람이 삼재를 이루게 되었다.
천지에는 오행이 있고 사람에게는 오륜이 있듯이, 조상과 자손의 관계에도 분명한 근본이 있다.
높은 산은 기맥을 뻗어 작은 언덕을 만들어 낸다. 작은 언덕이 자손이라면 높은 산은 조상과 같다.
높은 곳에 자리한 조상이 자손들을 어루만지고 돌보는 모습과도 같다.
강과 바다의 습기에서 골짜기의 물이 생겨나고, 그 물은 여러 갈래로 흘러내려 다시 강과 바다로 모인다.
강과 바다가 조상이라면 골짜기와 시냇물은 여러 후손과 같다. 여러 후손이 한데 모여 조상을 찾아뵙는 모습과 같은 것이다.
산과 물의 이치도 이와 같은데, 사람이 어찌 다르겠는가. 뿌리 없이 나무의 본체가 생길 수 없고, 본체 없이 가지와 잎이 생길 수 없다.
후손은 조상의 기맥을 이어 태어난 존재이므로, 근원을 생각해 보면 모두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 한 몸이다.
조상과의 세대가 멀어졌다고 해서 마음을 놓거나 소홀히 하지 말라.
봄의 한식 무렵과 서리가 내리고 하늘이 높아지는 가을 중구절에는 여러 자손이 함께 모여 조상의 묘소를 살피고 깨끗이 쓸며 봉분을 돌보아라.
승냥이나 수달 같은 짐승도 자신의 근본에 보답한다고 하는데, 사람이 어찌 조상에게 무정할 수 있겠는가.
조상의 무덤을 돌보지 않아 오래되고 황폐한 무덤으로 만들면 나무와 잡목이 무성해지고, 나무뿌리가 묘역까지 뻗으며 소와 양이 무덤을 밟고 다니게 된다.
봉분이 무너지고 묘역의 계단까지 허물어진다면, 어찌 그 무덤에 자손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한 세대에서 조상의 묘소와 그 내력을 잃어버리면 다음 세대가 다시 알아내기 어렵다.
그러므로 후손들에게 선대의 묘소를 차례차례 알려 주어, 조상의 무덤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게 하라.
3. 주석
1) 肇判(조판)
처음 열리고 서로 구분됨. 여기서는 천지가 열린 뒤 음과 양이 처음 나뉘었다는 뜻이다.
2) 上陞(상승)
위로 올라감. 원문의 「天氣下降, 地氣上陞」은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오르내리며 만물이 생겨난다는 전통적인 우주관을 나타낸다.
3) 品生(품생)
온갖 사물과 생물이 각각의 종류와 모습에 따라 생겨남.
4) 三才(삼재)
우주를 이루는 세 가지 근본인 하늘〔天〕·땅〔地〕·사람〔人〕을 말한다. 업로드된 대본에서도 삼재를 천·지·인으로 풀이한다.
5) 五行(오행)
세상 만물을 이루고 변화시키는 다섯 가지 요소인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를 말한다.
6) 五倫(오륜)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기본 관계와 도리. 부자유친·군신유의·부부유별·장유유서·붕우유신을 가리킨다.
7) 祖子孫(조자손)
조상에서 자식과 손자로 이어지는 혈연과 계보를 통틀어 나타낸 표현이다.
8) 氣脈(기맥)
산줄기나 땅의 기운이 이어지는 맥. 이 글에서는 조상의 생명과 혈통이 후손에게 이어지는 관계를 비유한다.
9) 撫恤(무휼)
어루만지고 불쌍히 여겨 보살핌. 대본에서는 “진무하고 구휼함”으로 풀이한다.
10) 溪澗水(계간수)·溪澗(계간)
산골짜기나 골짜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여러 물줄기가 강과 바다로 모이는 모습을 후손이 조상에게 모이는 일에 비유했다.
11) 祖宗(조종)
한 집안이나 문중의 선대 조상. 단순히 한 사람의 조상이 아니라 계통을 이룬 여러 선조를 뜻한다.
