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 시간에 온다
구름 제조법
날씨에게도 집이 있어서.
부엌이 있고
어느 저녁엔 불을 지피고 밥을 안친다면, 그것은 올 나간 소매 밖으로 삐져나온 바람의 언 손이 하는 일. 문밖에 갈색 가죽을 덧댄 신발을 벗어놓고
젖은 발이 하는 일.
그 발은 구름의 발,
비라고 불린다. 그렇지만 생활은 또 불길 지나간 들판에 떨어지는 빗방울 같은 것이어서,
바닥에 닿자마자 흰 연기를 지피며
지져진다.
무엇일까?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를 지나간다는 것은 입김의 흰 목덜미를 불며
난로를 켜고,
주전자에 받아 물을 올리고 조용히 구름을 만든다. 오늘은 흐림. 아니 비. 이렇게 불을 지피면 물속에 잠길 수도 있다. 물이 끓으면, 불 속을 헤엄칠 수도 있다.
불을 끄면,
창밖으로 검은 돌고래떼가 느리게 지나가는
밤.
무엇일까?
어떤 이별도 남아 있지 않은 인연에게
남은 것은
밤은 모든 거리를 지우고 모든 벽을 허물고 사람 옆에 사람을 눕혀 오로지 꿈속의 얼굴만 보여주는데,
물속에서 빗방울을 건져내기 위해서 끓고 있는 주전자처럼
누가 운다.
주전자를 새까맣게 태우며 오는
비.
아무리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 물의 얼룩을 끝까지 품고 있어서, 주전자는 수요일 오후의 분리수거장 부대 속으로 무심하게 던져진다.
책
종이 위로 생각이 지나갔다 그걸 읽으려고 형광등이 빗소리처럼 흰 목을
그러니까, 천장에서부터 집요하게
늘어뜨렸지만
생각은 이미 나를 지나가버렸고, 지금은 종이와 손가락과 툭 끊어진 채
하얗게 굴러다니는 머리의 밤. 불을 끈다
어둠이
생각을 감싼 표지라면
제목은 지나갔다
제목 없는 표지면 어떤가. 아무리 찢겨도 맨 앞장이 표지겠지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아서 찢어내고 찢어내도 그대로인
생각처럼
비.
젖는 일에는 입구가 없어서
책을 읽는다
죽은 자의 생각이 지나간 자리에 글자가 남아 있다. 죽은 자를 깨웠다가 다시 죽인다
찢겨나간 페이지가 또 한 권씩 책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한 장으로 이루어진 책
그러니까
무수한 낙엽들이 한 권씩 책의 무게로 떨어지고 있다 무수한 바닥을 찢으며
비.
가스불로 끓이는 것 같은 비.
아무리 졸여도 결정되지 않는 글자로 자글대다 간신히 피어오르는
비.
짜질 줄도 모그고
바닥에 달라붙어
네.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이 생각인 줄도 모르고 꿈을
꿈속에서, 당신은 내 앞에서 나를 찾고 있었습니다 여기 있어요 듣지 못한 채
비행기가 지나갔습니다 나에게 나를 묻는 당신
맞아요. 당신에 대해서라면 당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책이 아니라 문장이 아니라
바람이 흔들어보는 십자가. 흔들리지 않는 십자가
불빛은 빗방울처럼 떨어지는군요 은총에선 우산 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버스가 지나갔습니다. 한 사람을 여러 칸으로 나눠담고 있었습니다 나는 꿈속에서도 깨어 있었는데
다음 버스에서도 같은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삼색볼펜
내 필통 속에 삼색볼펜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 가방 속에 필통이 있고 필통 속에 여러 개 볼펜이 있다는 것과
하나의 볼펜 속에 세 개의 심이 있다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
하나의 가방 속에 세 개의 필통을 집어넣는 사람의 마음과 어떻게 다른가
처음 삼색볼펜을 만든 사람도 내게 삼색볼펜을 건넨 사람도
모르겠지만
길게 줄을 긋는다
세 개의 색깔은 서로를 알아보는가.
빨간 돌 다음에 파란 돌을 올려놓는 것처럼 파란 실 끝에 빨간 실을 묶는 것처럼
하나의 이야기 끝에 다른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이라면 차례차례 등장하는 것이
마음이라면
하필 비 그친 하늘, 무지개는 어떻게 저 많은 색깔을 한꺼번에 피워내는가
파란색 볼펜으로 쓴 말들은 아득하게 펼쳐진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흑동고래의 길이 이어지고
파랗게 어두워지는 깊이쯤 가라앉는 배.
부드럽게 죽어가는 수초들 사이에서 녹슨 갑판이 흑동고래의 눈을 뜬다
번갈아 뚝딱이는 소리처럼 별들이 바다 위를 빙빙 돌며 길을 잃게 만든다
빨간색 볼펜으로부터 타오르는 이야기, 모든 불꽃이 하나의 작고 둥근 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믿는다
성냥 머리처럼 붉게 묻은 생각에 하얀 종이를 구름으로 펼쳐놓고 기다린다
부딪쳐라, 바람에게
하늘을 다 태우는 저녁을 주고 싶다
나는 내 몸속에 쓰인 붉은 글자들을 안다 사막이 많은 나라의 문자처럼
바다를 잃어버린 내 몸의 해변을 돌고 도는 핏줄들.
