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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慶尙道) 양산군(梁山郡)
樂民 장달수
경상도(慶尙道) 양산군(梁山郡)
동쪽으로 기장현(機張縣) 경계까지 23리이고, 동래현(東萊縣) 경계까지 17리이다. 남쪽으로 같은 현 경계까지 46리요, 서쪽으로 밀양부(密陽府) 경계까지 50리요, 김해부(金海府) 경계까지 18리요, 북쪽으로 언양현(彦陽縣) 경계까지 41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9백 16리이다.
【건치연혁】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상주(上州)와 하주(下州) 땅을 베어서 삽량주(歃良州)를 두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양주(良州)로 고쳤고, 고려 태조가 양주(梁州)로 고쳤으며, 현종(顯宗)이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뒤에 원 나라 중서성(中書省)에서 본국의 관청은 번거롭고 백성에게는 폐가 된다고 하므로 밀성(密城)에 합쳤다가 충렬왕(忠烈王)이 전대로 회복했고, 본조 태종조(太宗朝)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군(郡)으로 삼았다.
【관원】 군수ㆍ훈도 각 1인.
【군명】 삽량주(歃良州)ㆍ양주(良州)ㆍ양주(梁州)ㆍ의춘(宜春)ㆍ순정(順正).
【성씨】 본군 한(韓)ㆍ김(金)ㆍ이(李)ㆍ박(朴)ㆍ정(鄭)ㆍ방(房)ㆍ조(曹), 진(陳) 투화(投化)한 성이다. 이(李) 동평(東平).
【풍속】 집집마다 남녀의 구별이 없이 대나무로 도구를 만든다 최해(崔瀣)의 안량주(安梁州)를 보내는 서(序)에 이르기를, “양산(梁山) 고을은 우리 계림(鷄林) 고리(故里)에서 1백여 리나 떨어져 있다. 금년 여름에 내 상복을 벗고 고향에서 돌아오는데, 마침 죽옥상공(竹屋相公)이 진(鎭)에 나와 포구를 합친다 하기로, 공을 뵙기 위하여 갔었다. 이에 길이 헌양(巘陽)을 지나게 되어 양산에서 자려 했더니, 때마침 몹시 무덥고 또 비가 와서 그 곳 사람들이 말하기를, ‘만일 하루 저녁만 비가 더 오면 냇물이 넘어서 며칠동안 건너지 못할 것이다.’ 한다. 내 생각건대 관청에 돌아갈 날짜가 장차 차있으니 걸음을 천천히 할 수 없다하여, 이에 부득이 양산에 들어가 자지 못하고 바로 냇물을 건너 서쪽으로 갔었다. 관사(官舍)를 바라다보니 백성들의 집이 대나무 숲 사이에 가물가물 보이는데, 사람들이 이곳을 가리켜 양산 고을이라고 한다. 이로 인하여 그 풍속의 한두 가지를 알겠도다. 이 지방은 땅이 좁고 백성들은 경박하며, 전답은 모두 낮고 습해서 가물면 곡식이 익고, 비가 오면 물이 해로워 그 풍흉이 딴 고을과는 판이하다. 대개 가뭄은 해마다 있는 것이 아니니, 하늘이 어찌 오직 양산 백성들만 위해서 항상 비가 오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유로 풍년드는 해는 적고 흉년만 계속되는 것은 그 지형 때문인 것이다. 집마다 남녀의 구별이 없이 대나무를 가지고 그릇을 만들어 다른 물건을 바꾸고, 의식(衣食)과 세금 내는 것을 오직 대나무만 바라다 보고 있을 뿐이며, 또 큰 장사꾼이나 부자로 이것을 취급하는 자는 없다. 심지어 사신의 왕래에 그들을 대접하는 것까지 초초해서 차마 견디고 응할 수가 없으니, 이는 곧 대나무 숲 속에 숨어서 마치 놀란 사슴과도 같기 때문이다. 동남쪽 여러 고을 중에 이 고을이 가장 가난해서 본래 다스리기 어렵다고 했더니, 이원윤(李元尹)이 이곳으로 귀양오자 공은 그 폐단을 알고 먼저 상전(上田)을 보고 그 도랑을 깊게 판 다음, 사람으로 하여금 거친 밭 몇 두둑을 농사짓게 하여 힘을 써서 갚도록 하였다. 또 옛 풍속은 농사에 익숙하지 못하여 모두 아침에 늦게 나가고 저녁에는 일찍 파하는데, 이것을 보고 그 땅 품질에 따라서 사람들로 하여금 부지런히 일하게 하고, 매양 사람 열 명이 보(保)를 만들고 보마다 대쪽 하나씩을 만들어 맨 먼저 온 사람이 이것을 가졌다가, 그 다음에 오는 사람에게 차례로 서로 전하면, 맨 나중에 오는 사람은 이것을 전할 곳이 없으므로 이것을 가진 채 일하게 된다. 일이 끝나면 이 대쪽을 가진 자는 맨 뒤에 왔다는 죄로 벌했다. 그때에야 해가 떠오르는데, 전부터 공은 이미 밭에 나가 있으니 이렇게 하기를 10일 동안을 하자 사람들은 다투어 가며 먼저 밭으로 나가서, 양산의 거친 밭은 모두 잘 이루었으나 이것을 쓸 곳이 없었다. 반년이 못되어 공이 부름을 받아 돌아오니, 이때에는 공의 은혜가 그다지 심히 나타난 것 같지 않아서 사람들은 옛 습관을 편하게 여겨 옛날에 갈던 밭에 금시에 씨도 뿌리지 않고, 씨를 뿌린다 해도 또한 김매주지 않았다. 내가 양산을 다녀온 것과 이공(李公)이 그곳을 떠난 지가 겨우 한달 남짓한데, 나는 여기에서 인인군자(仁人君子)가 조그만 벼슬을 낮게 여기지 않고 자기 몸이 백성의 일을 먼저 하는 것을 보았으니, 이로써 양산 백성들의 가난한 것은 비단 이곳 백성들의 잘못뿐이 아니라, 정치하는 자의 부지런하고 게으른 데에 있다는 것을 알겠다. 이제 죽옥(竹屋)에 사는 사람이 양산의 명을 받았기로 인하여 내가 양산에서 들은 것을 기록하여 주면서 또 권하기를, ‘내 다만 이공의 정치한 것을 들어 말했으니, 양산이 적다고 여기지 않는다면 양산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한다고 무엇을 근심할 것이며, 양산 백성의 가난한 것을 부자로 만들지 못하랴. 만일 부자가 된 뒤에 가르치는 방법에 있어서는 그대로 학문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니 어찌 내 말을 기다리겠는가.’ 소년 시절에 글을 읽은 효력이 나타나는 것을 내 양산 백성들이 그대에게 교화(敎化)된 것에서 보겠도다.” 하였다.
