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꽃
유당(裕堂) 이정경
청아한 오카리나 합주 소리가 교실 전체에 곱게 울려 퍼져 나온다. 트로트 가수 임 영웅의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 노래다. ‘당신이 얼마나 내게 소중한 사람인지….’ 가사를 깊이 음미하면서 오카리나의 선율에 맞추어 사랑이 꽃향기처럼 피어나는 연주를 한다. 악보를 쳐다보며 연주자 전부의 눈과 손가락과 호흡이 바쁘다. 모두 한마음 한 몸이 되어 소리를 내어야 아름다운 하모니가 나온다. 한 사람이라도 돌출되거나 뒤처지면 화음이 조화롭지 못하다.
사람의 입김이 악기 소리요. 마음의 정성은 고운 음색이다. 선생님의 선창 지시에 따라 손짓과 눈짓, 입술이 왔다 갔다 정신없다. 오월이 되면 몇 군데 봉사 공연이 있다고 수업 시간이 빡빡하다. 낯선 음악을 처음 접하면 선생님이 그 곡과 하나가 되도록 흐름을 짚어 파도타기처럼 반복 또 반복해 주신다. 흥얼흥얼 리듬에 몸을 맡겨 율동하듯이 새 곡과 친해야 된다. 노래와 익숙하지 않으면 좋은 연주가 나오지 않는다. 가사로 노래를 부르거나 음을 입으로 먼저 연주를 한 후에야 오카리나로 직접 반주에 맞춰 연습한다.
몇 년을 머리만 쓰는 늦깎이 어학 공부하느라 두뇌가 과부하가 되었다. 머리도 식히고 몸도 잠시 쉬어가고 좋아하는 음악도 들을 겸 작년에 중구노인복지관 오카리나 반에 입회했다. 그것도 기초반도 아니고 월반으로 중급반을 덜컥 겁 없이 신청했다. 영어 공부하기 오 년 전, 일 년 동안 오카리나를 열심히 배웠던 경력을 믿고 들이밀었으나, 몇 년 손 놓고 놀았던 공백 기간의 장벽이 그렇게 클 줄이야. 방송대 영문과 갓 편입학해서 청보리 축제 때 영문과 대표로 오카리나 독주를 했던 경험은 어디 가고, 손가락을 짚는 방법조차 까마득한 백지상태로 기억이 없다. 완전 초보로 돌아가 버렸다.
일단 다른 사람들 연주를 들어 귀동냥으로 리듬을 익히기로 했다. 강심장이 아니면 연주 안 하고 혼자 그 자리를 버티고 앉아 있기가 어려운 분위기다. 보다 못한 선생님이 내게 다가와서 기초반으로 가서 배우면 안 되겠냐고 권했지만, 나 자신을 믿기로 했다. 같이 연주를 따라 하지 못하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잠시 불편을 주긴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듣기만 하니까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들으면서 조용히 혼자 용기를 갖고 자신감을 쌓았다. 손가락만 오카리나에 갖다 대고 왔다 갔다 흉내를 내 보면서.
언젠가는 나도 그들처럼 잘 하리라는 희망을 가지며, 예전에 봉사 다니며 연주하던 그전의 나의 모습을 그려보며 기다렸다. 손가락 짚는 법만 다 익히면 나도 모르게 자동으로 악보 따라 손가락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면서 일사불란하게 연주했던 과거처럼 될 것이라 믿었다. 그때에도, 삼십 대 후반에 피아노를 만 삼 년 열심히 쳤던 경험이 있어서 오카리나 악보 보는 속도가 다른 사람들이 일 년 배운 것과 같았다. 주위에서 놀라며 칭찬을 많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악보를 많이 봤던 경험이 잠재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 은근히 자신감을 심어준다. 피아노 악보는 오카리나 악보보다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가. 삼 단계 음계를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반주까지 넣어서 친다. 그것에 비하면 오카리나 연주는 아주 간단하게 느껴졌다.
연말에 복지관에서 열리는 합주 대회에 기존 수강생들만 참가하게 되어 나는 마음 편하게 연주를 들으며 즐겼다. 대회를 마친 후에는 선생님께서 틈나는 대로 차분하게 하나씩 손가락 짚는 방법을 독대로 가르쳐 주었다. 보석을 가공하듯이 어설프지만 조금씩 매주 반복하다 보니 몇 달 사이 고급반 분들과 버금가게 합주하게 되었다. 꿋꿋하게 돌부처처럼 버틴 덕분이다. 선생님의 칭찬도 요즘은 용기를 한몫 더 보태준다.
초보인 나를 위한 특강처럼, 본격적인 연주에 들어가기 전에 선생님께서 체계적으로 기초 연주 연습을 단계별로 하나씩 연습시킨 효과가 큰 것 같다. 무엇보다 학생은 결석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신념으로 한 번도 결석을 하지 않았다. 집에 가서 따로 연습하지 못하고 수업 시간에만 집중해서 연습한 것만으로도 많은 양의 연습이 누적되어 쌓인다. 일단 연주에 가동이 붙으면 스파르타식으로 맹훈련을 시키는 선생님 교육방식의 영향이 크다.
곧 분홍색 단복으로 새 옷을 단정하게 맞춰 나도 함께 연주할 그날을 그려본다. 또한, 올해 연말에 각종 문학 단체 행사 때 오카리나 독주로 장기 자랑하는 것이 기분 좋은 목표다. ‘하고 싶은 목표가 있고 꿈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내 삶의 신조다. 하나씩 새로운 도전을 하고 그것을 이루어 성취하고 또 다른 도전을 향하여 끊임없이 전진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란다. 사랑하는 마음 가득 담아서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연주로 기쁨을 나누고 싶다.
“지나간 청춘만 꽃인 줄 알았더니 지금도 꽃이더라.”
복지관 건물 외벽에 어르신들을 위한 위로와 응원의 커다란 문구가 대형 꽃처럼 피어있다. 생로병사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자연의 이치다. 그 문구를 볼 때마다 세월을 청춘으로 되돌린다. 오카리나 수업 시간에 배운 사랑과 인생의 노래들이 하루 종일 머릿속에 맴돌며 흥얼거려진다. 지금도 청춘인 꽃의 세계가 우리 집에서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나를 반갑게 기다리고 있다. 함께 할 동행자들이 계셔서 늙어가고 있음을 잊게 한다. 아름다운 노래가 있는 한 인생은 불로초 같으리. 각자 늙지 않는 젊음의 꽃향기가 오래 머물러 있기를, 기도처럼 마음 모아본다.
첫댓글 접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승권 편집국장님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