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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장
그리스도인의 결혼관
<마19:3-11>
3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5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 할지니라 하시니 7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 함이니라 10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11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최근 한 여론조사 기관에 의하면 한국 서울 강남의 주부의 75%가 남편과 당장 이혼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 LA의 실정도 한 기독교 신문에 난 기사를 인용하면 기독교를 믿는 가정의 40%가 이혼을 했고 심각하게 이혼을 고려하고 있는 사람들을 합하면 그 수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고 합니다. 지나가는 사람 두 명 중 한 명은 이혼을 했다는 것인데 그 비율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하니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의 어떤 신학교에서 그 학교를 졸업한 목사님 천 명을 대상으로 무기명 설문 조사를 했는데 “만일 다시 결혼을 할 수 있다면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하겠는가?”라는 질문에 90%가 NO에 표시를 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 옆에다가 괄호 치고 “골볐냐?”라고 적어 놓은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노년층 이혼이 요즘 붐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한평생 자식들 때문에 체면 때문에 꾹 참고 살다가 이제 마지막 가는 마당까지 그렇게 손해보고 참으면서 살 수는 없다는 할머니들의 반란인 것이지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중년과 노년층의 이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표면적으로 나타난 이혼을 꿈꾸는 사람들과 이혼을 한 사람들의 수치보다 더 많은 이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결혼생활을 그야말로 “살아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연예인 서세원씨가 진행하는 오락프로그램에 시골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나와서 이런 저런 게임을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거기서 제일 인상 깊게 보았던 코너가 바로 스피드퀴즈였습니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서 한사람의 뒤에 놓인 단어카드를 보고 맞은편에 있는 사람한테 설명을 해서 맞추는 게임입니다. 어떤 할머니의 뒤에 단어가 놓이고 할아버지가 그 단어를 보고 할머니에게 설명해서 맞추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여러 단어가 넘어가고 “천생연분”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할아버지는 이 단어만큼은 자신 있게 맞출 수 있다는 표정이었습니다. 평소에 할머니가 할아버지가 해달라는 것은 무엇이든 해 주었고, 할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든 방해하지 않고 잘 따라주고, 늘 몸종처럼 곁에 붙어서 수발을 들어 주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관계를 떠올리게 해주면 금방 그 답이 나올 줄 알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당신과 나 사이” 그렇게 짧게 말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할머니 입에서는 천생연분이 아니라 “웬수”라는 단어가 튀어 나왔습니다.
할아버지는 다시 “아니, 네 자로 당신과 나와의 사이를 뭐라 하냐고?”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할머니 왈(曰) “아! 평생 웬수” 그러셨습니다. 그야말로 장안의 화제가 되었었던 장면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느 한쪽에서 복수의 칼을 갈며 참고 살아주고 어느 한쪽에서는 그것도 모르고 그야말로 권세와 행복을 혼자 누리고 사는 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할머니들은 평생을 절치부심(切齒腐心), 와신상담(臥薪嘗膽)하다가 할아버지들이 늙어서 노인이 되어 힘이 없어지면 그 때부터 할아버지들은 할머니들한테 구박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요즘처럼 급기야 노년층 이혼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결혼생활이라는 것이 어려우며 점점 더 어려워질까요? 연애할 때에는 하늘의 별도 따다 줄 것 같던 사람들이 왜 결혼만 하면 그렇게 견원지간처럼 변하게 되는 것일까요?
왜 부부는 가장 가까운 관계이면서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관계보다 더 많이 싸우게 되는 걸까요? 그 이유는 사람들이 결혼이 담고 있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 부부라는 관계는 가시적이고 표면적인 면 외에 다른 영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경이 결혼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서 그렇게 사람들이 결혼 생활에 많이 실패하고 있는 이유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처음 이야기하신 후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중간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본문의 이혼의 문제는 단순히 사람들이 결혼했다가 이혼하는 것이 맞느냐 틀리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은 지금 구약의 어떤 부분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계신가요? 얼른 생각나시는 책이 있으세요? 바로 신명기 24장의 말씀입니다.
