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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시니어 문학상 대상
뒤로의 여행
(삶은 주문을 외우며 헤쳐 나가는 가시덤불)
김영관
그가 말했다. 걸을 수 있을 때 가 보고 싶은 곳을 가보지 못하고, 먹을 수 있을 때 먹고 싶은 걸 먹지도 않았는데 이루어 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어 크게 후회된다고,…… 병원 병상에 누워 토하는 지인의 넋두리가 칠순의 모자를 눌러쓴 나의 가슴에 음각처럼 새겨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생각했다. 나는 나중에 어떤 후회를 하게 될까? 버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는 겨울밤거리를 내다보며 결심했다. 내 삶의 흔적을 기록해보자고.
며칠 고민 끝에 ‘뒤로의 여행’을 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시련의 연속이었던 내 삶을 알몸으로 보여주기가 부끄러워 망설이자 마음 한구석에서 용기의 용트림이 일었다. 이 세상에 똑같은 얼굴이 없듯이 똑같은 삶도 없다고, 내가 새긴 나이테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존재라고, 무엇보다도 시간이 내 편이 아니라는 가슴의 외침이 컸다.
여행 방법은 나만이 탈 수 있는 기억 열차를 타고 현재를 출발 나만이 드나들 수 있는 어머니 기록관으로 가서 고난의 연속이었던 삶을 찬찬히 되새겨보고, 반환점을 돌아 나의 길은 가정을 이룬 이후부터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오기로 했다.
기억 열차는 빨랐다. 어머니 기록관이 가까워지자 먼저 어머니가 걸어온 길이 산모퉁이를 돌아 보이는 철길처럼 길게 다가왔다. 길은 한눈에도 험했다. 좁고, 가파르고, 바닥에는 울퉁불퉁 돌멩이가 지천이었다. 문득 의문이 생겼다. 어린 사형제를 태운 수레를 끌고 어떻게 저 험한 언덕길을 걸어왔을까?
잠시 숨을 고르고 기록관 안으로 들어섰다. 첫 번째 방은 병원중환자실이었다. 매캐한 소독 냄새가 몸과 마음을 짓뭉갰다. 병상으로 어정어정 걸어가 어머니를 내려다봤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에 깊은 주름이 한가득 힘겨운 삶을 견디어온 걸 대변해주고 있었다. 눈을 감고 꼬챙이 다리를 주무르자,
“인제 그만 가면 안 좋게나.” 자식의 온기를 느낀 어머니의 신음 넋두리가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이 순간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自愧感)이 쓰나미처럼 밀려드는데 어머니는 또 자책이시다.
“잘 가르치지도 잘 먹이지도 못했는데, 고생만 시킨다.” 라고 어머니 침상에 얼굴을 묻는데 얼마 전 병원을 오기 위해 집 비우던 날의 영상이 아리게 돌아갔다.
“불은 다 껐나, 물은 잠그고,” 자동차 문을 닫지 않고 주문 외우시던 어머니는 급기야 차에서 내리셨다. 왼쪽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데다 시도 때도 없이 앙탈을 부리는 두 무릎을 지팡이로 겨우 달래며 부엌으로 간 어머니는 행주와 걸레를 갖고 나와 빨랫줄에 널며 말했다.
“며칠 비우면 곰팡이 핀다고,” 그리곤 언덕 위 밭에 널브러져 있는 땔감인 빈 깻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일 비 올 것 같으니 창고에 넣으라고.” 그 깻단은 겨우내 눈비를 맞아 반쯤이나 썩은 것이었다. 깻단이 다 옮겨질 즈음 어머니는 또 장독대로 가셨다. 멸치젓 항아리 뚜껑을 열고 검지로 젖 장을 찍어 쩝쩝 입맛을 다시곤 혼잣말을 항아리에 담았다.
“올해 김장은 정말 맛있겠다.”
이런 행동을 낱낱이 내려다보던 집 뒤란 감나무에 터를 잡은 까치 부부가 우듬지에 부리를 닦으며 반복해서 물었다.
“며칠 있다가 오실 거죠?” 까치 물음에 감나무 올려다보는 어머니 눈가에 이른 봄볕 한 점이 반짝거렸다. 오전 내내 씨름 끝에 병원으로 출발한 어머니는 뒷좌석에 꼿꼿이 앉자 거르지 않던 낮잠도 잊으시고 눈 카메라로 스쳐 지나는 산천을 찍고 있었다.
병원에 온 지 보름 만에 담당 의사의 호출을 받았다.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준비를,…… ” 순간 삼천 볼트의 전류가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 쫙 흘렀다. 한평생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잠 한 번 편히 자지 못하고, 오로지 자식을 위해 한 몸 불사른 그 어머니가 지금 이 세상의 공기를 마시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단다. 청천벽력에 칠월 가뭄의 쩍쩍 갈라지는 논처럼 목이 탔다. 모든 것이 보기 싫었다. 푸른 나뭇잎들이 미웠다. 흰 꽃, 붉은 꽃잎들은 볼 성 사나웠다.
온통 세상이 뒤바뀌는 것 같았다. 바뀌는 세상을 보고 싶었다. 옥상으로 올라갔다. 올려다보이는 것도 내려다보이는 그 무엇도 변한 것이 없었다. 오가는 자동차 행렬은 여전히 꼬리를 물고 빌딩 사이로 바쁘게 오갔다. 세상은 모두 그대로인데 나만 망망대해에서 폭풍우를 만나 난파된 배를 타고 한줄기 불빛을 갈망하는 신세였다. 하염없이 추적거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다 막막함에 눈을 감자 최근 삼 년간의 어머니의 모습이 엉금엉금 걸어오며 나를 후회의 늪으로 잡아끌었다.
미수의 어머니는 거동이 힘겨운 상태에서 경주 산내 산골에서 홀로 기거하고 계셨다. 슬레이트 지붕의 방은 겨울이면 전기장판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덮는 이불만 세 개를 보태 겨울을 나던 어머니였다. 한 달에 서너 번 찾아가 한 끼 밥을 같이 먹고 몇 푼의 돈을 마른 풀잎 같은 손에 올려주면 어머니는 머릿속 가계부를 꺼내 읽으셨다. 지난번에 주고 간 돈으로 수도세, 전기세, 유선 세, 전화세, 나 약 조금 사 먹었다. 그리곤 덧붙이는 말은 매번 똑같았다.
“돈을 너무 많이 써 미안하다.”
겨울 어느 날이었다. 점심시간에 맞추어 산내에 도착했다. 내 손으로 밥을 지어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전기밥솥을 열었다. 밥솥에 밥이 반 이상이다. 한눈에 봐도 풀기가 없었다.
“언제 한 밥이요?” “어제 아래” 어머니는 이틀을 먹었는데 며칠은 더 먹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지 말고 때마다 따뜻한 밥을 해 먹으소,” 그러자 어머니는 잠시 잠깐 나를 쳐다보시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수도가 얼어 물이 안 나온다.” 어머니는 요 며칠 동안 주전자를 들고 약 오십 미터 떨어진 이웃집에서 물을 떠 와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을 떠 오는 일이 너무 힘이 들어 며칠 먹을 밥을 한꺼번에 짓는다는 설명이었다. 걷기가 힘겨운 어머니에겐 이웃집이 십 리 산길이었음을 난 모르고 있었다.
