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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소설가 김영하는 작품보다는 방송을 통해서 먼저 익숙해진 인물이었다. 케이블 방송에서 다양한 장소를 여행하면서 출연자들이 자유롭게 떠들며 각자의 유식함을 자랑하듯 만들었던 방송 프로그램이었다. 다른 출연자들에게 전혀 꿀리지 않는, 때로는 그들을 압도하듯이 이끌어가는 김영하의 화법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흥미를 유발시키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졌다. 방송을 시청하면서 그의 소설을 한번 읽어보겠다는 생각을 품고 구입했던 소설이 바로 이 책이다.
그동안 살인을 저지르면서 단서 하나도 남기지 않았던 ‘살인자’가 알츠하이머에 걸려 기억을 잃어간다는 작품의 설정 자체부터가 흥미로웠다. 일반적으로 치매는 가까운 기억부터 사라지고, 오래된 기억이 끝까지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연쇄살인범이자 치매 환자인 주인공 김병수는 하루하루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매일의 기록을 남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치매 환자가 기록한 내용이 과연 얼마만큼이나 신빙성이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하겠는데, 이 작품의 묘미는 진실이라고 여겨지는 기록의 모호함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누군가 자신의 과거 행적을 탐문한다는 느낌을 받은 김병수는 딸의 애인이라는 박주태가 의심스럽기만 하다. 자신의 주변에서 떠돌던 박주태가 딸의 애인이라는 사실과 혹시 그가 딸인 은희를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니게 된다. 주인공은 딸 은희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먼저 박주태를 죽이겠다는 생각을 품고, 그것을 위해 잃어가는 전날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매일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결심한다. 치매에 걸린 김병수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소설의 내용은 그마저도 분명한 기억인지가 의심스럽다는 것이 이 작품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던 살인범 김병수가 어쩌면 자신의 범죄를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을 남긴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작가가 살정한 <살인자의 기억법>은 ‘살인자만의 기억’을 보존하는 방법일 뿐이며, 치매에 의한 기억이 사실인지 여부도 확실하게 단언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치매라는 소재를 취했을 때부터 예견된 결말일지도 모르겠으나, 작품의 결론은 김병수의 기억 또는 기록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사람의 기억이 지닌 선택적 환기와 치매라는 소재가 중첩되어 긴장감 있게 작품을 이끌어가는 방식이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통해서 소설가로서 김영하의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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