12) 諸孫(제손)·諸子孫(제자손)
여러 손자와 후손, 곧 한 조상에게서 갈라져 나온 모든 자손을 말한다.
13) 元體(원체)·枝葉(지엽)
원체는 근본이 되는 몸이나 줄기이고, 지엽은 거기에서 뻗어 나온 가지와 잎이다. 조상을 뿌리와 줄기에, 후손을 가지와 잎에 비유한 것이다.
14) 同根一體(동근일체)
같은 뿌리에서 나와 한 몸을 이룬다는 뜻이다.
15) 代遠(대원)
조상과 후손 사이의 세대가 멀어짐. 세대가 멀어졌다는 이유로 조상에 관한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뜻이다.
16) 雨露東風(우로동풍)
비와 이슬이 내리고 동풍이 부는 봄의 기운을 말한다.
17) 百五節(백오절)
동지로부터 105일째가 되는 한식 무렵을 이르는 말이다. 전통적으로 성묘와 묘소 정비를 하던 봄철 시기를 나타낸다.
18) 霜落秋高(상락추고)
서리가 내리고 가을 하늘이 높아진다는 뜻으로, 깊어 가는 가을의 정경을 나타낸다.
19) 重九月(중구월)
여기서는 음력 9월 9일인 중구절 또는 중양절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인다. 양수인 9가 두 번 겹치는 날이어서 중구·중양이라고 한다.
20) 瞻掃封瑩(첨소봉영)
조상의 묘소를 찾아 우러러보고, 묘역을 쓸고 봉분을 돌보는 일. 대본에서는 “조상님의 분묘를 우러러보고 쓸어냄”으로 풀이한다.
21) 豺獺(시뢰)
승냥이와 수달 같은 짐승. 옛사람들은 이 짐승들도 잡은 먹이를 늘어놓는 행동을 통해 근본에 보답한다고 여겼다. 대본의 기본 풀이는 “승냥이와 수달 같은 짐승”이다.
22) 報本(보본)
자신의 근본을 잊지 않고 그 은혜에 보답함. 이 글에서는 후손이 조상을 기억하고 제사와 성묘를 정성껏 행하는 일을 뜻한다.
23) 古墓荒墳(고묘황분)
돌보는 사람이 없어 쓸쓸하고 황폐하게 버려진 옛 무덤.
24) 白楊不老(백양불로)
업로드된 대본의 표기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문맥상 묘소를 방치하여 백양나무나 잡목이 오래도록 무성해진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했으나, 정확한 글자와 뜻은 원필사본과의 대조가 필요하다.
25) 木根(목근) 미쳐 可盧(가로)하고
이 부분 역시 대본의 한자 표기가 분명하지 않다. 앞뒤 문맥을 고려하면 나무뿌리가 묘역과 봉분까지 뻗어 무덤을 훼손하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다.
26) 牛羊踐踏(우양천답)
소와 양이 무덤을 밟고 지나다님. 묘소가 방치되어 가축까지 드나드는 상태를 나타낸다.
27) 墳崩堦頹(분붕개퇴)
봉분이 무너지고 묘역의 계단이나 섬돌이 내려앉는 것. 묘소 관리가 소홀하여 무덤이 황폐해진 상태를 뜻한다.
28) 後孫次次(후손차차)
후손들에게 세대가 이어지는 차례에 따라 계속 전한다는 뜻이다.
4. 작품의 핵심 뜻
〈조손〉은 조상과 후손의 관계를 산과 언덕, 강과 시냇물, 나무의 뿌리와 가지에 비유한다. 후손은 조상과 따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같은 뿌리와 생명의 맥을 이어받은 한 몸이므로, 세대가 멀어져도 조상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조상의 묘소를 후손들에게 정확히 알려 주고, 정해진 때에 함께 성묘하며 묘역을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상을 기억하는 일은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자신의 근본과 가족 공동체의 연속성을 지키는 일이라는 가르침이다.
출저: 한국의 지식콘텐츠-역사, 예술, 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