【산천】 성황산(城隍山) 고을 동북쪽 5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취서산(鷲棲山) 고을 북쪽 30리에 있다. 또 언양현(彦陽縣) 조에 있다. 원적산(圓寂山) 고을 북쪽 20리에 있으며, 혹은 천성산(千聖山)이라고도 하고, 또는 소금강산(小金剛山)이라고도 한다. 칠점산(七點山) 고을 남쪽 44리 되는 곳 바닷가에 있다. 일곱 봉우리의 산이 점과 같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은 것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가락국(駕洛國) 때 참시선인(旵始仙人)이 놀던 곳이라 한다. ○ 안축(安軸)의 시에, “바닷물 천 리에 물이 하늘에 떠 있으니, 일곱 점 푸른 봉우리 안개 속에 아득하네. 이곳이 바로 금선(琴仙)이 살던 곳, 배타고 가는 길 총총히 하지 말게.” 하였다. 금정산(金井山)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자세한 것은 동래현(東萊縣) 조에 있다. 이천산(梨川山)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증산(甑山) 고을 서남쪽 12리 되는 큰 들 가운데 있다. 바다 칠점산 밖 2리에 있다. 내포(內浦) 고을 서쪽 40리에 있다. 계원연(鷄原淵) 쌍벽루(雙碧樓) 아래에 있는데, 물이 두 근원이 있으니, 하나는 원적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범곡부곡(凡谷部曲)에서 나오는데, 이곳에서 합쳐서 호포로 흘러 들어간다. 서쪽 언덕에 죽오(竹塢)가 있다. 호포(狐浦)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물이 두 근원이 있으니 하나는 원적산에서 나왔고 하나는 취서산에서 나왔는데, 이것이 합해서 황산강으로 들어 갔으며 건너는 배가 있었다.
황산강(黃山江) 고을 서쪽 18리에 있다. 신라에서 사대독(四大瀆)의 하나로 쳤고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고려에서는 무안(務安)의 용진강(龍津江)과 광양(光陽)의 섬진강(蟾津江)과 이 강을 배반하여 흐르는 삼대수(三大水)라고 일컬었다. ○ 정포(鄭誧)의 노래에, “지나는 비 부슬부슬 강 나무 적시고, 얇은 구름 조각 조각 맑은 빛을 가렸네. 황산강 깊은 물 건널 수 없어, 돌아다보니 백 리 먼 곳 구름만 아득하네. 강 머리에 있는 계집애 아름답기도 해라. 강에 임해 건너려 하여 이리저리 방황하네. 우는 비둘기 젖 먹는 제비 봄 해는 저물고, 떨어지는 꽃 나는 버들가지 봄바람 향기로워. 배 부리는 사람 불렀는데 어디서 오는가. 돛대 달고 저 아래 어산장(魚山莊)으로 향하네. 물어보니 나하고 같이 가는 길 배 중앙에 그와 함께 앉았네. 나부(羅敷)가 스스로 지아비 있는 걸 알겠는데, 괴상할손 웃음의 말 왜 그리 경망한가. 막연히 황금 주는 것 돌아다보지 않으니, 강 언덕에 쌍으로 노는 원앙새 바라보네. 그대가 배를 대나 내 어찌 머무르리, 내 친구 정히 황모강(黃茅岡)을 기다리도다.” 하였다. ○ 이곡(李穀)의 시에, “생각건대 옛날 배타고 황산강 동쪽을 지날 적에, 북풍은 해에 불어 차갑고 빛이 없더니, 황산강 서쪽으로 3십 리를 바라보면, 고기잡이 배 출몰하는 곳 강물은 멀고 멀어라. 내 불시에 떠나 또한 급히 가노라니, 눈앞에 좋은 경치 다하여 부질없이 방황하네. 듣건대 그대 원으로 나가 바다를 향했다하니, 상상하건대 화극(畫戟)에 맑은 향기 어렸으리. 손을 보내노라 자주 강 길을 지났고, 중을 찾아 여러 번 빈 산 속 집에 이르렀으리. 황산강 놀이 가장 즐거우니, 붉게 단장한 그림 배 강 중앙에 떠 있구나. 사군(使君)이여, 황산가(黃山歌) 한 곡조 부르라, 사군의 호기 맑고 미친 듯하리. 인생의 모이고 흩어지는 것 애락(哀樂)을 다할지라, 연꽃 밑에 원앙새만 시름 짓노라. 어찌 거듭 사군의 곡조 부르리. 단판(檀板)으로 황산 언덕을 쳐부수리라.” 하였다.
가야진(伽倻津) 혹은 옥지연(玉池淵)이라고도 하며, 고을 서쪽 40리 황산강 상류에 있다. 우리 세종조(世宗朝) 때 황룡(黃龍)이 물속에 나타났으며, 가물 때 비를 빌면 문득 효험이 있었다. 동원진(東院津) 고을 남쪽 25리, 황산강 하류에 있다. 구읍포(仇邑浦) 고을 서쪽 3리에 있으니, 근원은 취서산에서 나왔으며, 호포와 합해서 황산강으로 들어간다. 대저도(大渚島) 고을 남쪽 40리, 바다 어구에 있으며, 좋은 밭이 백 이랑은 됨직하다. 화자포(火者浦) 고을 서쪽 20리에 있다. 영천(靈川) 고을 동쪽 22리에 있으며, 남으로 흘러서 동래현(東萊縣) 해운포(海雲浦)로 들어간다.『신증』 사두도(蛇頭島) 곧 칠점산 남쪽 가지에 있으며, 밭 5백여 두둑이 있고, 사는 백성들이 또한 많다. 소요저도(所要渚島) 대저도 동쪽에 있으며, 밭 수백여 두둑이 있는데, 땅이 몹시 기름지다. 축포(杻浦) 고을 남쪽 35리에 있으며, 백성 5백여 호가 산다. 동두저(東頭渚) 고을 남쪽 35리 축포 상류에 있다. 북천(北川) 고을 북쪽 10리에 있으며, 물이 넘치면 바로 읍성으로 대들기 때문에 뚝을 쌓아서 막았다.
