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고향 마을의 처마밑이다. 다섯살배기 동갑내기 여리디 여린 숫소녀와 숫총각이 마주보며 속삭이고 있다. 눈보라가 앞을 가리도록 몰아치고 있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온뭄을 움츠러들게 하고 있다. 단발머리 아가씨(?)가 총각의 손을 잡아끈다.
" 정남아 ~ 이리로 들어와 봐 ~~~" 이부자라는 친구가 내손을 끌어 당긴다
" 이거 먹어봐 응 ~ " 빠알간 덩어리 한개를 두쪽으로 쪼개어 준다.
" 이게 뭐야 ~~ 아이고 ~ 짜다 짜 퉤 ~퉤 ~ " 입속에 넣자 마자 뱉어낸다.
" 그리 뱉으면 어떠케 해 ~ 명란젖이야 " 하얀 니팝(쌀밥) 한수저 떠서 입에도 넣어준다.
이 세상에 태여나서 처음 접하는 명란젖이다. 명란젖이 무언지 도대체 알 수도 없다.
내 친구인 부자와 내 나이가 아마도 너댓살 때이리다.
건너편 소녀의 집 부엌이다. 찬장에서 어른 손가락 굵기의 빠알간 덩어리를 꺼낸다. 두동강으로 잘라서 총각의 입으로 집어 넣어준다.
" 아~이 ~~~ 짜다. 퉤 ~퉤에 퉤 ~~~ " 인상을 쓰며 뱉어 버린다. 보도 듣도 못한 이름도 생소한 명란젖이란다.
황해도 내륙지방으로 수산물을 구경키도 힘든 시골 마을이다. 이토록 귀하디 귀한 생선 젖갈을 먹여주던 그녀는 지금 어드메에 있는가. 첫 여인 첫 사랑의 바로 원처(源妻)가 아닌가. " 이부자 " 이름도 자그마한 가슴에 새겨진 그 때 그대로 70년이 훌쩍 흘렀으나 지울 수도 지워지지도 않는 이름이다. 1951년 1.4후퇴로 남쪽으로 피난이라도 왔을까. 아니면 아직도 이북 고향산천에 파묻혀 어느 놈의 품속을 헤매며 살아가기라도 하는가.
눈이 엄청 쏟아지고 있는 겨울 어느날이다. 처마 밑에 앉아서 둘이서 소꼽장난이라도 하고 있었을 게다.
짧은 까만 단발머리에 흰무명 솜저고리에 치마는 까만 치마를 걸치고 있다. 신발은 까만 고무신이다.
겨울인지라 양말은 아니고 솜버선을 신는다.
옆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내 모습은 어떤가.
소변이나 대변을 바지에 흘리지 않게 사타구니는 터져있는 까만 솜바지를 입었고 윗옷은 생각이 가물거린다.
모든것이 오마니의 솜씨이다. 여리디 여린 손가락은 바알갛게 얼었다 녹은 모양이다.
원적지는 이북 고향인 평안남도 개천군 조양면 용현리 227번지이다.
출생지는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어수리 226번지이다. 이곳에서 1951년 1.4후퇴 피난을 남쪽으로 내려온 것이다.
매일 아침마다 한강가로 나가는 것이 생활의 시작이다. 비가오나 태풍이 불고 비바람 눈보라가 하늘을 덮어도
빠짐없이 접어들고 있는 중독자(中毒者)가 아니랴. 청담아파트에서 아내는 청담목련공원에서 이몸은 한강가로 향하곤 한다. 두시간 정도 걸으며 운동기구에 매달리고 뒤틀곤 한다.
어느날부터인가 일렁이는 강물을 바라보노라면 가슴이 메어지곤 한다. 이북고향 산천에 홀로 남아 계신 할머니 생각에 눈물이 거침이 없이 흐른다. 가을에 추수한 온갖 곡식을 창고(광)에 그득한 상태이다. 1951년 1월4일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하는 순간이다. " 오마니 걱정 마시고 일주일 아니면 한달 정도후에는 다시 돌아올 것입네다.
편히 계시라우요 " 아버지가 내 할머니에게 드리는 인사이다. 내 오마니와 큰 누님 그리고 장남인 나를 네 가족만을 데리고 피난을 가려고 한다.더 큰 누님은 이북에서 출가를 하여 피난을 나왔는지 알 수도 없다.
" 야 아 야 ~ 피난은 그런게 아니니까니 모두 데리고 가라무나 ~~~ "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시던 내 할머니의 마지막 한 마디이다. 이 순간이야말로 우리 가족의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의 운명의 찰나가 아닌가.
" 잘들 가라무나 야 ~~~ " 이런 말도 없이 돌아서 손을 흔드시며 계속 눈물을 닦으시던 내 할머니이다.
이것이 내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일 줄이야 그 누가 알기나 했을까. 맏손자인 이 녀석은 그 당시 할머니의 연세는 회갑을 막 넘기신 때로 기억하고 있다. 가득하게 쌓아놓은 그 많은 곡식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
총칼을 들고 위협하는 빨갱이 우두머리인 김일성의 노예들에게 모두 약탈을 당했으리라 의심치 않는다.
" 할머니 !!! 정말로 보고싶습네다. 지금 어드메에서 어떻게 무엇을 하며 계십네까, 이 맏손자가 그립고 보고싶지도 않습네까. 하 ~알 ~ 머 ~ 니 ~~~ 이 맏손자 나이가 네일이면 80입네다, 그리고 할머니의 아들 며느리이며 이 맏 손자의 아버지 오마니도 이 세상을 떠나신지도 50여년이 40여년이 훌쩍 넘었습네다. 피난 나와 살아 생존에 할머니의 아들이자 내 아버지는 해마다 명절이면 차레상을 가득히 차립니다. 할머니가 계시는 북녘 하늘을 향하여 무릎을 끓습니다. 오 ~ 마 ~니 ~ 보고싶습네다. 드릴 말씀이 없습네다. 가슴을 치시며 하염없는 눈물로 밤을 지새시던 내 아버지 모습이 지금도 이 손자 가슴에는 멍울로 남아 있습네다. 벌써 아마도 할머니가 계신 그곳 머나 먼 하늘나라로 찾아들어 할머니 품에 안겼으리라 믿고 있습네다. 할머니 ! 아버지 ! 오마니 ! 그곳에서도 지금 남한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가족들을 내려다 보시면서 평화스럽고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기를 기원해 주시리라 믿습네다. 할머니의 손주들이며 아버지 오마니의 두번째 딸도 작은 막내딸도 맏아들 둘째 아들도 모두 출가하여 할머니의 증손주들도 결혼하여 아들딸들을 낳았으니 할머니의 고손주들도 있습네다. 또 이들도 결혼을 하여 자녀들을 낳고 계속 할머니 후손들이 무럭무럭 잘 자라서 나라의 기둥으로 보배로 성장해 주기를 바라나이다.
할머니 ~~~ 손자인 저도 어느 날 할머니 곁으로 찾아 파고들 것입네다. 흐르는 세월은 그 누구도 막을 수도 붙잡을 수도 없는 자연법칙이니 어찌 하겠습네까. 그 날까지 건강하게 편안하게 아들 며느리와 잘 계시기를 기원합네다 할머니 ~ 아버지 ~ 오마니 ~ 안녕히 편안히 계세요 사랑합네다 ~~~ 영원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