그 어머니가 기어이 구름사다리를 타고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셨다. 봄비가 질척거리는 날이었다. 암울한 시대에 여자 홀몸으로 사 형제를 키워 낸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어머니의 나이 91세였다. 2010년 4월 18일 어머니의 인생 종착역 도착 일력日曆이 삭풍에 시달려온 조락처럼 구겨져 비에 젖고 있었다. 그동안 나의 모든 행동들은 후회투성이고 갚을 수 없는 빚이었다. 어머니 은행은 핏줄이라는 담보에 은행자산 전부를 대출하고도 빚 독촉 한 번 하지 않으셨다. 은행이 파산하도록 나는 원금 한 푼 갚지 않은 나쁜 채권자였다.
눈을 감았다. 까만 허공 무대에선 삼십 대에 홀로되어 유복자(遺腹子)까지 사 남매를 키워야 했던 어머니의 생의 기록이 기억영상물레에서 실처럼 풀려나오고 있었다. 영상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강물에 씻긴 오석烏石처럼 선명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 내 나이 여덟 살이었다. 막냇동생은 어머니 뱃속에서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엄마는 종잇장처럼 구겨진 삼베 치마저고리에, 머리엔 새끼줄을 동여매고, 온몸을 대나무 지팡이에 의지 짚신을 끌며 근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비틀 상여 뒤를 따르고 있었다. 며칠 동안 짜낸 탓인지 목에서 게워내는 울음소리는 처량했다. 동네 사람들이 눈물을 훔치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홀몸으로 저 어린 것들을 어찌 키우노” 나는 그 중한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상여가 구불구불 아랫마을 앞을 지나 작은 개울을 건너 가파른 황토 언덕을 올라가자 나는 저만치 떨어져 어기적거렸다. 누군가가 나의 손을 끌어 상여 뒤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밀어 넣었다.
그날 이후 체험으로 조금씩 깨달아갔다. 엄마가 푸성귀 가득 담은 함지박을 머리에 얹고 하루 두 번 읍내 십 리 장을 갔다 와야 보리밥을 먹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엄마의 손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고, 손톱은 문드러지고 까만 얼굴 가득 주름은 나날이 깊어졌다. 허리는 수태골 비탈밭 잡초가 휘어잡아 초승달을 닮아갔다. 그 허리로 깨밭에서 긴긴 여름 해와 씨름 할 때 하얀 깨꽃이 무리 지어 위로했지만, 엄마의 신음 한숨은 깊어만 갔다. 보리가 패기 시작하면 우리 집은 때를 걸려야 할 때가 다반사였다.
초등학교 삼학년 초여름이었다. 하교 시에 내일 도시락을 싸 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나와 반 친구들은 환호했다. 선생님은 야외 교장인 뫼 등에서 도시락을 먹을 거라고 설명해주셨다. 당시 6, 25전쟁으로 학교 본 건물은 군인들이 막사로 쓰고 우린 공동묘지 옆 산자락에 다닥다닥 지은 판자 교실에서 수업할 때였다.
책 보따리를 풀어 마루에 던지고 저수지 위 골짜기 끝에 있는 우리 밭으로 뛰었다. “엄마……,엄마.” 콩밭에서 유월의 뙤약볕을 휜 등줄기로 받아내던 엄마는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당당했다. 화장실도 가지 않는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세상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에 나는 엄마 앞에 턱 버티고 서며 말했다.
“엄마, 선생님이 내일 도시락 싸 오래 도시락” 그제 서야 엄마는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곤 칭얼대는 동생을 내 등에 올려주며 힘없이 말했다.
“동생 업어 재우고 책 좀 읽어라.”
난 잠을 설쳐 꿈도 꾸지 못했다. 타다…… 타. 아궁이 불 지피는 소리에 부엌 봉창 문을 밀었다. 엄마가 도시락 싸는 걸 보고 싶었다. 문턱에 턱을 괴고 기다리길 한참 까만 솥뚜껑이 열리고 하얀 김이 솟아오르자 풍기는 냄새에 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느 밥 냄새와는 달랐다. 구수하고 달콤했다. 솥을 들여다봤다. 이 밥이 누런 보리밥 한가운데 보석처럼 빤짝이고 있었다. 그 시절 이밥은 조상제사 때나 명절 때 어쩌다 맛보는 밥이었다. 엄마는 내 도시락에 이밥을 담고 남은 보리밥으로 밥그릇 네 개를 채우자 솥엔 더는 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린 사형제였다. 엄마는 솥에 물을 부어 나무 주걱으로 휙휙 저어 멀건 숭늉으로 엄마 밥그릇을 채웠다. 아침 밥상에서 엄마는 숭늉 그릇에서 사금 고르듯 보리 밥알 건져 올려 숟가락 꽁무니로 날된장을 찍어 오물거리며 허겁지겁 밥 먹는 우리를 쳐다보는 눈빛이 애잔했다.
나는 계란 반숙이 얹어진 도시락을 책 보따리에 싸며 오직 친구들과 함께 도시락을 까먹을 생각만이 머리를 채우고 있었다. 산 고개를 넘으며 나는 깡충깡충 신나했다. 두 아이를 키우며 깨달았다. 그날 엄마는 한 술도 뜨지 못한 빈 가마니 배로 산비탈 밭에서 긴긴 여름 해를 서산으로 밀어 넘긴 고난(苦難)을, 나의 그 추억은 가슴속 멍울이 되어 세월 따라 커져만 갔다.
이어지는 영상은 동짓날이었다. 밀기울 수제비로 배를 채우고 잠을 잤다. 으스스함에 잠이 깼다. 얇은 이불로 몸을 말아 문풍지 틈새로 들어오는 얼음 바람을 막으며 코를 골고 있어야 할 엄마가 없었다. 나는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귀를 쫑긋거렸다. 웅얼거리는 소리가 가늘게 들렸다 끊어지길 반복했다. 이불을 어깨에 걸치고 방문 앞으로 기어갔다. 황소바람 드나드는 문틈에 외눈을 박고 밖을 내다봤다.
엄마였다. 희뿌연 달빛 아래 장독대 뚜껑 위에 팥죽 한 그릇과 정한 수 한 사발을 올려놓고 초승달 허리를 활처럼 휘었다가 펴기를 반복하며 두 손을 비비고 있었다. 아마도 정한 수는 꼭두새벽에 아랫마을 가는 길 언덕 아래에 있는 우물에서 떠온 것이라 짐작이 되었다. 팥죽은 봄부터 여름내 싸리나무 울타리에서 키운 팥 한 종지를 엄마만이 아는 장소에 보관해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자식들 무병장수하게 하여주시고, 세끼 밥 따뜻하게 먹게 하여주시고, 많이 배우게 해주시고.” 엄마는 차가운 새벽바람과 맞서며 자식들만은 어둠보다 더 까만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머리에 하얀 이슬이 방울방울 맺히고 있었다. 아랫마을에서 닭 우는 소리가 찬 공기를 가르며 달려오고, 옆집에서 쇠죽 끓이는 시큼한 내음이 담장을 넘어 내 코로 들어왔다. 나도 빌었다. 엄마의 시린 손이, 휜 허리가, 굳어지기 전에 기도가 끝나기를,……
그날의 그 기억은 가정을 이루면서부터 동지는 나에겐 특별한 날이 되었다. 동지가 다가오면 아내가 묻는다.