【토산】 철(鐵) 화자포(火者浦)에서 난다. 죽전(竹箭) 고성산에서 난다. 송이ㆍ은어[銀口魚]ㆍ표고[香蕈]ㆍ황어(黃魚)ㆍ천문동(天門冬). 『신증』 차(茶)ㆍ웅어[葦魚]ㆍ수어(秀魚).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천 7백 10척이요, 높이가 13척이며, 성 안에 우물 6개와 못 1개가 있다. 성황산성(城隍山城)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4천 3백 68척이요, 높이가 6척이며, 성 안에 우물 6개와 못 2개가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봉수】 원적산 봉수(圓寂山烽燧) 남쪽으로는 동래현(東萊縣) 계명산(鷄鳴山)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언양현(彦陽縣) 부로산(夫老山)에 응한다.
【누정】 쌍벽루(雙碧樓) 징심헌(澄心軒) 남쪽에 있으며, 누 아래에 물과 대나무가 서로 비치므로 인하여 이름 지었다. 김시용(金時用)의 기문에 이르기를, “양산(梁山) 고을에 시내가 있으니, 지금의 안동 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이공(李公)이 일찍이 지군(知郡)으로 있을 때에 그 위에 누를 세우고 이름하여 벽계(碧磎)라 하였다. 홍무(洪武) 신유년 봄에 왜적이 양산에 침입하여 불을 놓으니, 양산 백성들이 그 땅을 잃고 속현(屬縣) 동평(東平)에 성을 세우고 옮겨가서 사는데, 항상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 돌아가서 정착하기를 바라고 모여든 지 여러 해가 되었었다. 임신년 10월에 현풍감무(玄風監務) 전후 평원(田侯平遠)이 어진 관리로서 양산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처음에 현풍은 밀양(密陽)에 예속되어서 조정의 명령을 받는 데나 일을 시키는 데 지장이 있어 폐단이 날로 심했었다. 이에 국가에서 전후(田侯)를 천거해서 그 일을 맡아 보게 하니, 떠돌던 백성들이 돌아오고 모든 일이 잘 처리되었다. 대개 이 누는 백성들이 떠돌아다니다가 지은 것이나, 자못 딴 고을 것보다 나았고, 한 고을이 다스려지자 모두 그 사는 것을 즐거워하였다. 조정에서 그를 어질게 여겼기 때문에 이 명령이 있었던 것이니, 대개 그가 현풍을 다스리듯이 양산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전후가 부임하자 양산 사람들이 서로 이르기를, ‘우리 고을이 장차 흥하리로다. 양산이 비록 제 땅을 잃었으나 예로부터 다스리기 쉽다 하였는데, 더욱이 우리 전후가 다스리면 어찌 현풍과 같기만 하랴.’ 하였다. 이 때에 밤이면 생각하고 일찍부터 일해서 떠돌던 백성들을 불러모아서 너그럽게 거느리니 백성들이 사랑을 알고, 예의로 가르치니 백성들이 부끄러움을 알고, 의로 부리니 백성들이 그 일을 즐겁게 여겼다. 전후가 이에 옛 모습을 회복 할 뜻이 있어서 부로(父老)들과 의논하고, 이 누를 새롭게 하기로 했다. 그 옛터를 살펴보아 조금 북쪽으로 옮겨서 더욱 높게 하는데, 일을 제 때 시키고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며, 오직 노는 사람들을 부려서 이 역사를 시켰다. 공사가 끝나자 조정 사신 김인보(金仁甫)가 오는데 그 접반사 추부(樞府) 조인옥(趙仁沃)공이 이 누에 올라가 보고서 감탄하기를, ‘잘했다. 전후의 이 역사를 함이여, 이것이 옛 양산을 흥복(興復)시킬 조짐이로다.’ 하였다. 또 누 아래에 시내가 있고 시내 위에 대나무가 있어서 또한 족히 전후의 맑고 곧은 것을 말해주니, 이에 누의 이름을 쌍벽(雙碧)이라고 고치고, 날더러 기문을 쓰라 하기에 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맡았노니, 《춘추》에서 흥작(興作)하는 것마다 반드시 쓰는 것은 허여하지 않음이요, 시인(詩人)이 영대(靈臺)의 역사를 노래로 읊는 것을 즐겨함이다. 그 백성을 부린 것은 한가지인데 《춘추》에는 허여하지 않았고, 시인은 즐겨했으니, 이는 그 일의 옳고 옳지 않은 것으로 따진 것이다. 이제 전후의 성사한 것은 진실로 잘해서 이 처사에도 기폐(起廢)의 의리가 있었으니, 이는 또한 즐겨한 것이다. 훗날에 과연 능히 옛 모습을 회복시켜서 양산 사람들이 바라던 것에 대답하게 된다면 조공(趙公)의 말이 맞는 것이로다. 또 하물며 전후의 절개가 딴 사람과 다른 데가 있어서 오직 물과 같이 맑고, 오직 대나무와 같이 곧으니, 그 누를 이름지은 뜻이 어찌 유독 물과 대나무에만 있으랴. 아, 물도 말하고 대나무까지 말해 그 절개의 온전함을 말해 주는 것이니, 이 뒤에 절개를 다듬는 자는 반드시 이 누에서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누의 웅장하고 높은 것과 그 좋은 경치에 대해서는 여기 올라가 한 번 보게되면 모두 취할 것이니, 여기에서는 족히 의논할 것이 못된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해질녘 말을 몰아 양산에 도달하니 좋은 경치 만나 올라보니 흥이 새로워라. 