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합과 해체
우리는 어머니 배 속에서 열 달을 채우고 이 세상에 나오면서 응애 하며 크게 울음을 터뜨리며 태어납니다. 울지 않는 아이는 살 수 없다 합니다. 왜 인간은 울음으로서 자기 태어남을 알리는 걸까요?
아닌 이야기로 응애 응애 하는 울음 보다 하하 호호 하는 웃음이 한층 재미있고 긍정적이니만큼 좋은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울음은 어머니 뱃속에서 안락한 삶을 살다 거친 세상 풍파에 뛰어 더니 어찌 두려움이 없겠습니까? 공포나 두려움에 대한 반사적 행동이거나 아니면 나도 세상에 나가니 참여 시켜 주시오 하는 알림이나 또는 부탁의 말이 계면쩍어서 얼버무림 하는 또 다른 표현의 인사는 아닐까요?
만남에는 처음이던 두 번이던 열 번이던 만날 때마다 인사가 항상 따라다닙니다. 인사를 잘 하는 것도 하나의 덕목으로 평가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울음으로 신고하듯 인사하는 것은 그렇게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그도 모두 손윗사람들에게 하하 웃으면서 인사하는 것 또한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어떻든 사람은 태어나면서 울음으로 태어남을 알립니다. 태어날 때 와 같이 저세상에 들어갈 때도 즉 저세상에 태어날 때도 어떤 신고를 하지 않을까요?
생명의 탄생은 하느님의 개입하심을 전제로 하여 인간과 인간의 결합의 산물이며 죽음은 이 결합이 해체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난자와 정자가 결합 수정하여 하느님이 적당한시기에 영혼을 불어넣어 줌으로 인간이 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인간과 하느님의 결합이 사람일 것입니다. 모든 해체 즉 생명이 있는 것이던 그것이 무엇이든 해체에는 필연적으로 과정과 이유와 결과가 있기 마련입니다. 생명체인 결합의 인간은 사는 동안은 과정이며 죽음에 대한 원인 즉 병 또는 사고 자살까지도 이유이며 목숨이 끓어진 상태 그 자체는 결과입니다.
결합의 산물인 생명체인 인간이 태어나면서 응애 하는 울음으로 신고를 했다면 해체인 죽음은 무엇으로라도 신고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어떻게 세상을 살았는가 하는 결과물인 삶의 성적표일 것이며 세상의 모든 것은 결합과 해체의 연속이라 생각해 봅니다. 태어날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하나의 생명체이었습니다만 죽을 때는 모든 것을 책임져야하는 인격체로 살아왔기 때문에 신고하는 방법도 울음이나 웃음이 아닌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성적표일 것이다 생각합니다. 선하게 착하게 살았다. 사람답게 살았다. 아니면 악하게 살았다. 아주 못되게 살았다. 이렇게 과정과 이유는 명확하지만 죽음의 결과인 사후에 대해서는 아직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어떻든 죽음 이후 그러니 저승에 들어갈 때는 무엇으로나 어떤 방법으로나 신고를 할 것입니다. 아니면 죽고 나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 신고니 머니 하는 것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만 역사 이래로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습니다만 살아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셨으니 달리 도리 없잖습니까? 믿을 수밖에 그러므로 저승에 대해서는 예수님만이 유일한 증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 이후에 대해서 수 없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얘기를 해도 알려 하지 않겠지만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현존의 징표는 성모님의 발현을 통해서도 기적으로 증거하며 특히 과달루페 멕시코 성모님께서는 후 엔디아고 망토(딜마)에 있는 성모님 눈동자 동공에는 현미경으로 2,500배 확대하였더니 앞에 서 있는 주교와 후 엔디아고 모습은 물론 최소13명의 신자들이 더 새겨져 있다하니 우리는 한 번 더 예수님의 실존을 알고 믿게 됩니다.
이러한 분명한 기적 이외에도 보통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수 없이 많은 경험담을 듣게 됩니다.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는 경험을 하신 분이나 또 다른 사고를 당하여 일시적으로 죽음 상태에서 깨어나신 분들의 한결같은 증언은 사람은 죽으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터널 같은 곳을 지나간 후 아주 훤한 이 세상 빛과는 전혀 다른 엄청난 열이 없는 밝은 곳이거나 표현할 수조차 없는 아주 깜깜한 이 세상 어떤 어둠보다 더 어두운 곳에 다다른 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아마 밝은 곳은 천당이며 깜깜한 곳은 지옥이겠지요. 이러한 일들은 지금도 우리 주위에서 일어났고 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신고도 분명히 있을 것이며 신고는 일생 동안 삶의 성적표이다 말씀드립니다. 저승은 이승과 다를 것입니다. 기준이나 단위는 물론 무엇으로 살아가느냐 하는 것까지도 이 세상은 살기 위해서 먹지만 저 세상에서는 살기 위하여 아름다운 생각 기쁜 마음 아니 좋은 곳에 가면 자연히 그렇게 되겠지요. 우리는 흔히 끼리끼리란 얘기를 자주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합니다.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끼리 모이며 죄인들은 나쁜 사람들끼리 모입니다.