“올해도 팥죽을 끓여야 하느냐고?” 나는 가슴속 멍울을 만지며 고개를 끄떡인다. 아내가 다시 따지듯 되묻는다. “팥죽 먹을 거냐고,” 나는 또 고개만 끄떡인다. 아내는 입을 삐죽거리며 팥을 팍팍 힘주어 씻었다. 내가 팥죽을 좋아하지 않다 보니 며칠 동안 팥죽을 먹어야 하는 아내로선 팥죽 끓이는 걸 싫어하는 건 당연지사였다. 나는 매년 동짓날에는 어김없이 아내의 불만을 흘려들으며 아내가 팥죽을 끊이는 동안 나 혼자의 기도는 길고 간절해졌다.
다음으로 풀려나온 기억 필름은 화장실 청소 당번이었다. 초등학교 사학년 가을이었다. 종례 종이 울리자마자 나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화장실은 지저분했다. 청소에 필요한 물도 교실 세 개를 지나쳐 가야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압감을 주는 건 청소 후 선생님의 검사를 받아야 집에 갈 수 있었다.
숨 가쁘게 청소를 끝냈다.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서산 위에서 노을을 만들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낮에도 귀신 나온다는 공동묘지를 지나 산 고개 두 개를 넘어야 했다. 기다리는 선생님은 교무실에서 나오시지 않았다. 나는 안절부절 교무실 앞까지 갔다 되돌아오기를 몇 번 그러다 생각했다. 어두운 밤에 홀로 공동묘지와 산 고개를 넘는 것과 교무실 문을 미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무서운지,…… 그래도 밤중에 공동묘지와 산을 넘는 것이 더 무서울 것 같았다. 마음을 다잡았다. 교무실 문을 열고 주뼛주뼛 거리며 선생님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서야 선생님은 생각났다는 듯 집에 가라는 손짓을 했다.
학교를 벗어나자 노을 속으로 어둠의 띠가 사바나 강을 향해 가는 누우 무리처럼 길게 얼룩지고 있었다. 웅긋쭝긋 솟아있는 공동묘지를 지나면서부터 나는 울음과 숨을 동시에 턱에 걸었다. 어스름한 묘 사이사이에서 근방이라도 도깨비 불빛이 내 앞을 스치고 지나갈 것 같았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동생들도 보고 싶었다.
첫 번째 산 고개를 넘는데 사방이 온통 까맣게 물들고 있었다. 밤마다 돌을 던진다는 늑대들이 이쪽저쪽 숲속에서 나와 앞을 가로막을 것 같았다. 고무신은 어디로 갔는지 맨발에 돌부리가 밟힐 때마다 휘청거렸다. 두 번째 산 고개에 도착하자 까맣게 덧칠을 한 나무들은 기기묘묘한 형상으로 나를 위협하고 있었다. 길 양쪽에 빽빽이 늘어선 소나무들은 열병식을 치르는 군인들로 변해있었다. 거총을 한 군인들 사이를 빨리 벗어나고 싶었지만 다리가 움직여 주지 않았다. 울음소리도 목안에서 맴돌았다. 몽당 빗자루 귀신이 나온다는 뫼 등을 지나다 오금이 저려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꿈을 꾸는 것처럼 호롱불이 다가왔다. 엄마였다. 빤짝이는 별이 보였다.
뒤이은 영상은 고난에 맞선 엄마와 나의 전학증에 관한 이야기였다. 오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자식들 잘 먹이고 공부시켜 보겠다는 일념으로 비탈 밭을 팔아 부산 달동네 판잣집 방 한 칸을 얻어, 출발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뒷산에서 첫 번째 산 고개를 넘는데 사방이 온통 까맣게 물들고 있었다. 밤마다 돌을 던진다는 늑대들이 이쪽저쪽 숲속에서 나와 앞을 가로막을 것 같았다. 고무신은 어디로 갔는지 맨발에 돌부리가 밟힐 때마다 휘청거렸다. 두 번째 산 고개에 도착하자 까맣게 덧칠을 한 나무들은 기기묘묘한 형상으로 나를 위협하고 있었다. 길 양쪽에 빽빽이 늘어선 소나무들은 열병식을 치르는 군인들로 변해있었다. 거총을 한 군인들 사이를 빨리 벗어나고 싶었지만, 다리가 움직여 주지 않았다. 울음소리도 목 안에서 맴돌았다. 몽당 빗자루 귀신이 나온다는 뫼 등을 지나다 오금이 저려 결국, 주저 않고 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꿈을 꾸는 것처럼 호롱불이 다가왔다. 엄마였다. 빤짝이는 별이 보였다.뻐꾸기 울음소리가 한낮을 알리자 엄마는 밭고랑 끝에서 흙을 툭툭 털며 오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막냇동생을 업고 커다란 소나무가 있는 오대조 할아버지 뫼 등으로 따라갔다. 엄마는 머리에 두른 누런 무명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고, 바가지에 싸 온 보리밥을 따로 덜어주며 말했다.
“큰아버지 큰어머니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라.” 보리밥 한 숟가락을 입에 넣으며 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학교 졸업 때까지 큰아버지 집에서 지내기로 했지만 동작이 느리고 눈치가 없어 가끔 큰아버지로부터 꾸중을 들어야 했다. 그때마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빨리 부산으로 가고 싶었다. 우는 날이 많았다. 기회 있을 때마다 기별했다. 데려가 달라고,……
드디어 육학년 1학기를 마치고 전학을 가게 되었다. 부산으로 떠나던 날 큰어머니는 책 몇 권을 싼 검정 보자기 매듭 끝에 박 바가지 세 개를 달아 주시며 일렀다. 도회지에선 물바가지가 귀하니 바가지가 깨어지지 않도록 꼭 옆에 붙어있으라고.
담임선생님은 반 친구들을 데리고 여객선 부두까지 나와 교가도 불러주고 잘 가라는 작별인사로 반 친구 한 사람 한 사람 손도 잡도록 해주셨다. 몇몇 친구들은 낯선 곳으로 가는 걱정스러운 내 마음과는 달리 도청 소재지인 부산으로 전학 가는 걸 부러워했다. 선생님과 반 친구들이 돌아가자 통영에서 부산 집까지 데려다주기로 한 오촌 당숙은 보따리를 잘 지키라는 말을 남기고 길 건너 술집으로 가셨다.