천 겹이나 쌓인 어지러운 병풍 산이 첩첩하고, 한 덩어리 맑은 거울 물은 반짝이네. 물가에 닿은 버들 빛 처음 푸르렀고, 언덕을 낀 복숭아꽃은 아직도 덜 붉었네. 고륙(顧陸)의 단청하는 솜씨로도 형용하기 어려운 곳에, 갸륵한 그대 붓이 홀로 전함을 놀랍게 여기네.” 하였다. ○ 명 나라 사람 장청(張淸)의 시에, “멀리 들으니 쌍벽루 큰 언덕 가에, 기다란 대나무 숲을 이룬 곳에 칠현(七賢)이 있다하네. 난간에 의지해 시를 읊으니 매우 흥취를 얻었고, 누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허공을 타고 신선이 되고 싶네. 산은 푸른 바다에 닿았는데 세 섬이 오고, 물은 은하에 닿았는데 구천(九天)에서 떨어지네. 오늘날 그대와 함께 감개를 같이하니, 홀로 우리들이 귀전원(歸田園) 짓는게 부끄럽네.” 하였다. ○ 이행(李行)의 시에, “시냇물은 중간이 넓고, 대나무는 사면에 우거졌는데, 벽 사이에 주옥같은 글 모두 시현(詩賢)들일세. 10년 동안 떠도는 몸 도리어 세속에 부끄러워, 한나절 여기 오르니 다시 신선 같음을 깨닫겠네. 멀고 가까운 봉우리 지리가 웅장하고, 동남쪽 논밭은 백성 살기 넉넉하네. 성은이 이렇듯이 적은 몸 돌보시니, 집에 있는 책 내다 팔아서 밭이나 살까나.” 하였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물결 소리 대 그림자 굽은 난간 가에, 한잔 술로 여기 놀아 성현을 즐기네. 경치를 구경하니 지난 일 마음 상함을 견딜 수 없고, 여기 오르니 다시 나는 신선 부르고 싶네. 강산은 나에게 처음 손님이 아닌 것으로 하고, 헌면(軒冕)에는 무심한 늙은 하늘이 있네. 지난 밤 달 밝은데 기둥에 의지해 있노라니, 떠들석한 철적(鐵笛) 소리 요전(瑤田)을 지나가네.” 하였다. ○ 강혼(姜渾)의 시에, “돛대 달고 어제 황산강을 지나노라니, 멀리 바라보니 높다란 누각 붉고 푸른 사이에 있네. 저녁 무렵 여기 올라 절경을 보니, 한강 연기와 비 언덕에 어두워라.” 하였다. ○ “고기 잡는 사람 아침에 백빈주(白蘋洲)로 들어가니, 물결은 싸늘한데 붉은 고기 게으르게 잡히네. 고기가 적고 많은 건 그가 상관할 바 아니라, 자미(紫薇)꽃 밑에 조각배 대고 있네.” 하였다.
징심헌(澄心軒) 객관 서쪽에 있다. ○ 김구경(金久冏)의 시에, “마루와 대들보 널찍하게 맑은 물 내려다 보고 있으니, 만 줄기 대나무 바람에 읊는 유월일네. 천 리의 경치를 내려다 보는 것 견디기 어려워, 여기 머물면서 백년 근심을 씻고자 하네.” 하였다. ○ 강희안(姜希顔)의 시에, “창 밖 대나무 무늬 함께 흘러가려는데, 밤늦게 한가로이 누었으니 문득 가을인가 의심나네. 이미 강물이 저렇게 맑은 것을 보았으니, 인간의 무한한 근심 씻을 만하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푸르고 푸르게 영롱한 만 가지 대숲에, 구름속에 있는 한 채 집 다시 맑은 물 위에 임했네. 바람이 가는 물결 불어오니 옥같이 흰 물고기 뛰고, 달이 성긴 발에 비쳐오니 금빛인 양 어른거려라. 신선의 무리 불러서 학을 타고 가려하고, 이미 아름다운 글귀를 가지고 용 읊는 소리 움직이려 하네. 난간에 의지해 생각하는 것 아무도 알지 못하니, 부질없는 떠나는 근심 밤만 깊어가네.” 하였다. 『신증』 김수동(金壽童)의 시에, “바람이 대에서 나니 푸른 문채 흘러, 대나무 그림자와 물결 빛 잠박에 가득한 가을일세. 물가에 있는 새를 달밤에 울지 말게 하라. 누 속에 자는 손님 나그네 시름 움직이네.” 하였다.
【학교】 향교 고을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황산역(黃山驛) 황산강 기슭에 있다. ○ 역승(驛丞)을 두었으며, 본도의 속역(屬驛)이 11이니, 잉포(仍浦)ㆍ노곡(奴谷)ㆍ윤산(輪山)ㆍ위천(渭川)ㆍ덕천(德泉)ㆍ굴화(堀火)ㆍ간곡(肝谷)ㆍ아월(阿月)ㆍ소산(蘇山)ㆍ휴산(休山)ㆍ신명(新明)이다. ○ 승(丞)은 1인. 『신증』 왕덕(王德) 경오년에 승을 없애고 찰방(察訪)을 두었다. 위천역(渭川驛) 고을 북쪽 20리에 있는데, 옛날에는 면천(丏川)이라고 일컬었다. 윤산역(輪山驛) 고을 서쪽 5리에 있다. 북정원(北亭院) 고을 북쪽 5리에 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안정원(安井院) 고을 동쪽 12리에 있다. 동원(東院) 고을 남쪽 22리에 있다. 범어원(凡魚院) 고을 서쪽 7리에 있다. 내포원(內浦院) 내포 북쪽 언덕에 있다. 성천원(省川院) 고을 북쪽 35리에 있다. 호포원(狐浦院) 호포 동쪽 언덕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교량】 계원교(鷄原橋) 계원연(鷄原淵) 밑에 있다. 구읍포교(仇邑浦橋) 구읍포에 있다. 화자교(火者橋) 화자포(火者浦)에 있다.