매번 새롭게 쓰여지고 매번 까맣게 지워지는 내 몸의 파도를 아무도 읽지 않아서
생각의 저녁을 붉은 화농으로 키우는
가로등.
불빛으로 휘감기며
검은색 볼펜으로 쓴 죽음들
밤.
그 속에 무언가 갇혀 있다 어둠의 캄캄한 벽을 조금씩 밀어내며 오직 머리로만 남아 있는 그것들이
새 개의 눈동자를 갈아끼우는 소리가 들린다
예술영화
우산을 쓰고 극장에 간다
간다
주인공이 멀리서 걸어올 때, 끓는 물 속에 막 던져진 계란 흰자 같은 담배 연기가
담배 연기가
흐른다
흐른다.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순간이 있지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사라지는 일들이 있어서
나는 나지. 말하지 않으면 나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내가 가지 않은 곳을 갔다 오고
우산을 들고 있다고 중얼거리지 않으면 감쪽같이 우산은 사라져
우산처럼 사라져
혼자서, 극장의 어둠 속에 남는다
비 온 뒤 돋아나는 독버섯처럼
대사가 시작되면,
아는 이야기를 알려고
마음처럼
사는 이야기를 살려고, 극장에서는 우산을 접고
본다
스크린 가득 비가 내리지만 아무도 우산을 펴지 않는다 아무도 마음을 쓰지 않는다 우산처럼, 비 오는 이야기에 젖고 있어서
비처럼
흐르는, 극장의 어둠 속에는 영화 속에서 죽은 자들의 영혼이 있는 것 같아
팝콘이 떨어지면 떨어진 곳에서 희뿌옇게 일어서는 것들
채도가 낮은 어둠을 조용히 솎아내며
사람이 되는,
사람이었던 사람이
같은 말을 영원히 반복하는 영혼이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면
보인다. 한 사람이 된 어둠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를 향해 걸어간다
우산을 펴고
우산처럼,
마음을 쓰고 집으로 간다
비 오는 날 어둠은 비가 쓰고 온 우산처럼 구석에 버려져 있다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
비와 약속한 사람들은
아무도 늦지 않는다.
이렇게라도 말해야 하는 순간이 있지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
센서등마저 꺼지면
어둠 저편에서 대사가 들린다. 팝콘 좀 줘.
조용히 해!
곧 시작해
내 머리의 암실에서 누군가 내 생각을 환풍구로 돌리며 담배 연기 같은 하루를 흘려보낸다
다인실 다인꿈
밤의 창가에서는 허공과 사람이 하나의 창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건너편을 바라보며 불을 끄거나 켜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누가 묻길래.
그는 착한 사람이라고 말해주었는데, 꼭 그는 슬픈 사람이라고 말한 것 같다.
침대의 잘못은 자신이 입구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데 있다.
잠이 오지 않으면,
걱정을 만든다. 죄를 빼고 나면,
사랑은 남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착한 사람이다.
물속에 사는 사람처럼, 그네처럼, 시내버스 요금함에 거스름돈 떨어지는 소리처럼, 넘어졌던 아이가 일어나 탁탁 부딪치며 털고 있는 손바닥, 그리고
비행기.
무심한 밤하늘 한쪽 귀퉁이를 천천히 지나가고 있어야 한다, 검고 푸른 바다를 건너가는 그림자, 오로지 자신만을 가로지르며
나를 잊은 채 먼 나라로 떠나는
사람.
불을 끄면 나는 오래전 내 조상이었던 고래가 추락한 곳이 어딘지 알 것 같다.
눈사람의 시체를 찾아 바다를 헤매는 자의 지느러미가
선로 위를 미끄러지며 기차가 도착하자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문이 열리고
물은 수많은 발자국을 껴입고 있어서 가는 곳마다 발자국을 벗어놓는다
역장은 알린다
이 역을 떠나는 손님께서는 자신의 발자국을 다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몸이 발자국인
눈.
이 얼어붙은 빗방울은
창 너머, 먼 시간을 지나가는 물속의
걸음 같다.
기차와 플랫폼을 가르며 떨어지는 이별은 조금만 더 늦춰보려고.
풀풀,
마음의 수도를 얼리며 서 있는 바람의
발.
아무도 떠날 수 없어서
자리를 깔고 신발을 벗고 텔레비전을 켠다. 눈은 내리고, 울다가 웃다가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른다. 눈은 내리고, 계란을 깨고 소금을 치고, 기다린다. 흰자위가 흰자위가 되는 동안
봄이 와,
둘둘 발자국을 말아 가방에 넣는다
역장이
창구에 걸어놓은 잠바에서
한꺼번에 터져나온 하얀 털처럼
공중에서 출렁이며
언젠가는 물이었던
밤.
발자국은 떠난다는 말은 모르지만
눈사람의 시체를 찾아 바다를 헤매는 자의 지느러미가 바람 속에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