<신24:1-4>
1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 2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그 후부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내었거나 혹시 그를 아내로 취한 후부가 죽었다하자 4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어보낸 전부가 그를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으로 너는 범죄케 하지 말지니라
바리새인들이 바로 모세 율법의 이 부분을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혼을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여부보다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곤경에 빠트리느냐에 더 관심을 두었습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헤롯왕이 본처를 버리고 동생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결혼을 했고 그를 비난하던 세례요한의 목을 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대답을 하신다 해도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릴 수가 있었습니다. 이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님께서 대답을 하시면 헤롯의 노여움을 사게 되는 것이고 이혼을 해도 된다고 말씀을 하시면 이스라엘의 랍비로서 이혼을 조장한다는 공격을 받을 판입니다.
지금 주님께 질문을 하는 바리새인들은 당시 둘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의 지혜의 두 축으로 힐렐파와 샴마이파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힐렐은 샴마이의 제자였지만 좀 더 개방적인 사람이었고 힐렐과 샴마이 학파의 두 축을 집대성한 철학의 칸트 같은 인물이 바로 사도 바울의 스승인 가말리엘이었습니다.
따라서 좀 더 개방적인 힐렐학파는 신명기 24장 1절의 이혼이 가능한 수치 되는 일을 여러 가지로 해석을 했었습니다. 그들은 아내가 남편에게 수치 되는 일을 하여 남편이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 줄 수 있는 경우를 이렇게까지 해석을 했습니다. 아내가 요리를 못하면 남편에게 이혼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웃집 여자보다 아내가 예쁘지 않은 것도 이혼의 사유가 되었고 남편 앞에서 시댁 욕을 하는 것도 이혼의 사유가 되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잔소리를 하거나 바가지를 긁어도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며 그 일로 여자들은 이혼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튼 힐렐 학파는 그렇게 신명기 24장 1절을 해석해서 두세 명의 증인만 있으면 어느 자리에서든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을 한 후 새 장가를 들었습니다.
반대로 보수적인 샴마이학파는 수치스러운 일은 오직 간음죄라고만 해석을 했습니다. 여자가 간음을 하다 들키면 남자가 이혼을 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그 어떤 경우에라도 이혼을 용납하지 않았었습니다. 힐렐학파는 예수님께 이 이혼에 대한 질문을 함으로써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이혼에 대한 자유에 확인 도장을 받고 싶었고 샴마이학파는 우리는 이렇게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자신들의 의를 자랑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주님께 질문을 하고 있는 타락한 죄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설명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신24:4>
4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어보낸 전부가 그를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으로 너는 범죄케 하지 말지니라
여기에 보면 성경이 이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마지막에 그 이혼이라는 것은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케 하는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이 어떤 땅입니까? 가나안입니다. 가나안은 어디를 상징하는가요? 바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결혼과 이혼에 관한 이야기는 단순히 남자와 여자가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창세기의 창조의 이야기를 가지고 대답을 풀어 가십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룬 것이므로 절대 나누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언뜻 보면 예수님께서 샴마이학파의 손을 들어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으로 가서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창1:26-27>
26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하시고 자기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즉 복수이시면서 단수이신 하나님,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함께 하시는 삼위 하나님께서 그 본질을 그대로 불어넣어 무엇을 만드셨는데 그것이 바로 남자와 여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이 땅에서 둘이 만나 행복하게 잘 먹고 잘살라고 만들어 놓으신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형상, 하늘나라의 본질, 사랑으로 똘똘 뭉쳐 여럿이 모여 있어도 하나인 하나님 나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의 유기체인 그 하늘나라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 우리 인간들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자 조금 더 들어보세요. 결혼이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더욱 더 확실하게 설명해 놓은 곳이 바로 에베소서 5장입니다.
