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28)
*양반들의 김삿갓 골려먹기
사또는 빙그레 웃었다.
다른 때 같으면 자기들의 유식함을 어떻게라도 드러내려고 별의별 문자를 섞어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를 하였을 것이나, 김삿갓의 시를 본 순간, 감히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 보이지 못했다.
사또는 이러한 그들의 심정을 가늠하는 터라, 더이상 괴롭히지 않았다.
"오늘 귀한 손님을 모신 자리라 특별히 비장한 술을 내놓았더니 모두 크게 취하는 모양이구료.
그럼 신기에 가까운 시를 감상하였으니 이제부터는 꽃이나 희롱하며 놉시다."
사또의 말이 끝나자 안변사걸은 일제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연회는 밤이 늦은 후에 끝났다. 다음날 사또는 자기 방으로 김삿갓을 불렀다.
김삿갓이 사또의 방으로 들어가니 거기에는 사또의 큰 아들이 있었다.
"인사올려라. 네 스승님이시다."
사또의 말에 아들은 성큼 큰 절을 올린다.
"유선규라 하옵니다. 스승님에 대한 말씀은 저희 아버님을 통하여 익히 들었습니다.
소생 아직 우매하오나 스승님의 가르침을 정성껏 따르겠습니다."
사또의 아들 선규를 본 김삿갓은 그의 풍모와 말씨를 보아 큰 재목이 될 인물임을 직감했다.
"내 비록 배운 것은 없으나 아는대로 깨우쳐 줄 것이니 같이 노력하세."
김삿갓은 이렇게 답례하였다. 이로써 유선규와 김삿갓은 사제의 의를 맺게 되었다.
이날부터 별당에 글방을 차려놓고 김삿갓과 선규와의 글공부는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선규는 총명하여 한 가지 이치를 깨우쳐 주면 그것을 여러가지로 응용하는 능력이 매우 우수하였다.
따라서 김삿갓은 총명한 제자를 두었음에 만족하였고 선규는 어떤 어려운 문제도 막힘 없이 술술 풀어내 쉽게 가르치는 스승의 학식에 감탄하였다.
이러한 김삿갓의 실력을 아들을 통해 전해듣고 있는 사또는 매우 기뻐하였다.
더불어 김삿갓을 위하는 정도가 극치에 달했다.
한편, 뜻밖에도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근본조차 알 수 없는 젊은 과객이 나타나 자신들이 갖던 사또와의 교류가 잠잠해져 불안감을 갖던 안변사걸들은 어떻게 해야 이녀석을 찍소리 못하도록 콧대를 꺾어놓나 하고 자나깨나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서진사의 큰 사랑으로 사걸이 모이게 되었다.
지난번 김삿갓의 환영연 이후 사걸이 처음으로 다같이 모인 것이다.
"별고 없으셨소이까?"
문첨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 이들이 첨지나 생원 등으로 서로 부르지만 생원에 급제한 일도, 첨지의 벼슬을 지낸 바도 없었다.
서 진사 조차도 자신의 할아버지때 진사에 급제했을 뿐, 정작 본인은 진사시에 응시조차 못했다.
이렇듯 이들은 서로의 상대방이 좋아할 호칭을 마음대로 불러 제끼고 있었으나, 이들은 모두 부농들이어서 소작도 많이 치고, 행세깨나 하였기에 이들의 호칭을 문제삼아, 감히 따지고 나설 안변 사람들은 없었다.
"여보 문 첨지, 별일이 없었다니 그래 자네는 지난번 그 일이 있은 후 마음 편하게 지냈단 말인가?"
서 진사가 핀잔을 주듯 이렇게 말을 하자 조 석사가 잇달아 한마디 한다.
"난 낯이 뜨거워 못살겠소. 그놈의 글을 따라갈 재간은 둘째치고, 난데없이 나타난 삿갓 때문에 사또와 우리 사이가 소원해 지겠기에 여간 걱정이 아니란 말씀이오."
모두 한 마디씩 불평을 해댔다.
문첨지가 곰방대를 뻑뻑 빨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 지방에서 명문거족으로 글 잘하는 양반으로 행세해 왔는데 그놈의 삿갓인지 패랭이인지 하는 젊은 놈 때문에, 자칫 그동안 우리가 쌓아 온 명성에 먹칠을 하게 생겼으니 잘들 생각하여 그놈을 쫒아 낼 방도를 모색해야 할 것이오."