나는 보따리에 앉아 있는 것이 지루했다. 여객선 부두는 사람도 많고 구경거리도 많았다. 주위 구경에 한걸음 한 걸음 빠져있을 즈음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했다. 승선 차례 줄을 서려는 사람들이 한곳으로 몰려 갑자기 부두는 소란스러워졌다. 오촌 당숙이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얼굴에 술기운이 완연한 당숙이 물었다. “보따리 어쨌어?,” 보따리가 없었다. 누군가가 가져간 것이 분명했다. 승선표 검사는 시작되고 오촌 당숙은 주위를 살피다 혀를 껄껄 차며 나의 손을 끌고 여객선에 올랐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 보따리 속에는 나의 전학 증명서가 들어 있었다는 걸,
통신시설이 열악한 당시엔 전학증을 잃어버리면 다시 전학증을 발급받아 와야 했다. 하지만 엄마는 엉덩이도 다 얹지 못하는 난전 계단에 올망졸망 채소를 담은 함지박을 놓고 오르내리는 발길에 애원의 눈길을 주며 종일 앉아있었지만 우린 끼니를 거르는 일이 많았다. 엄마는 쉬는 날이 없었다. 감기몸살로 몸을 가누기 힘들 때도 쉬면 자리를 빼앗긴다며 그곳을 지켰다. 가끔 엄마는 늦은 저녁 밥상 앞에서 한숨 섞인 넋두리로 나를 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달리 방도가 없었다. 나는 이침이면 판자로 얼기설기 엮은 대문 안에서 산동네 아이들이 왁자지껄 등교하는 모습을 문틈으로 내다보고 있어야 했다.
삼 개월이 훌쩍 지나고 나뭇잎이 물들기 시작하자 엄마는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 난전 계단에 놓아야 할 함지박을 부뚜막에 놓아두고 아침 일찍 여객선을 타고 통영 충렬초등학교로 가셨다. 엄마는 전학증을 발급받아 우리가 잠든 늦은 밤에 돌아오셨다. 나는 부산 남부민 초등학교에서 졸업할 수 있었다.
다음 영상실 앞에서 난 한참 동안 주춤거렸다. 내 운명의 갈림길 이야기였다. 열네 살 때였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에 진학을 못 한 나는 아침 일찍 난전에 장사 가신 엄마 대신 동생들을 돌보고 있을 때였다. 머릿속에 돌덩이가 짓누르는 것 같아 힘겹게 눈을 떴다. 병원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누워 있는지 의아했다. 간호사가 이마를 짚으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제 적산가옥 지붕에서 떨어진 기왓장에 머리를 맞아 아스팔트 길에 쓰러져 있는 나를 지나던 군인이 업고 병원으로 왔다는 것이었다.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강한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그날따라 막내가 낮잠을 길게 자고 있었다. 갑자기 적산가옥 일 층에 있는 만화방 가게 유리문에 붙은 만화 그림이 보고 싶었다. 그 적산가옥은 삼층으로 다가구가 거주하고 있는 낡은 건물이었다. 비가 올 것 같아 빨리 만화 그림을 구경하고 돌아올 욕심에 나는 신작로를 뛰었다. 숨을 몰아쉬며 만화방 유리문 앞에 서서 그림 두 장을 본 것까지가 기억의 끝이었다. 그런데 묘했다. 가만히 눈을 감자 꿈속 같은 기억 한 점이 가물가물 거렸다.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볼 수도 없었지만 웅성거림 속에서 한마디 말이 아침 호수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처럼 귀에 닿아다 멀어지길 반복했다.
“역시 군인이 최고네,”
일주일이 지났다. 머리 상처도 나아지고 어지럼증도 회복되었으나 왼쪽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은 며칠 지나면 서서히 나아질 거라며 퇴원을 허락했다. 집에 온 나는 열흘이 지나도록 앉은뱅이였다. 바깥출입이 불가능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난전 계단 귀퉁이를 지켜야 하는 엄마에게 내 다리마저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었다.
엄마는 어느 비 오는 날 나를 업고 수소문해둔 부평동에 있는 침술원을 찾아갔다. 집에서 침술원까지 약 한 시간이 걸렸다. 낡은 우산을 내가 받쳐 들었지만, 엄마와 나는 머리 부분만 빼고 비에 흠뻑 젖었다. 침술원 미닫이문을 밀 던 엄마는 멈칫 안으로 들어서지를 못했다. 꽤 넓은 다다미방엔 배에 대침을 꽂고 누워 있는 환자가 빽빽했다. 그들이 숨을 쉴 때마다 긴 침 머리가 나룻배의 노처럼 끄떡끄떡 거렸다. 두 번째 방의 미닫이문을 밀었다. 그 방에는 더 놀라운 광경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손에 침을 꽂은 사람, 발에 꽂은 사람, 무릎에 꽂은 사람, 머리에 꽂은 사람, 등등이 저마다 편한 자세를 취하기 위해 들고, 뻗고, 엎드리고, 기대고, 있었다. 나는 겁이 나 도망치고 싶었다. 엄마는 완력으로 나를 잡아끌며 진료실이 있는 방으로 건너갔다. 몇 사람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침술사는 나의 눈에도 혈색이 좋고 풍채가 뛰어난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내 앞 남자환자의 코에 한 뼘이 넘는 긴 침을 밀어 넣곤 침 머리를 비볐다. 남자의 코에서 검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죽은피’라는 할머니 말대로 피 색깔이 검은색이었다.
내 차례였다. 엄마의 자초지종을 듣자마자, 할머니는 나의 왼쪽 다리를 몇 번 움직여보시곤 내 머리를 당겨 손가락 뼘을 재가며 머리 위에 지구본을 그리듯 둥글게 침을 놓았다. 침을 찌르곤 침 머리를 비볐지만 겁먹은 것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머리에서 시작한 침은 목, 허벅지, 무릎, 복사뼈 순으로 관절 부분에 원을 그리며 침을 놓았다. 그리곤 발등에 두 개의 침을 꽂아두고 발가락 사이사이에 침을 놓기 시작했다. 넷째 발가락과 새끼발가락 사이에 침을 찌르는 순간 아픈 통증에 나도 모르게 왼쪽 다리가 꿈틀하고 움직였다. 주위 사람들 감탄의 소리가 터지고 할머니가 활짝 웃으시며 나를 놀리셨다.
“네 이놈 쌀 한 섬 지고 와야 한다.”
할머니는 엄마에게 당부하셨다. 기가 통했지만 육 개월은 매일 침을 맞아야 한다고, 열흘이 지나자 지팡이에 의지 혼자 침을 맞으러 갈 수 있었다. 침을 맞기 시작 한지 삼 개월이 지나자 나는 지팡이 없이도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몇 가지 문제는 세월이 흘러도 나아지지 않았다. 높이뛰기를 할 때나 돌다리를 건널 때는 오른발보다 왼발이 한 뼘 이상 거리가 부족했다. 다리 위나 좁은 길을 걸을 땐 왼발의 중심이 불안해 휘청거릴 때가 많았다. 정강이 굵기도 왼쪽이 확연히 얇았다. 인체의 세포는 칠 년마다 재생된다고 하지만 성장기인 열네 살 때 약 20일간 왼쪽 다리를 움직이지 못한 나는 기능에서 평생 큰 차이를 안고 살아야만 했다.