【불우】 통도사(通度寺) 취서산(鷲棲山)에 있다. 이색(李穡)의 기문이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날 개어 천 떨기 산을 열었는데, 한 줄기 물이 흘러내리네. 놀란 물결 어지러이 얼굴에 튀니, 6월에도 가을 뜻 생기네. 한 발 숲 밖의 누각은, 붉은 난간이 푸른 산에 비쳐있네. 그림 그린 대들보엔 제비가 말을 하고, 진귀한 나무 가지엔 꾀꼬리가 졸고 있네. 어지러운 돌 높다랗게 하늘에 의지했고, 거치른 이끼는 어지러이 땅에 깔려 있네. 높다란 율단(律壇)의 백(伯)이요, 물에 씻겨 조그만 때도 없네. 그윽이 사노라니 푸른 것 밟지 않고, 글 삼천 구절만 내리 외우네. 맑은 절경을 그릇 나누어, 방탕하게 노는 이 사람의 마음 위로하네. 노는 사람의 행적 가벼우니, 문 밖에 나면 만 리를 움직이네. 기이한 것을 탐하여 여기 머무르니, 그래도 백이나 만 중에서 하나둘밖에 보지 못하네. 그 중에서 두 번 다시 오는 곳도 있으니, 숲과 구렁이 더욱 아름다운 곳일세. 옛날에 박후(朴侯)의 손자와 더불어, 여기 올라 몹시 취했었네. 지금 와서 그 때 놀던 것 생각하면, 황홀해서 마치 꿈속과 같네. 시험삼아 왕파(王播)의 글귀를 찾아보니, 사롱(紗籠)이 이미 물에 빠져 없어졌네. 바람에 임해 긴 휘파람부니, 옛일 생각하는 눈물 한없이 흐르네.” 하였다. ○ “동굴 속 감옥(紺屋) 가장 깊은데, 연하(煙霞) 속에 파묻혀 쉽게 찾기 어려워라. 숲 아래 갑자기 지둔(支遁)의 학을 보겠고, 꿈속에는 먼저 중수(仲殊)의 거문고를 매만지네. 지경이 맑으니 붉은 티끌 씻은 것을 알겠고, 못이 고요하니 흰 달이 떠 있는 것 매우 예뻐라. 깨끗한 물 한 병 등 한 자루로, 무심한 어느 곳에 다시 마음 달래리.” 하였다.『신증』 불지사(佛池寺) 원적산(圓寂山)에 있다. 절 북쪽 바위 언덕 아래에서 샘이 솟아 나오는데 빛이 금과 같다.
【사묘】 사직단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세상에서 전하기를, “김인훈(金忍訓)이 고려 태조(太祖)를 도와서 벼슬이 문하좌시중에 이르렀는데, 그가 죽어서 사신(祠神)이 되었다.” 한다. 가야진사(伽倻津祠) 사전(祀典)에 공주(公州)ㆍ웅진(熊津)과 함께 남독(南瀆)을 삼았다고 중사(中祀)에 실려있다. 해마다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지낸다 하였다. 적석룡당(赤石龍堂) 고을 남쪽 22리에 있다. 고려에서는 가야진연소(伽倻津衍所)라고 일컫고 본읍에서 제사를 지냈다. 여단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임경대(臨鏡臺) 혹은 최공대(崔公臺)라고도 하는데, 황산역(黃山驛) 서쪽 절벽 위에 있으며, 최치원(崔致遠)이 놀고 즐기던 곳이다. 치원의 시에, “연기 낀 봉우리 빽빽하고 물은 넓고 넓은데, 물속에 비친 인가 푸른 봉우리에 마주 섰네. 어느 곳 외로운 돛대 바람 싣고 가노니, 아득히 나는 저 새 날아간 자취없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맑은 강물 거울 같아 푸르고 또 넓은데, 아득한 물 외로운 마을 어지러운 봉우리를 등졌네. 고기잡이 노래 한마디 조각배 하나, 푸른 버들 깊은 곳에 사람의 자취 없네.” 하였다. 와곡부곡(瓦谷部曲) 고을 북쪽 6리에 있다. 범어부곡(凡魚部曲) 고을 서쪽 6리에 있다. 원포부곡(源浦部曲)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옛날에는 원포역(源浦驛)이 있었다. 어곡소(於谷所) 고을 서쪽 5리에 있으며, 조그만 성이 있다. 속칭 수질옥(水蛭獄)이라 하였는데, 옛날에 소(所)가 되었을 때 죄인을 가두던 곳이다. 범곡부곡(凡谷部曲) 고을 북쪽 10리에 있으며, 지금은 석곡촌(石谷村)이 되었다. 고산성(古山城) 고을 동쪽 3리에 있으며, 돌로 쌓았다. 고장성(古長城) 황산강(黃山江) 동북쪽 언덕에 있으며, 돌과 흙을 섞어서 쌓았다.
【명환】 신라 박제상(朴堤上) 눌지왕(訥祗王) 때에 벼슬해서 삽량주간(歃良州干)이 되었다. 자세한 것은 경주 인물(慶州人物) 편에 있다. 김서현(金舒玄) 양주 총관(良州摠管)이었다. 김암(金巖) 양주 태수(良州太守)이었다.고려 조통(趙通) 자는 역락(亦樂)이다.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에 이르기를, “역락이 양주 원으로 부임하니, 종과 그의 아들 진(眞)이 새벽부터 천수사(天壽寺) 문에 와서 기다렸으나, 역락은 친구에게 끌려서 점심때가 되어도 오지 않았다…….” 하였다. 자세한 것은 옥과 인물(玉果人物)에 있다. 윤언순(尹彦順) 방어사(防禦使)이었다.본조 전평원(田平遠) 〈쌍벽루기(雙碧樓記)〉에 상세하다.
【인물】 고려 김맹(金猛)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번 벼슬이 옮겨 좌습유(左拾遺)에 옮기었고, 현종(顯宗) 초년에 뽑아서 근시(近侍)에 두고 그로 하여금 극권(劇權)을 맡도록 했으며 벼슬이 참지정사에 이르렀다.본조 이징석(李澄石) 두 번 무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세조조(世祖朝)에 좌익공신(佐翼功臣)이 되었고, 양산군(梁山郡)에 봉했다. 시호는 장강(莊剛)이다.
【효자】 고려 박창(朴暢) 부모상을 당하여 깊은 골짜기에 여막을 짓고 밤낮으로 애통해하였다. 왜적 3명이 칼을 가지고 와서 우는 연고를 물으니, 창(暢)이 사실대로 대답하자, 왜적도 감동하여 해치지 않아서 드디어 3년을 마치었다. 정문을 세우고 비석을 세웠다. 이공미(李公美) 어머니의 무덤을 3년 동안 지켰으므로 호세를 면제하였다. 정승우(鄭承雨) 일찍이 왜적에게 잡혀서 비전주(肥前州)에 팔려 갔다. 포로로 가 있을 때 어머니 나이가 72세였는데, 매양 어머니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몰라서 식사 때마다 고기를 먹지 않았다. 왜인이 이것을 보고 그 의리에 감동하여 배를 마련하고 양식을 실어 돌려보내니, 이로써 모자가 서로 만났다. 양산(梁山)은 왜적이 들어올 요충이 된다 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영산현(靈山縣)으로 피해가서 살았다. 어머니가 죽자 취산(鷲山) 남쪽에 장사 지내고 제사지내면서 울기를 더욱 정성껏 하여 3년을 마치었다.