"쫒아낼 수만 있다면 쫒아내야지요. 헌데 사또가 자기 아들 훈장까지 맡기면서 편애하고 있는데 순순히 쫒아 내줄까?" 조석사가 고개를 갸우뚱 하였다.
"좋은 계책이 있소이다."
서 진사가 나섰다.
"계책이라뇨?"
"사또도 삿갓놈의 신분과 내력은 모르고 있지 않소이까, 그놈의 애비가 개 백정인지 어느 댁 하인인지 근본을 아무도 모르쟎소?
또, 그놈이 대명천지에 삿갓을 쓰고 다니는 것을 보면 필시 떳떳한 놈은 아닐게요. 허니, 그놈의 내력을 은근히 물고 늘어지면 본색이 탄로날까 두려워 야반도주 할 것이 틀림 없소이다. "
"거참 좋은 계책이오. 삿갓이 상놈이라면 어떻게 사또의 자제를 맡겨 가르치게 한단 말이오.
그럼 어떤 방법으로 놈의 내력을 알아보면 되겠소이까? " 조석사가 물었다.
"내 우리집에서 잔치를 걸판지게 준비할 것이니 경비는 우리 네 사람이 같이 부담 하십시다.
나만을 위하자고 하는 일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사또를 초청하자는 말씀입니다.
명분이야 사또의 노고를 위로한다고 하면 그럴듯 하지 않겠소. 사또가 오면 자연히 그 삿갓녀석도 올겝니다."
"경비는 얼마씩 추렴하면 되겠소이까?"
원생원은 돈이 들어간다는 말에 신경을 쓰며 물었다.
"이십 냥씩만 내시오. 그럼 육십 냥이고 내가 사십 냥을 내어 모두 백냥으로 차립시다."
"쌀 한 가마가 일곱 냥이 되니까 백 냥이면 너끈할 것이오." 서진사가 힘주어 말을 했다.
"헌데 사또가 거절하면 어떻게 하시려오?"
전에도 사또를 초청한 일이 있었다. 헌데 사또는 민폐를 끼치기 싫다는 이유로 거절한 일이 있던 터이다.
문 첨지는 그때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또가 오지 않으면 삿갓만이라도 부를 것이니 걱정 마시오."
그들은 마침내 결정을 하고 잔치준비에 들어갔다.
여러 하인을 거느린 서 진사는 사랑채에 앉아서 이것은 이렇게, 저것은 저렇게 하인에게 이르며 잔치준비에 일일히 간섭했다.
사또를 초청하는 일은 문 첨지가 맡아 관아의 일이 파할 시간쯤 되어 사또를 찾았다.
"사또 나으리!"
사또는 마침 공무를 마치고 김삿갓과 술이나 나눌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누구요?"
"문 첨지올시다. 오늘 밤 서 진사 댁에서 사또님을 모시고 소연이나마 베풀고자 하오니 왕림하여 주십시오."
"아니 갑자기 웬일이오?"
일전에 이들의 청을 거절한 일이 있었기에 사또가 그 내력을 아니 물을 수가 없었다.
"공사다망하신 사또님의 노고를 조금이나마 위로해 드릴까 하고 마련한 자리오니 물리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사또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좋소이다. 내 언젠가 한 번 거절한 일이 있은즉, 성의를 다시 거절하기 어려우니 가겠소이다."
문 첨지는 좋아라 하며 돌아갔다.
이들이 김삿갓을 곤경에 빠트릴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때, 김삿갓은 글방에서 선규에게 시경을 강론하고 있었다.
선규에게 시경을 강론한지 열흘을 겨우 넘겼는데 그의 지식은 놀랄만큼 진보되었다.
이것은 선규의 머리가 비상한 탓도 있지만 삿갓의 가르침이 분명하고도 막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부가 끝날 무렵, 삿갓은 서진사네 집에 연회가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는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생각이 들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사또를 초청하는 것만 같았다.
만약 그 어떤 저의가 없다면 지난번 사또 면전에서 은근히 곤욕을 당한 그들이 사또를 청할리가 없는 것이다. 그는 사또보다 먼저 서 진사 집으로 가서 그들의 눈치를 살피리라 마음 먹었다.
김삿갓은 먼저 출발하겠다는 뜻을 사또에게 고하고 사령을 앞세우고 서 진사 집으로 향했다.
"훈장님, 저기 고래등처럼 커다란 기와집이 서 진사 어른 댁입죠."
사령이 가르키는 곳을 보니 커다란 집이 저녁 어스름에 싸여 있었다.
"굉장히 큰 집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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