<엡5:22-32>
22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24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28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31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남편들아 아내들아 서로 사랑하고 순종하라고 이야기 해놓고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바로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한 것이라고 정확하게 그 결혼의 의미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정이라는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교회가 한 몸이 되어 영원히 살게 될 그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배우며 완성해 나가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기를 주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같이 목숨을 바쳐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는 주님께서 하나님께 목숨을 바쳐 순종하신 것처럼 남편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게 정말 말 그대로 될 때 이 땅에는 천국 같은 가정이 생기게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죄의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타락한 본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언제나 성공적으로 그 결혼생활을 하나님 나라처럼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목숨을 바쳐 사랑을 하고 섬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실패가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의 장으로 이끌어 간다는 사실이 우리를 위로해 줍니다. 우리는 그렇게 실패할 때마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그 하나 됨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되는 은혜의 장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정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가정을 점차 작은 하늘나라로 만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빠진 부부생활, 가정생활은 언제나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겉으로는 행복해 보인다 할지라도 상대편 누군가가 희생을 하고 있는 것이지 그것이 정말 바람직한 행복한 가정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가정생활을 통해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절대 그 사랑과 순종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달아야 하는 것이며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하나 됨을 위해 죽으실 수밖에 없었다는 십자가의 현실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아담으로부터 모두가 죄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 때부터 죄인으로 났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고 그 분과 함께 동행을 했던 위치에서 그 분으로부터 쫓겨 난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인간들의 실존은 하나님과 이혼을 당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절대 가정을 하나님의 형상처럼 끈끈한 사랑으로 만들어 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절대 가정을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 만들어 낼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는 것이 바로 결혼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결혼은, 가정은 절대 자기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자기의 짐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결혼을 통해서 우리의 거룩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혹자는 결혼을 통해 자기가 지고 있는 짐을 상대방에게 넘겨주려는 의도에서 결혼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은 배우자가 자기 존재의 확장에 불과하기 때문에 배우자의 외양이나 학식이나 재산 등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배우자들에게 실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상대방을 이용해서 나의 욕심을 채우려는 자들은 그들의 욕심이 끝이 없기 때문에 절대 만족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자신의 욕심을 다 채워주지 못하는 상대방이 못마땅하게 여겨지는 것이고 결국 이혼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서로의 가슴을 찢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상대방이 뭔가 부족하고 상대방이 나를 괴롭히는 것을 성격차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손길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결혼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라고 했으니까 모든 상황이나 사건들을 영적으로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하면 사람 막대기, 인생 채찍을 동원하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거룩을 훈련하시기 위해 서로의 배우자를 막대기로 들어서 쓰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일이 있을 때에 성격차이라는 이유를 들어 갈라지려고 생각만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의 어떤 모난 부분을 둥글게 만드시려고 하는가를 먼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처럼 가정은 자기가 만족한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하면 함부로 깨버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시금석으로 삼아 그 돌맹이가 나를 긁으면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하며 점차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수준으로 자라가게 되는 것이 바로 결혼입니다. 주님께서 천국에서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다고 하셨지요? 왜 천국에는 부부가 없겠습니까? 왜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천국에 그 좋은 것이 없겠습니까? 천국에는 부부관계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땅에 그러한 관계를 만들어 놓으시고 우리를 그 관계 속으로 집어 넣으셨을 때는 무언가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단지 우리가 혼자 살면 외로워서 둘이 붙어서 재미나게 살라고 그런 관계를 허락하시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결혼은 천국에 있는 유일한 부부관계, 신랑인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의 관계를 배우고 추구하는 훈련의 장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남자들도 결혼을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고 자신들의 짐을 대신 지고 가줄 사람을 얻는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마저도 본문 10절에서 “그렇게 우리 맘대로 하지 못할 것이면 차라리 혼자 사는 게 낫습니다.” 하고 말할 정도입니다.
일견 맞습니다. 정말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자기의 필요만을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것이 결혼생활이라면 혼자 사는 것이 백번 낫습니다. 오죽하면 성경도 독신을 은사라고 이야기합니다. 바울도 결혼 안 할 수 있으면 안 하는 게 좋다고 합니다. 혼자 살면서도 정욕을 참아낼 수 있거든 혼자 살라고 합니다.