【제영】 만루추월위수명(滿樓秋月爲誰明) 정포(鄭誧)의 시에, “강바람 빗속에서 불다가 늦게서야 개니, 강 기러기 떼를 떠나 밤중에 우네. 슬프다, 거문고를 안은 사람 보이지 않으니, 누에 가득한 가을 달은 누굴 위해 밝은가.” 하였다. 북래산단해연천(北來山斷海連天) 김조(金銚)의 시에, “서쪽으로 가면 길이 멀어 구름이 변방에 닿았고, 북쪽으로 오면 산이 끊어져 바다가 하늘에 닿았네.” 하였다. 일촌화류춘기동(一村花柳春機動) 이선(李宣)의 시에, “한 마을의 꽃과 버들 봄소식 움직이고, 일만 두둑의 뽕나무와 삼은 개인 빛 새로워라.” 하였다. 치수능방어(置戍能防禦) 권근(權近)의 시에, “수자리 두어 능히 방어하고, 성을 둘렀고 또 못을 팠네. 사람과 연기 모두 예전대로 회복되었으니, 누에 치는 아낙네 뽕 따서 돌아오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선조조(宣祖朝) 임진왜란 뒤에 동래부에 합하였다. 36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방면】 읍내(邑內) 끝은 5리이다. 상동(上東) 처음은 5리, 끝은 30리이다. 하동(下東) 동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40리이다. 상북(上北) 서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하북(下北) 처음은 20리, 끝은 40리이다. 상서(上西) 처음은 10리, 끝은 40리이다. 하서(下西) 처음은 20리, 끝은 60리이다. 대상동(大上洞)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대하동(大下洞) 남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60리이다. 위의 두 면(面)은 대저도(大渚島)에 있다. 좌이전(左耳田) 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50리이다. ○ 범곡부곡(凡谷部曲)은 북쪽으로 10리, 와곡(瓦谷) 부곡은 북쪽으로 6리, 범어(凡魚) 부곡은 서쪽으로 6리에 있다. 곡에서 5리 되는 곳에 작은 성이 있으니, 속칭 수질옥(水蛭獄)이다. 고성(古城) 동쪽으로 3리에 있고, 돌로 쌓았으며, 터가 있다. 고장성(古長城) 황산(黃山) 북쪽 언덕 위에 있으며, 흙과 돌을 섞어 쌓았다. 구법곡성(仇法谷城)ㆍ호포성(狐浦城) 위의 두 곳은 일본인이 쌓은 것이다. ○ 신라 문무왕(文武王) 13년에 묘량주(畝良州) 골쟁현성(骨爭峴城)을 쌓았다. 신문왕(神文王) 7년에 묘량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1천 2백 60보이다.
【진도】 가야진(伽倻津) 일명 옥지주(玉池洲)라고도 한다. 서쪽으로 40리이며 황산강(黃山江) 상류이다. 동원진(東院津) 남쪽으로 25리, 황산강 하류이다. 위의 두 곳은 김해(金海)로 통한다.
【누정】 춘설루(春雪樓).
【사원】 송담서원(松潭書院) 숙종 병자년에 세웠고, 정유년에 사액하였다. 백수회(白受繪) 자(字)는 여빈(汝彬)이며 부여인(扶餘人)이다. 벼슬은 자여찰방(自如察訪)이고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선조 임진년에 9년 동안 일본에 잡혀 구류되었다가 절개를 지켜 돌아왔다.
梁山郡
東至機張縣界二十三里,至東萊縣界十七里。南至同縣界四十六里。西
至密陽府界五十里,至金海府界十八里。北至彦陽縣界四十一里。距京都九百十六里。
建置沿革
新羅文武王割上州、下州之地,置歃良州,景德王改良州。高麗太祖改梁州,顯宗置防禦使。後元中書省以本國官繁民弊爲言,故倂于密城,忠烈王復舊。本朝太宗朝,改今名爲郡。
官員 郡守,訓導。各一人。
郡名
歃良州,良州,梁州,宜春,順正。
姓氏
本郡 韓,金,李,朴,鄭,房,曺。陳。投化。李。東平。
風俗
家無男女治竹爲用具。崔瀣《送安梁州序》:“梁之州距予鷄林故里百有餘里。今年夏,予旣除服,自故里迴,適竹屋相公出鎭合浦,爲謁公往。於是道過巘陽,欲宿梁,時方盛暑,天且雨,路人言:‘若雨一夕,梁河漲,數日不可濟。’ 予念告限將滿,行李不可緩,不果入梁宿,直過河而西。望見官舍、民居隱見於竹林叢薄之間,人指爲州,因訪風俗得其一二者焉。厥地狹,厥民輕以肆,厥田皆下濕,歲旱則禾熟,雨則水爲害,其豐儉與他州異。大抵旱不年有,而天豈爲一梁之民恒不雨哉?是故豐年獨少而凶年相仍,地勢然也。家無男女治竹爲用具,貿易他物,衣食租賦惟竹是仰,而又無