신문 지상을 보면 지금 일어나고 일들이 썩은 냄새가 온 세상을 진동시켜 성한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래도 눈 씻고 들여다보면 아름다운 좋은 사람들이 나쁜 사람 보다 더 많이 살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망하지 않고 잘 굴러가는 구나하고 안도하고 안심합니다.
원래 모난 돌은 튀어나와 있고 빈 깡통은 요란하며 떠벌립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 치고 실력 있는 사람 없고 빈 잔치가 요란합니다. 그러니 매일신문지상을 더럽히는 각종 좋지 않은 기사가 그러한 사람이 많아서 보다 야단법석을 떨기 때문은 아닐까요?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이러할 진 데 무수한 온갖 경험을 한 사람들이 살다간 저승은 어떻겠습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이 세상과는 다른 공평하고 엄격하고 분명하며 철저하여 어느 하나 어떤 것 하나라도 어긋남이 없는 아주 완벽한 저세상(저승) 일 것이라 여겨집니다.
원래 심판은 이러해야 하니까요.
그러니 저승에서의 신고는 이 세상 삶의 한 과정, 태어난 이후 한 모든 일과 말과 행동과 생각까지를 스크린으로 보여줌으로 그 결과에 따라 한 점의 의혹도 없이 그대로 천당 연옥 지옥으로 자연스럽게 지남철에 끌리듯 자기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감 나라 대추 나라 할 것도 없고 잘했다. 잘못했다. 할 것도 없이 스스로 잘 판단하여 자기 발로 찾아 들어가는 그러한 저승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지금 보면 컴퓨터라는 괴물이 일일이 기록 저장하여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결과를 도출하는 것을 보면 하느님 나라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의심하는 것 자체가 도리어 이상한 일 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미래 컴퓨터는 인간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인공지능 컴퓨터를 만든다 합니다만 아마 그 초기 작품이 거짓말 탐지기가 아니겠습니까? 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생각까지도 알 수 있는 컴퓨터도 만들 수 있는 것으로 봅니다.
앞으로는 세상 사람들이 다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감독하고 감시하는 수 없이 많은 과학적 장치가 만들어 지겠지요 물론 사생활 침범이다 통제다 억압이다. 하겠지만 이러한 물건을 만드는 과학이라면 그러한 부문 도 해결하면서 만들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 세상은 더욱 잘 살아야 하며 더 잘 살도록 만들 것입니다. 이 세상도 이러거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나라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나만을 위하여 내 가족만을 위하여 살아서는 하느님 나라 신고식에서 과연 어떤 평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야 얘기하지 않아도 아주 빤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비우고 지우며 베풀고 배려하며 더 가져야만 더 많아야만 더 부자여만 “더” 자에 집착하지 말고 글자 ”더“ 에 ”ㄹ“자를 달아서“덜”자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과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자연의 진리 즉 비가 많이 오면 홍수에 오지 않으면 가뭄에 농사를 망침을 알고 과일도 부족한 듯 비가 와야 하고 햇빛은 타지 않을 정도로 비춰야하며 알맹이도 조금은 모자란 듯 달려야하고 모두가 부족한듯해야 합니다. 그래야 과일도 크고 달아 값도 많이 받고 맛이 있는 것과 같이 인간 생명도 소식(小食)이 오래 사는 비결이라 하지 않습니까?
욕심이 사람을 망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비우고 지우며 베풀고 배려하며 살려는 사람들과 더불어 징금 다리를 놓는데 필요한 하나의 돌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저 세상에 대해서는 모두가 궁금하게 생각하고 알고 싶어 하지만 예수님의 증언 외에는 어느 하나도 이것이 정답이다. 분명히 증명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든 사람은 태어나면 죽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모두가 죽으면 가는 곳 죽은 모든 사람들은 저승에서의 생활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통로를 만들어서라도 후손들에게 알리려 했겠지만 지금까지 알 릴 수 없었고 또 영원히 알릴 수 없을 지도모르겠습니다만 예수 재림 시에는 알 수 있겠다 생각해 보면서 예수님 외는 저승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유일무이하시다. 이렇게 말씀드리면서 사람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지금까지 아는 것 알려진 것으로 죽음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첫댓글 권 형, 요즘은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네가 지은 죄를 이실직고 하렸다’ 하고 호통을 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전신만신 다 도둑놈이고 사기꾼인데 누구를 탓하고 나무라겠습니까, 그 대신 조용히 귀속 말로 ‘이승에 살 때 가장 착한일 한 것과 가장 재미있었던 일이 뭐냐’고 묻는답니다, 소제는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치매 걸린 친구를 5년이나 돌봐주었고 옆집과부의 허기도 때워주었으니까요.
장하신 일입니다.보시(普施)중에는 몸보시가 최고라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