<고전7:7-9>
7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8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9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결혼이라는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서도 거룩을 배울 수 있는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결혼생활이라는 것은 힘이 드는 것이고 책임을 동반한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게는 죄의 속성이 남아 있어, 타락한 본성이 남아 있어 힘이 든 것입니다. 죄의 영향이 어떻게 가정에 영향을 미치는지 아세요? 성경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께서 여자를 저주하셨지요?
<창3:16>
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남편은 여자를 다스리려고 하고 여자는 남편을 사모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게 뭐가 저주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저주라 하십니다. 여기서 사모한다는 말의 원래 뜻은 “장악하다”라는 뜻입니다. 여자는 남자를 장악하여 좌지우지하려 하고 남자는 여자를 다스리려 하게끔 죄가 인간을 만들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매일 싸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모든 동화의 끝이 공주와 왕자의 결혼으로 끝이 나는지 아세요? 신데렐라, 백설 공주 다 왕자와 결혼 하는 것으로 끝나지요? 결혼 후의 그림까지 그려 놓으면 그 동화는 동화가 아니라 참혹한 비극으로 끝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모든 아름다운 동화는 결혼식 장면을 끝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죄인들에게는 예수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은혜를 깨닫고 우리가 이토록 추한 인간임에도 우리를 위해 목숨을 끊어가며 생명을 선물해 주신 그 사랑을 깨닫고 남편은 아내를 목숨 걸고 사랑해 보는 것입니다. 안되고 실패하면 다시 또 일어나서 사랑해 보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고 그 분은 목숨을 걸고 사랑을 하셨으므로 우리는 그 사랑에도 연합하여 사랑하는 자로 변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자는 목숨을 바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예수의 순종에 연합하여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실패하면 또 일어나서 자기 안의 그 예수를 확인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남편으로, 목숨을 걸고 순종을 하는 아내로 지어져 가면서 천국을 조금 맛볼 수 있는 것이 가정이고 결혼인 것입니다.
사랑하지 못하고 순종할 수 없을 때, 그런데 예수는 어떻게 이런 인간들을 사랑했고 목숨을 바쳐 순종을 했는가를 생각하며 깨달아 지거든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그 은혜를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우리는 변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면서 계속 예수께로 가까이 가게 되는 가정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알지 못하면 진정한 결혼의 의미를 모르고 하는 결혼생활은 불행하기 마련입니다. 아니면 어느 한쪽이 포기를 하고 겉으로는 평화롭지만 가슴속에 비수를 품고 살게 되는 슬픈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개그맨 김제동씨가 어느 방송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김제동씨에게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연상 연하 커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평생을 그 연하의 남편을 황제 모시듯 했다고 합니다. 밥상을 엎고 투정을 부리고 해도 그저 “예 예” 하면서 사시는 것이 너무 불쌍해서 어느 날 물었다지요? 도대체 어머님은 아버님을 얼마나 사랑하시기에 그처럼 수모를 겪고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사시냐고? 그랬더니 어머니 왈 “사랑은 무슨 사랑, 쟤 너무 어려서 그렇게 안 해주면 삐져”라고 하시더랍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잔인한 희생입니다. 그건 바람직한 결혼이 아니라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불행하게 사는 비극의 단면인 것입니다.