鉅商、富民賴以取給者。其於使華之往來,館待亦草草,事有不堪支應者,卽皆竄匿竹林中,若驚麇駭鹿然。東南諸州,此州最貧,素稱難治。及李元尹之貶于此也,公知其弊,先相上田,深其溝洫,而使人必治荒田幾畝,仍出力轉償。又以故俗不閑於農,皆晩出早罷,隨其地分差人勸課,每人十爲保,每保作一簡,先至者受之授次至者,次次相授,最後者無所授,帶簡而作,至罷出,帶簡者罰之以後至之罪。方其時也,日未辨色,公已在田間,如是十日,人爭爲之先,梁之荒田,闢之幾盡,而簡亦不用之矣。未及半年而公召還,此時公惠未甚著而人安舊習,向之耕者便不種,而種者亦不樹也。予之過梁也,李公發軔纔月餘矣。予於此,有以見仁人君子不卑小官,而以身先民事;而知梁民之貧不獨梁民之過,而在爲政者之勤惰也。今竹屋之子益之得梁之命,因記予所聞於梁者告之,且勉之曰:‘子第擧李公之政,而勿以梁爲小,則何患
乎梁民之不可治,而梁民之貧不可以致富哉?若夫富而敎之之術,則子旣從事於斯學者,奚待予言哉?少年讀書功用,予見梁民之化於子也。’”
山川
城隍山。在郡東北五里。鎭山。
鷲棲山。在郡北三十里。又見彦陽縣。
圓寂山。在郡北二十里。一云千聖山,一云小金剛山。
七點山。在郡南四十四里海澨。山有七峯如點,故名。世傳駕洛時旵始仙人所遊之地。○安軸詩:“海門千里水浮空,七點靑峯杳靄中。此是琴仙棲息處,乘舟且莫道悤悤。”
金井山。在郡南五里。詳見東萊縣。
梨川山。在郡西三十里。
甑山。在郡西南十二里大野中。
海。在七點山外二里。
內浦。在郡西四十里。
鷄原淵。在雙碧樓下。有二源:一出圓寂山,一出凡谷部曲。合流入狐浦。西岸
有竹塢。
狐浦。在郡南十里。有二源:一出圓寂山,一出鷲棲山。合流入黃山江。有渡船。
黃山江。在郡西十八里。新羅爲四瀆之一,載中祀。高麗以務安之龍津、光陽之蟾津及此江稱爲“背流三大水”。○鄭誧歌:“過雨霏霏濕江樹,薄雲泄泄凝晴光。黃山江深不可渡,回望百里雲茫茫。江頭女兒美無度,臨流欲濟行彷徨。鳴鳩乳燕春日暮,落花飛絮春風香。招招舟子來何所?掛帆却下魚山莊。問之與我同路去,遂與共坐船中央。也知羅敷自有夫,怪底笑語何輕狂?藐然不顧黃金贈,目送江岸雙鴛鴦。君乎艤舟我豈留?我友政待黃茅岡。” ○李穀詩:“憶昔舟過黃山東,朔風吹日寒無光。黃山西望三十里,漁舟出沒江蒼茫。我行不時行又急,目斷勝境空彷徨。聞君出守向江海,想像畫戟凝淸香。送客頻過江上路,尋僧屢到山中莊。黃山之遊最可樂,紅粧畫舸江中央。使君一曲黃山歌,使君豪氣仍淸狂。人生聚
散足哀樂,芙蓉低泣愁鴛鴦。何當重唱使君曲,檀板拍碎黃山岡?”
伽倻津。一名玉池淵。在郡西四十里。黃山江上流。我世宗朝,黃龍見津中。天旱禱雨,輒應。
東院津。在郡南二十五里。黃山江下流。
仇邑浦。在郡西三里。源出鷲棲山,與狐浦合流,入黃山江。
大渚島。在郡南四十里海口。良田可百頃。
火者浦。在郡西二十里。
靈川。在郡東二十二里。南流入東萊縣海雲浦。
〔新增〕 蛇頭島。卽七點山南支。有田五百餘頃,民居亦多。
所要渚島。在大渚島東。有田數百餘頃,土極膏饒。
杻浦。在郡南三十五里。民居五百餘戶。
東頭渚。在郡南三十五里。杻浦上游。
北川。在郡北十里。水漲則直衝邑城,故築石以防。
土産
鐵,出火者浦。竹箭,出古城山。松蕈,銀口魚,香蕈,黃魚,天門冬。〔新增〕 茶,葦魚,秀魚。
城郭
邑城。石築。周三千七百十尺,高十三尺。內有井五、池一。
城隍山城。石築。周四千三百六十八尺,高六尺。內有井六、池二,有軍倉。
烽燧
圓寂山烽燧。南應東萊縣鷄鳴山,北應彦陽縣夫老山。
樓亭
雙碧樓。在澄心軒南偏。樓下水竹交映,因名焉。○金時用記:“梁之古治有磎焉,今安東大都護府李公嘗知郡,起樓於其上,名之曰碧磎。洪武辛酉春,倭寇梁而火之,梁之民失其地,乃城
於屬縣東平而徙居之,常有懷土之心,以望其還定安集者有年矣。越壬申冬十月,玄風監務田侯平遠以良吏最,移於梁。初玄風隷于密陽,聽命指使之不暇,彫弊日甚。國家首擧侯以監其務,則流民還,庶事修,凡樓觀逆旅之作,殆過諸州,一邑以治,咸樂其生。廟堂賢之,以有是命,蓋欲以其治玄風者治梁也。旣下車,梁人相謂曰:‘吾邑其將興乎。梁雖失所,古稱易治,我侯爲之,豈若玄風而已哉?’ 於是時夜思蚤作,招集流亡,帥之以寬,而民知愛;齊之以禮,而民知恥;使之以義,民樂其事。侯乃有復古之志,謀諸父老以新斯樓,相其遺址,小北而益高,經營以時而不煩民,惟遊手是役焉。旣訖,朝廷使者金仁甫來,其接伴使樞府趙公仁沃登覽是樓,嘆曰:‘善夫,田侯之有是役也!其興復古梁之兆乎。且樓下有磎,磎上有竹,亦足以喩侯之淸且直也。’ 乃更名樓曰雙碧,命予記。余不敢辭,以謂:‘《春秋》每興作,必書,不與也;詩人於靈臺之役,