운명의 갈림길에서 회생한 난 철없이 지내다 어른이 되자 마음 한구석이 늘 무거웠다. 한평생을 살아가려면 누군가와 도움을 주고받으며 사는 것이 공동체 사회라지만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을 오랫동안 알지도 못하고 있다는 건 마음의 짐이었다. 신문방송에서 사람의 생명에 대한 극적인 일들을 읽고 들을 때마다 나는 떠 올렸다. 피를 흘리며 길에 쓰려져 있는 나를 누구도 섣불리 구원의 행동에 나서지 못할 때 군복에 피를 흥건히 적시며 나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간 그 군인은 어떤 사람일까, 그리고 앉은뱅이에서 나를 이렇게 걸을 수 있게 해준 할머니의 얼굴도 모르고 살아왔다는 건 이유 불문 부끄러운 일이었다.
어머니 장례를 치른 며칠 후 유품을 정리하는 날 종일 봄비가 질척거렸다. 유품을 정리하다 어머니 속곳 주머니 두 곳에서 육만 삼천 원이 나왔다. 먹먹함에 허공을 올려다보는데 어머니 속곳에 관한 추억이 스멀스멀 다가왔다. 어머니는 명절 때 손주들의 세배 자리에서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곤 했다. 속곳 주머니에서 꺼낸 꼬깃꼬깃 꾸겨진 돈을 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언제가 한 번은 미리 봉투를 만들어 드렸는데도 자기 돈을 줘야 잘 산다며 세배를 끝낸 손주들을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게 했다. 속곳 주머니에 대한 어머니의 애착은 남달랐다.
어머니는 예외 없이 속곳에 주머니를 달았다. 주머니는 특색이 있었다. 속곳과 색상이 다르고 주머니 입구를 좁게 만들어 엄지와 검지를 이용하지 않으면 빠져나오지 못하는 구조였다. 속곳을 갈아입는 걸 본 적이 있다. 먼저 입고 있는 속곳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갈아입을 속곳 주머니에 돈을 넣고 나서야 옷을 갈아입으셨다. 속곳을 보자기에 싸며 깨달았다. 홀로 어린 사 남매를 키우며 받은 돈의 서러움을 속곳 주머니에 넣고 삭히고 삭힌 걸,……
그날 이후 나는 봄비가 내리는 밤이면 어머니 생각에 베개 뒤척이는 날이 많아졌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빗줄기로 창 두드리며 나무라시는 것 같았다. ‘어제는 지나간 나의 일이니, 오늘 너의 숙제나 잘하라고.’
뒤로의 여행도 반환점을 돌아 나의 길로 접어들었다. 1973년이었다. 막냇동생이 대학에 가고 싶어 했다. 어머니의 능력으로는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동생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결론은 등록금은 내가 마련하기로 하고, 생활비는 동생이 아르바이트로 충당하기로 했다.
동생이 인천에 있는 모 대학에 입학했다. 한 학기를 마치고 나를 찾아왔다. 형색에서 고생의 티가 역력했다. 방값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건설현장에서 일용직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마음이 아팠다. 직장동료 두 사람에게서 돈을 빌려 등록금을 손에 쥐여 주며 힘주어 말했다.
“학비는 걱정하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라.” 나는 축 처진 동생의 어깨를 부추겨 주려고 허세를 부렸지만, 마음의 짐은 무거웠다. 어떻게 하면 매달 몇 푼이라도 저축할 수 있을까, 하고 머리를 굴렸다.
때마침 모 일간지에 제목이 ‘맑은 샘물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의 월간 문예지에서 개인 대리점을 모집하는 광고에 눈이 갔다. 먼저 직원 중에서 구독자를 생각했다. 직원이 사십 명 정도였는데 숫자가 매일 매일 늘어났다. 어제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안 되리라 판단했지만, 오늘은 억지 논리를 만들어 가상 구독자를 만들다 보니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었다. 며칠을 고민하다 이십오 권은 충분히 소모하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첫 달이라 보수적으로 숫자를 조정 이십 권을 신청했다. 책이 도착했다. 책을 신청할 때의 마음과는 달리 막상 직원들에게 구독을 요청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권하면 이유 불문 구독을 신청하고 적극적으로 책을 홍보해주리라 믿었던 동료의 말은 의외였다.
“이런 책 아무도 안 본다.” 그 말은 겨우겨우 나를 떠받치고 있던 용기의 지게 지팡이를 쑥 빼버리는 것 같았다. 보름이 넘도록 나는 열 명을 채우지 못했다. 나는 동생과 생각나는 친구와 친척들에게 우편으로 책을 보냈다. 그러나 앞으로가 더 문제였다. 최소한 육 개월은 책을 공급받기로 우편으로 약속이 된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부업으로 돈을 벌어 보겠다는 내 생각은 적자를 볼 수밖에 없었다.
육 개월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동생의 편지를 받았다. 무거운 마음으로 봉투를 뜯었다. 자신이 등록금 마련을 위해 여러 가지 잡부 일을 가리지 않고 해보았으나 어려웠다는 내용이었다. 며칠 밤잠을 설치며 머리를 쥐어짰다. 그러다 문득 묘안? 이 떠올랐다. 아내의 패물을 전당포에 맡기기로 했다.
때마침 집사람이 친정에 가고 없었다. 서랍을 열었다. 결혼 때 해준 금반지와 금목걸이가 전부였다. 우리 집 유일의 유동자산인 금붙이를 작은 보자기에 쌌다. 지역이 면 소재지라 혹시 전당포 골목 앞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전당포 인근 큰길에서 잠시 사방을 살펴보고 빠른 걸음으로 골목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하리라는 나의 기대와는 달리 전당포라는 붉은 글씨의 간판 위에 켜진 백열등 불빛은 내 발등까지 훤히 비추었다. 전당포의 창문은 특이했다. 콘크리트 집 벽에 작은 봉창 같은 구멍을 뚫어 그곳에 유리문을 달아 밖에선 안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안에선 밖을 확인할 수 있는 구조였다. 손바닥만 한 창문이 열리고 마중 나온 손에 보자기를 건넸다. 안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느릿느릿 흘러나왔다.
“이자는 얼마이며, 나누어 갚는 것은 안 되고, 만 육 개월이 지나면 찾지를 못한다.”는 말을 이어갔다. 나는 마음이 바빠 빨리 돈을 내주기를 바랐다. 골목을 뛰쳐나오며 입술을 깨물었다. ‘기간 내에 꼭 금붙이를 찾아 아내 몰래 제자리에 가져다 놓겠다고.’
며칠이 지난 후였다. 퇴근해 방문을 여는데 친정에서 돌아온 아내가 잔뜩 화난 얼굴로 따졌다.
“당신 내 목걸이, 반지 어떻게 했어요.” 나는 당황했다. 이렇게 빨리 아내가 눈치 채리라는 생각을 못 했다. 추궁에 대한 대답을 준비 못 한 나는 안절부절못하다가 아내가 넋두리 한 말에 꼬투리를 잡아 수세에서 벗어나 보려고 아내보다 훨씬 높은 톤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나를 향한 질책이었지만 아내의 가슴 화덕에 기름을 붓은 격이었다. 한바탕 큰 전쟁을 치렀다. 그날 밤 아내도 나도 잠을 못 이루긴 마찬가지였다.