여러분, 행복한 결혼 생활을 원하세요? 예수를 아십시오. 예수를 배우십시오. 그리고 복음을 더 깊이 이해하십시오. 그리고 정말 행복한 결혼 생활을 원한다면 상대방의 배경을 보지 말고 상대방의 신앙을 먼저 살피십시오. 결혼은 상대방을 이용해 내 짐을 그 상대방의 어깨에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복음의 논리가 그대로 적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에는 십자가 진 사람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도 아내도 자기를 비워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십자가의 삶을 훈련해야 그 가정은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혹 다른 사람들의 부러운 평가를 받기 위해 남들이 부러워하는 상대방의 배경을 보고 결혼하면 우리는 그 즉시 불행해 집니다. 그 사람의 매력이라고 여겼던 그 부와 외모와 명예가 어느 날 사라졌을 때 우리는 절대 그 사람하고 살 수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벗겨 버리고 상대방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바로 서있는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가정의 목표는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잘생긴 외모도 아닙니다. 펄벅의 대지에 나오는 주인공 왕룽을 보십시오. 가난하게 부인 오란과 열심히 일하며 살 때는 그 오란의 쟁기를 든 큰 손이 너무 예쁘고 고마웠습니다. 그가 피난을 가서 어떻게 부자가 되고 나서 당장 그 오란의 큰 손이 너무 보기 싫어졌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래서 롄화라는 손이 작고 얼굴만 예쁜 첩을 맞아들이지 않습니까? 결혼생활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돈도 아니고 남편의 명예도 아니고 진실한 두 사람의 신앙인이 어떻게 이 땅의 것이 없이도 하늘나라를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느냐를 함께 고민하며 노력하며 살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탄생시키실 때 어떻게 하십니까?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옆구리를 통해 갈비뼈를 하나 꺼내셔서 여자를 만드십니다. 성경에서 잠잔다는 것은 무엇을 metaphor한다고 했지요? 죽음입니다. 여자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남자가 죽고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쏟고 갈비뼈를 꺼내 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죽으시고 교회가 탄생했듯이 한 가정이 바람직한 그리스도 안의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죽음을 방불하는 남자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창조 때부터 이미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어서 아담이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었다고 기록합니다. 아담이 부모가 어디 있었나요? 하나님께서 최초의 결혼을 이렇게 묘사하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아담과 하와의 결혼은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죄인인 하나님의 백성과 연합하여 한 몸이 되어 그들의 삶을 자기에게 전가시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또 자신의 삶을 그들에게 전가시키셔서 살려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설명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없었던 아담의 결혼에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하나가 된다는 예수님과 교회간의 복음의 메시지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결혼을 통해서, 가정을 통해서 그 사랑과 희생과 순종의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구현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미 이혼한 분들은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혼하신 분들은 절대 주눅들 필요 없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과 이혼한 자들입니다. 예수가 없이는 절대 가정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 낼 수 없는 죄의 옛 몸을 갖고 있는 자들, 스스로는 어쩔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이제 예수만을 의지하여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되면 그 때는 이 성경의 원리를 적용하여 끝까지 참아 주고 순종하며 목숨 걸고 사랑해 보면 되는 것입니다.
아슬아슬하게 겨우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 이제 복음을 알고 그 고귀한 결혼의 의미를 알았으면 그렇게 살아내십시오. 우리의 가정을 보고 하나님 나라를 보는 자들이 있게 만드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예수의 은혜에 너무 감사해서, 예수님이 원하시는 게 뭔지 잘 알고 있으므로 그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도 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땅에서는 이혼한 자로, 혹은 이혼은 안 했지만 마지못해 사는 자로 이렇게 서 있지만 지금 복음을 아는 여러분은 하늘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 결혼을 한 자들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그 신분에 맞게 이 땅에서도 가정에서 그런 모습 보이면서 살아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혼을 계획하고 있는 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으로 끝내겠습니다.
<고전7:10-16>
10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11(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12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13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14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15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16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그리스도인은 어떤 문제로, 성격차이, 경제문제 그런 것으로 절대 이혼 할 수 없습니다. 이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신앙의 문제, 하나님을 섬기는 문제로 남편이나 아내가 방해가 되고 그들이 먼저 이혼을 요구하거든 이혼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여운을 남깁니다. “혹시 네가 네 남편이나 네 아내를 구원하게 하기 위해 거기에 보내진 사람인지 어떻게 아느냐?”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결심한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가까운 이웃인 아내를, 남편을 나 몰라라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 사랑하십시다. 그것은 권면이 아니라 우리의 책임이며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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