詠於歌,樂之也。其役民也一,而《春秋》不與,詩人則樂之,以其事之義與不義耳。今侯之爲政固善,而此擧有起廢之義,是亦樂之也。他日果能復古,以答梁人之望,則趙公之言,爲有徵矣。又況田侯之節有異於人,惟水竝其淸,惟竹同其直,則其所以名樓之義,豈獨在於水與竹而已哉?嗚呼!言水而又言竹,以喩其節之全焉,後之礪節者,必於斯樓焉有得也。若夫樓之壯麗與其勝槪,則登覽一寓目,而盡取之,斯不足論。’” ○金克己詩:“殘陽策馬到宜春,遇勝登臨興轉新。千疊亂屛山靨靨,一輪淸鏡水鱗鱗。連汀柳色綠初遍,夾岸桃花紅未勻。顧陸丹靑難狀處,多君落筆獨傳神。” ○大明人張淸詩:“遙聞雙碧大堤邊,脩竹成林有七賢。倚檻哦詩偏得趣,登樓眺遠欲乘仙。山連碧海來三島,水接銀河落九天。此日與君同憾慨,獨慙吾輩賦歸田。” ○李行詩:“溪水中涵竹四邊,壁間珠玉摠詩賢。十年漂蕩還嫌俗,半日登臨更覺仙。遠近峯
巒雄地理,東南畎畝足民天。聖恩許借酬微分,拈賣家書卽買田。” 〔新增〕 金宗直詩:“波聲竹影曲欄邊,尊酒留連樂聖賢。攬景不堪傷往事,登臨更欲喚飛仙。江山許我非生客,軒冕無心有老天。向夜月明仍倚柱,如轟鐵笛過瑤田。” ○姜渾詩:“張帆昨日過黃山,遙望危樓紫翠間。薄暮登臨看絶景,一江煙雨暗蒼灣。” ○“漁師朝入白蘋洲,波冷紅鱗懶上鉤。魚少魚多渠不管,紫薇花下繫扁舟。”
澄心軒。在客館西。○金久冏詩:“軒楹開豁俯淸流,萬竹吟風六月秋。俛仰堪窮千里景,留連欲洗百年愁。” ○姜希顔詩:“牕外簟紋渾欲流,夜深閑臥却疑秋。已看淵水澄如許,可洗人間無限愁。” ○徐居正詩:“蒼翠玲瓏萬竹林,一軒雲物更澄心。風吹細浪鱗鱗玉,月透疎簾瑣瑣金。欲喚仙曹騎鶴去,已將佳句動龍吟。憑欄有思無人識,段段離愁夜向深。” 〔新增〕 金壽童詩:“風生珍簟翠紋流,竹影波光滿箔秋。莫遣渚禽啼夜月,樓中宿客動羈
愁。”
學校
鄕校。在郡東二里。
驛院
黃山驛。在黃山江岸。○丞。本道屬驛十一:仍浦,奴谷,輪山,渭川,德泉,堀火,肝谷,阿月,蘇山,休山,新明。○丞一人。〔新增〕 正德庚午,革丞置察訪。
渭川驛。在郡北二十里。古稱于川。
輪山驛。在郡西五里。
北亭院。在郡北五里。今廢。
安井院。在郡東十二里。
東院。在郡南二十二里。
凡魚院。在郡西七里。
內浦院。在內浦北岸。
省川院。在郡北三十五里。
狐浦院。在狐浦東岸。今廢。
橋梁
鷄原橋。在鷄原淵尾。
仇邑浦橋。在仇邑浦。
火者橋。
在火者浦。
佛宇
通度寺。在鷲棲山。有李穡記。○金克己詩:“擘開千朶山,流下一條水。驚波亂灑面,六月生秋意。一簇林外樓,朱欄映層翠。畫梁燕調語,珍木鸎飽睡。亂石高倚天,荒苔亂鋪地。軒軒律壇伯,戒水無片滓。幽居不踐靑,誦下三千指。枉分淸絶境,聊慰蕩遊子。遊子如輕驅,出門動萬里。貪奇暫淹留,百萬纔一二。就中獨再來,林壑知尤美。昔與秅侯孫,登臨成爛醉。今來想前遊,怳惚如夢寐。試覓王播句,紗籠已淪棄。臨風發長吁,一掬懷舊淚。” ○“洞中紺屋最幽深,埋覆煙霞未易尋。林下忽看支遁鶴,夢中先理仲殊琴。境淸肯許紅塵涴,池靜偏憐素月臨。淨水一甁燈一炷,無心何處更安心。”
〔新增〕 佛池寺。在圓寂山。寺北巖崖下有泉涌出,其色如金。
祠廟
社稷壇。在郡西。
文廟。在鄕校。
城隍祠。世傳金忍訓佐高麗太祖,位至門下左侍中,死爲祠神。
伽倻津祠。祀典,與公州熊津俱爲南瀆,載中祀。每歲降香祝以祭。
赤石龍堂。在郡南二十二里。高麗稱伽倻津衍所,本邑致祭。
厲壇。在郡北。
古跡
臨鏡臺。一云崔公臺。在黃山驛西絶壁上。崔致遠遊賞之地。致遠有詩云:“煙巒簇簇水溶溶,鏡裏人家對碧峯。何處孤帆飽風去?瞥然飛鳥杳無蹤。” ○金克己詩:“澄江瀉鏡碧㴩溶,面水孤村背亂峯。漁唱一聲舟一葉,綠楊深處少人蹤。”
瓦谷部曲。在郡北六里。
凡魚部曲。在郡西六里。
源浦部曲。在郡西三十里。古有源浦驛。
於谷
凡谷部曲。在郡北十里。今爲石谷村。
古山城。在郡東三里。石築。
古長城。在黃山江東北岸。石土雜築。
名宦
新羅 朴堤上。訥祗王時,仕爲歃良州干。詳慶州人物下。
金舒玄。良州摠管。
金巖。良州太守。
高麗 趙通。字亦樂。李仁老《破閑集》云:“亦樂赴梁州倅,僕與子眞冒曉到天壽寺門餞之,亦樂爲友人所牽挽,日午尙未到。云云。” 詳玉果人物下。
尹彦頤。爲防禦使。
本朝 田平遠。詳《雙碧樓記》。
人物
高麗 金猛。登第,累遷左拾遺。顯宗初擢置近侍,俾掌劇權。官至參知政事。
本朝 李澄石。再捷武擧,官至判中樞。世祖朝爲佐翼功臣,封梁山君。諡莊剛。
孝子
高麗 朴暢。丁憂,廬于深谷間,日夜哀慟。有倭賊三人持刃來,問其故,暢答以實。賊感而釋之,遂終三年。旌門立碑。
李公美。守母墳三年。旌門復戶。
鄭承雨。嘗爲倭賊所獲,轉鬻於肥前州。被虜時母年七十有二,每念存歿,食不御肉,倭人感其義,具舟楫備餱糧以歸。母子相見,以梁爲賊衝,奉母避居靈山縣。母歿,葬于鷲山之南,奠哭益虔,以終三年。
題詠
滿樓秋月爲誰明?鄭誧詩:“江風吹雨晩來晴,江雁離群半夜鳴。惆悵抱琴人不見,云云。”
北來山斷海連天。金銚詩:“西去路長雲接塞,云云。”
一村花柳春機動。李宣詩:“云云,萬畝桑麻霽色新。”
置戍能
防禦。權近詩:“云云,環城又鑿池。人煙皆復舊,蠶婦採桑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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