그날 이후 우리 부부간에 크고 작은 갈등 요인이 생길 때마다 그 일이 주메뉴로 등장했다. 나는 아내의 가슴속에 고인 탁수를 하루빨리 맑은 샘물로 채워지길 갈망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인 돈은 생채기를 키우는 일에만 끼어들었다. 아내는 날이 갈수록 시집의 작은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는 녹 쓸고 휘어져 고철이 된 내 마음을 야심한 밤 까만 용광로에 넣어 담금질하고 담금질했지만, 현실의 벽에 나의 철은 쉽게 휘어져 아내와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갔다.
그런 와중에도 날짜는 어김없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패물을 찾아야 할 날짜가 다가왔다. 때맞추어 동생의 편지도 받았다. 동생은 등록 마감일이 언제라며 편지 끝에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진퇴양난이었다. 생활이 비슷한 직장동료들의 돈을 융통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나는 패물도 찾지 못하고 동생에게 입대를 제안했다. 그러면서 약속을 했다.
“삼 년 군 복무를 하는 동안 등록금을 저축해 놓겠다고,……” 매월 얼마씩 저축하면 계산적으론 가능할 것 같았다. 동생이 입대하는 날 나와 동생은 서로 눈을 맞추지 못하고 돌아서 먼 산을 바라다봤다.
앞의 기억 영상이 언덕길이었다면 다음 영상은 숨을 턱에 걸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험하고도 험한 바윗길이었다.
1975년 시월이었다. 나는 근무지를 울산시 언양면에서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으로 이동했다. 산골이라 쉽게 집을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 백일을 갓 넘긴 아이와 산후조리가 부실한 아내를 데리고 근무지로 향했다. 생각과는 달리 어렵사리 농가의 문간방 하나를 구했다. 시월 중순인데도 대관령 산골의 밤은 남쪽에서 듣고 온 것보다 훨씬 추웠다. 낮 기온은 15도까지 올라갔지만, 밤 기온은 영하 3도까지 내려갔다.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심해 보온이 부실한 농가 문간방은 어른인 나도 밤을 견디기에 고역이었다.
아이가 이틀째부터 기침을 시작했다. 진부면에는 병원이 없었다. 약방에서 약을 사 먹였지만, 기침은 점점 심해갔다. 코일형의 전기난로를 샀다. 밤낮없이 아이의 곁에 난롯불이 켜져 있었지만, 일주일이 지나자 아이의 고열과 기침 때문에 아내와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우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틀에 한 번씩 병원이 있는 강릉을 오가기로 했다. 두 시간에 한 번 있는 급행 버스는 비포장과 포장도로를 번갈아 운행 편도 한 시간 반이나 걸렸다. 버스가 진부에서 대관령 고갯길을 오르는 비포장도로에서 뽀얀 먼지를 길게 달면 의자 밑에선 돌멩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이따금 머리가 버스 천장에 닿도록 엉덩방아를 찍기도 했다. 병원 갔다 온 날 밤엔 아이는 기침을 더 심하게 하고 산후조리가 부실한 아내는 칠월 가뭄의 수숫대처럼 축 늘어져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네 번째 병원에 가는 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침에 밥 한술도 뜨지 않던 아내 얼굴이 떠올라 불안감을 더해주었다. 점심때 회사로 전화가 왔다.
“폐렴이 너무 심해 당장 입원해야 한다,”는 아내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나를 긴장시켰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뛰었다. 숨을 헐떡이며 버스 시간표를 확인했다. 한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나를 고문했다. 쫓기는 사람처럼 서성거리며 분침과 시침에 눈총을 수없이 쏘았지만 시침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걸음만 걷고 있었다.
터미널에서 병원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지만 나는 택시를 탔다. 이 층 병실 문을 밀고 아내 얼굴부터 살폈다. 눈이 충혈 되어있다. 평소 약한 아내의 몸이 요 며칠 동안 더 수축해져 울먹이는 어깨가 겨울 찬바람에 움츠리는 갈대처럼 가늘게 흔들렸다. 병상으로 다가가 아이를 내려다봤다. 얼굴은 창백하고 작은 손등에 무거운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아무것도 안 먹었지?” 짬뽕 두 그릇을 시켜 아이의 병상 침대 아래에 펼쳤지만 둘 다 절반도 못 먹고 젓가락을 놓았다. 우리들의 병원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난 병원에서 씻고, 자고, 먹으며 왕복 세 시간이나 걸리는 시외버스로 출퇴근을 해야 했다.
입원 팔 일째 아이의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퇴원을 요청했다.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우린 딱한 처지를 설명하며 간청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의사는 조건을 달았다. 일주일은 매일 병원에 와서 주사도 맞고 약도 타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병원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 안 여인숙에서 일주일을 버티기로 했다. 여인숙 방은 좁긴 해도 우리들만의 공간에다 따뜻한 방바닥에 등도 녹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병원비를 아낄 수 있어 좋았다. 다음 날 아침 서둘러 일어나 습관대로 화장실을 찾았다. 여인숙 대문 옆 허름한 창고 앞에 두 사람이 쌍을 찡그리고 서 있었다. 난 직감적으로 그곳이 공동 화장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털컥 겁이 났다. ‘이 전쟁에 끼어들면 영락없이 지각할 수밖에 없겠구나!’ 난 그날부터 터미널 화장실을 이용하기로 했다.
여인숙 생활 엿새가 지나자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출근 버스에서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병원비는, 아이의 분윳값은, 그리고 이 지루한 생활은 언제쯤 끝나게 될지 캄캄한 터널 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퇴근길 술이라도 거나하게 취해보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여인숙 방문을 열었다. 아내가 오랜만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의사 선생님이 내일부터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단다. ‘이렇게 기쁠 수가!’ 우리는 그날 직장 동료에게서 빌린 돈으로 순대도 사고 아이의 분유도 두통이나 샀다. 백만장자가 부럽지 않았다. 오랜만에 입맛이 돌아온 나는 젓가락질에 열중하며 아내를 건너다봤다. 아내는 몇 숟가락 떠다말고 수저를 놓으며 트림을 계속했다.
다음날, 새벽같이 우린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일요일이었다. 보름 동안 비워둔 집은 엉망이었다. 종일 청소에 매달렸다. 아이도 쌕쌕거리며 잠을 자고 간만에 집사람이 해주는 하얀 쌀밥에서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이젠 살 것 같았다. 이것이 사는 재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집사람은 저녁밥을 몇 술 뜨지 못했다. 난 머릿속이 복잡했다. 보름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마음고생이 심해서일까, 아니면 어디가 큰 탈이라도 났단 말인가?
“당신 소화제 사 올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겨울 동 잠바를 걸치고 면 소재지로 뛰었다. 산모퉁이를 돌아가는데 십일월의 강원도 산간 밤바람은 상상 그 이상으로 차가웠다. 약방에서 활명수 한 병과 소화제 몇 알을 사서 약방문을 나서다 옆 가게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찐빵에 눈이 갔다. 나는 집사람에게 새로운 걸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빵 두 개를 샀다. 활명수와 소화제 그리고 가슴에 품고 온 빵을 권했다. 아내는 빵 한 개를 다 먹지 못하고 연신 하품을 하다 스러질 듯 자리에 누웠다. 측은한 마음에 나도 누워 집사람의 손을 꼭 잡았다. 전에 없이 손이 차가웠다. 종일 추위에 일해서인가보다 생각했다.
얼마를 잤을까? 잠결에 ‘으-음’하는 신음이 희미하게 들렸다. 아내의 손을 더듬었다. 손이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다리를 툭툭 쳤다. 장작처럼 뻣뻣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내를 흔들어 깨웠으나 신음만 가늘게 낼뿐이었다.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막막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싶었다. 다급하게 주인아주머니를 깨웠다. 아주머니가 아내를 살피곤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이 때문에 그 고생을 하다 집에 온 하루 만에 또 이런 일이,……” 그리고 나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회사로 빨리 가서 도움을 요청하라고.” 나는 아내를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에 무작정 회사사무실로 뛰었다. 밤새 내린 폭설에 발목까지 빠졌다. 탄식(歎息)이 절로 나왔다. ‘도대체 난 전생에 무슨 큰 죄(罪)를 지어 이런 시련(試鍊)이 닥칠까? 운명이란 말인가? 아니면 신이 나의 인내를 실험하고 있단 말인가?’ 뜨거운 눈물이 두 뺨을 타고 내렸다.
우여곡절 끝에 회사에서 픽업 차량을 배차받았다. 차를 운전 집으로 오는데도 몇 번이나 후진과 전진을 거듭해야 했다. 작은 화물차는 아내를 뉘는 것도 비좁았다. 할 수 없이 아이는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부탁해야 했다.
“아이가 울면 옥수수 차에 분유를 타 먹여달라고,……” 폭설이 내린 대관령 고갯길은 차가 전진하기엔 위험 그 자체였다. 그러나 나는 가야 했다. 이를 악물었다. 전진하다 헛바퀴가 돌면 타이어 앞의 눈을 치우느라 대관령 고개의 매서운 눈바람 속에서도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혼자인 나는 외로웠다. 도움을 요청할 수도, 도움을 줄 그 누구도 없었다. 나를 도와줄 아내는 의식을 잃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세 시에 진부를 출발한 차량이 삼십여 킬로 떨어진 강릉에 도착하자 먼 산에 동이 트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아내는 의식이 없었다. 병원 문을 두드렸다. 의사가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세 번째 병원에선 난 반 소란을 피웠다. 오직 아내를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만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소란 덕? 인지 이 층 창문이 열리고 잠을 덜 깬 간호사의 말이 더디게 내려왔다.
“삼층 원장에게 물어보겠다고,” 난 몇 번이고 절을 했다.
오십 전후의 원장은 서두르는 것이 없었다. 온몸이 백지장이 된 아내를 느리게 진찰을 하곤 복부 사진을 찍으라 했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의 기다림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감내하기 힘이 들었다. 나는 아내 곁에 앉자 두 손을 모으고 알고 있는 모든 신을 들먹이며 주문을 외우고 외웠다.
“급성췌장염입니다. 입원해야 합니다.” 나는 바빴다. 입원실 명패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나에게 젊은 직원이 다가와 냉정하게 말했다. “입원수속 하세요.” 그리곤 진찰비, 검사비, 입원보증금 등을 조목조목 외웠다. 나는 잘못을 저질러 선생님 앞에 불러간 초등학생처럼 주눅들은 몸짓으로 말했다.
“돈은 집에 가서 가져올 테니 입원만 시켜달라고.” 되풀이 애원하자 그가 원장실로 들어가고 나는 손을 가슴에 얹었다.
입원병실은 온돌이었다. 그러나 환자 이불이라곤 낡아 헤진 군용 담요 두 장이 전부였다. 놀라는 나에게 간호사는 말했다. 입원환자가 드문 병원이라 그 담요도 자신들이 덮는 것이라고. 나는 동 잠바를 벗어 아내의 몸을 덮었다. 조급한 나의 마음과는 달리 잠을 설친 간호사는 굼벵이처럼 꾸물꾸물 거렸다. 몇 번의 독촉 뒤에야 환자의 팔에 주삿바늘이 꽂혔다. 난 아내 곁에 앉자 두 손을 모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내 얼굴에 핏기가 오르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신 괜찮아?” 그리고 눈을 맞추자 아내는 아이 이름을 입가로 흘리며 두리번거렸다. 그때 서야 진부에 두고 온 아이가 생각났다. 순간 나는 앞뒤가 없는 전차처럼 어느 쪽이 더 시급한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두리번거리다 시계를 봤다. 어느새 시침이 열 시를 넘고 있었다. 나는 원장실 문을 밀고 들어가 다짜고짜로 말했다.
“우리 집사람 괜찮겠습니까? 갓난애를 데리러 가야 하는데요.”
“두고 봅시다.”
진부로 돌아오는 눈길은 험하고 멀었다. 방문을 열었다. 아이는 콧물, 눈물범벅이 된 채 지쳐 잠들어 있었다. 머리맡 밥그릇엔 누런 옥수수 차에 침전된 희멀건 분유가 한 가득이었다. 주인아주머니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이가 물 한 모금도 받아먹지 않았다고.” 난 아이를 이불보자기에 싸안고 회사로 들어갔다. 사무실 문을 열고 아이를 안은 채 직원들 책상 사이를 지나 경리과장 책상 앞으로 다가가 느닷없이 말했다. “봉급 가불 좀 해주세요.” 나의 모습과 뚱딴지같은 말에 경리과장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몇몇 직원들이 바라보고 있었지만, 궁지에 몰린 나로선 주위의 눈치를 살피는 건 사치였다. 당직 근무를 한 직원이 달려와 경리과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경리과장은 금고를 열었다. 구세주였다.
시외버스 안에서 엄마 젖을 찾아 보채는 아이를 달래며 난 다짐을 하고 다짐을 했다. 이 아이와 아내를 꼭 지켜내야 한다고.…… 아이를 아내 곁에 누이자 동시에 젖을 찾고 젖을 물렸다. 아내와 아이가 안도하는 모습에 난 돌아서서 천장을 올려다보는데 형광등 불빛이 물결처럼 일렁거렸다. 둘이 곤히 잠이 들자 일순 공허감이 밀려왔다.
안의 내가 밖의 나에게 술 한 잔을 대접하고 싶었다. 병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재래시장 골목 끝에 있는 중국집으로 갔다.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으로 볶음밥과 고량주 한 병을 주문했다. 밥이 나오기 전 고량주 한잔을 목 안으로 부었다. 나의 식도는 짜릿함으로 고량주의 이동 위치를 알려주었다. 평소 맥주 두 병 정도가 주량인 용기(容器)에 고량주 한 병이 들어가 만드는 작품은 목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벌렁거리며 ‘모든 것에 불가능은 없다.’였다. 술이 좋았다. 이 정도 시련쯤이야 하는 대담함이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가물 가물거리는 정신을 붙잡으며 볶음밥을 두어 숟가락 우물거리다 불현듯 생각났다. 나 없으면 안 되는 그 둘이, 지금쯤 나를 찾고 있을 거라고, 나는 탁자를 짚고 일어섰다. 순간, 사방 벽이 거미줄처럼 빙빙 돌아갔다. 그러다 쓰러졌다. 누군가가 부축해주는데 힘입어 겨우 중국집을 나서다 필름이 끊어졌다.
머리가 아프고 심한 갈증에 눈을 떴다. 내가 팔에 링거주사기를 꽂고 아내 옆에 누워있었다. 밤중이었다. 병실점검을 온 간호사가 말했다. 내가 병원 안으로 뿔뿔 기어들어 와 의식을 잃었다고. 그리고 덧붙였다. 검사를 더 해봐야 하겠지만 심한 빈혈과 찰과상 등으로 며칠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가족 모두가 하루의 시차도 없이 연이어 병원 신세를 져야 한다는 말에, 뜬금없이 중국집을 나설 때 ‘햇살이 눈 부시도록 따뜻했다’는 기억 한 점이 뇌리를 스쳤다.
잠시 후 문밖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아내와 난 동시에 아…하곤. 몸도 입도 굳어 꼼짝할 수가 없었다. 방문 앞에 석고처럼 서 있는 키 큰 여인은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누운 채로 “장모님”하고 부르자 여인은 퍼석 주저앉으며 울음 반 한마디를 내뱉었다.
“살아 있어 고맙다.”
그날 장모님은 전남 광양군 진월면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순천으로, 순천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서울에서 택시를 타고 강릉까지 종일 달려오면서 차멀미로 물 몇 모금으로 버티시고도 누워서 인사하는 자식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뒤로의 여행 후기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먼저 나의 후회는 어떤 것들인가를 살폈다.
첫 번째는 효도였다. 효도는 어려운 것이 아닌데도 그동안 나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효도란 부모님께 산해지미를 대접하는 것도, 화려한 옷을 사다 드리는 것도, 외국 여행을 시켜드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부모님의 말씀을 살갑게 들어주고, 소찬의 밥을 함께 먹고, 손을 잡고 공원을 산책하는 작은 일들에 부모님은 더 행복해하신다는 걸 몰랐다. 그런 효도를 내일 해야지, 이다음에 해야지, 하고 미루고 미루다, 어머님이 먼 길 떠나고 나서야 효도를 생각한다는 건 후회막급이었다.
두 번째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기가 더 어렵다는’ 어느 신문 칼럼에서 읽었던 글이 여행 후에야 진하게 마음에 새겨졌다. 그동안 나는 곁눈질 하지 않고 열심히 가족을 위해 노력하면 가장의 의무도 가족에 대한 사랑도 일정 부분 달성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변하는 시대를 따라가지 못한 의식이었다. ‘표현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말을 대입해보니 나는 가족에 대한 사랑은 밑바닥이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사랑의 말을 주고받아야 행복이 싹트는 비결임을 모르고 지냈다.
세 번째는 요즈음 유행하고 있는 말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중요성을 모르고 살았다. 소확행은 복잡하고, 다양하고, 물질만능주의인 현대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삶의 방식임을 뒤늦게나마 깨달았다. 소확행은 삶 속에서 사랑을 키우고 표현력과 적극성을 갖게 해준다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래서 바로 내 마음을 적응해 보기로 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첫날 세 가지 소소한 행복을 찾을 수 있었다.
아침에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문 앞에서 작은 연초록 잎 사이로 담회색의 꽃대를 밀어 올려 연분홍 꽃을 세 송이나 피운 앵초 꽃이 앙증맞은 얼굴로 아침 인사를 했다. 평소 같으면 무심코 지나쳤을 일이었지만 소확행을 적극적으로 살핀 결과였다.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눈을 맞추자 아침 기분이 상쾌했다.
낮이었다. 책을 읽다 말고 문득 생각났다. 엊그제 손녀가 주고 간 생일축하 손 편지를 꺼냈다. 초등학교 육학년인 외손녀의 편지를 반복해 읽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생신 축하드려요. 할아버지는 우리 가족 중에서 제일 소중한 분이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아프면 제일 먼저 달려와 병원도 가고 또 위로해주셨지요. 얼마 전에는 엄마 아빠 사이가 안 좋다고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안타까워하시며 바로 해결해주셨지요.
……중략……
할아버지가 항상 강조하시는 웃어른께 인사 잘하기, 나쁜 말 쓰지 않기, 공공장소에서 예의 지키기, 친구에게 양보하기, 등을 실천하면 어른이 되었을 때 큰 장점이 된다는 할아버지 말씀 잊지 않을게요. 할아버지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가끔 길게 말씀하실 때가 있는데 짧게 말씀해주세요. 햇살 좋은 날에 사랑하는 손녀 올림’
초등학생 육학년 손녀의 솔직한 편지를 읽으며 흐뭇함이 가슴 한가득 밀려들었다. 특히 편지 끝에 ‘햇살 좋은 날’이라는 봄날을 표현한 편지를 들고 나는 한참 동안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오후였다.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약은 먹었느냐고, 그리고 덧붙인다. 컴퓨터 그만 좀 하라고,…… 얼마 전 안과에서 망막 정맥 폐쇄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말했다. 계속 치료를 해도 완치보다는 병의 진행을 지연시키는 데 불과하다고. 그 말을 들은 딸이 며칠 후 눈에 좋다는 영양제 두 종류를 사다 주곤 복용 여부를 챙기는 것이었다. 이 또한 소확행의 마음가짐으로 받아들여 생각했다. 딸이 두 아이를 키우는 바쁜 와중에도 약을 고르고 약의 복용 여부를 챙기는 마음이 고마웠다. 가족이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알뜰살뜰 챙겨주겠는가 싶었다. 나는 오늘도 가족에 대한 사랑 표현을 딸로부터 배우며 소확행 하나를 보탰다.
뒤로의 여행 후 나의 결론은 삶에는 정답이 없다는 거였다. 그래서 삶은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나는 판단했다.
‘삶은 주문을 외우며 헤쳐 나가는 가시덤불’이라고.
당선소감문
(대상. 뒤로의 여행.)
전화를 받고 한참 동안 멍했다.
정신을 차리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힘들게 걸어온 길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고 최근 몇 가지 일들이 떠올랐다.
첫 번째는 그동안 나는 나에게 소질이 없다며 면박만 준 것이 미안했다. 오늘만큼은 내가 나를 칭찬해주고 싶었다. 막걸리도 한 잔 권하고 싶었다.
두 번째는 내 글의 최고 애독자이면서 내 글에 관심이 많은 두 손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할아버지로서 괜찮은 자랑거리를 만든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세 번째는 내 머릿속의 기억을 찬찬히 더듬어 가슴에 담아보니 감사해야 할 일이 참 많았다. 특히 내 가족은 힘든 삶을 지게에 지고 일어설 때마다 지팡이가 되어 주었고, 언덕길 오를 땐 내 장딴지 힘의 원천이었다. 무엇보다도 요즈음 유행어인 ‘소확행’의 생산기지였다.
나는 판단했다. 삶에는 정답이 없다고 그래서 삶은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나는 다짐을 했다. 칠 학년의 무게를 마음속에서 내려놓고 내 가슴속 화덕에 글쓰기라는 장작을 가득 넣어 불을 지피자고.
매일신문과 심사위원님들께 깊이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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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선생님---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사모곡이 애절합니다.
'어머니'라는 말만 해도 억만 갈래의 느낌이 와닫습니다.
아마도 삶을 다하는 그날 까지 우리는 어머니의 품 속에 있을 듯.
귀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