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력(萬曆) 15년 정해년(1587) 26일(을유)
맑음. 늦게 진눈깨비가 내리고 우렛소리가 크게 울렸다. 화표관(華表觀)을 방문하여 석주(石柱)와 비석을 보았다. 비석에는 위군(魏郡) 사람 왕광조(王光祖)의 율시 1수가 새겨져 있었다.
晴. 晚有凍雨, 雷聲大作. 訪華表觀, 見石柱及碑. 碑有魏郡王光祖詩一律
傳言此地栖白鶴, 전하는 말로는 이곳에 백학이 산다 하고,
惟有仙人題柱詩. 오로지 신선이라야 석주에 시를 쓸 수 있다 하네.
殘石那分千古事, 잔석은 어찌하여 천고의 일을 나눴고,
老松誰記萬年枝. 노송은 그 누가 만년의 가지를 기억할까?
東來紫氣關雲遠, 동쪽에서 자줏빛 기운이 오니 관문 구름은 아득하고,
南下滄洲海月知. 남쪽으로 창주로 내려가니 바다의 달이 아는구나.
借問觀前華表洞, 묻노니 화관 앞 화표동에,
遠公何日是來期. 멀리 있는 사람이 어느 때 온다고 기약하였는가?
인하여 차운시를 지었다. 또 내친김에 백탑사(白塔寺)로 갔다. 탑의 높이는 몇 장(丈)인지 모르지만 층층이 석불을 새겼으며, 면면이 모두 그러하였는데 인력의 교묘함을 지극하게 발휘하였다. 삼전(三殿)을 두루 관람하니 불상이 매우 컸고, 평생 보지 못한 것이었다. 중전(中殿) 뒤에는 수미산(須彌山)을 새기고 청색을 칠하였는데, 그 기묘함에 짝할만한 것이 없었다. 뒤에는 장경각(藏經閣)이 있었고, 중간에 윤회의 모습을 2층으로 설치하였으며, 그 높이 또한 몇 척(尺)인지 알 수 없었다.
대저 중국 조정에서는 유학을 숭상하는데, 오히려 불교 사찰에 인력을 허비함이 이와 같으니 무슨 까닭인가? 틀림없이 요(遼)나라, 금(金)나라, 오랑캐 원(元)나라 때 창건하였을 것이다. 두 서생이 승방에서 독서를 하기에 통사를 시켜 불러왔다. 관모(冠帽)는 썼으나 요대(腰帶)는 매지 않았다. 서로 읍(揖)을 하며 이름을 물었더니 도사학(都司學), 호봉정(胡鳳廷)과 심양위학(瀋陽衛學) 이명우(李明宇)였고, 모두 <서전(書傳)≫을 읽는다고 말하였다. 그 중의 문장을 뽑아서 물었더니 모른다고 대답하였으며 글씨체도 매우 졸렬하였다. 이곳에 거주하는 승려가 돼지고기를 삶아서 먹는다고 하였다.
장차 망경루(望京樓)에 올라 가려다가 길에서 비를 만나 무안왕묘(武安王廟) 문 앞에서 쉬었다. 무안(武安)은 관우(關羽)이고, 빚어놓은 상(像)이 매우 의젓하였다. 수묘(守廟)하는 사람이 예닐곱 있었고, 1년에 세 번 제사를 올린다고 하였다. 이곳을 관람하려고 멀리서 온 사람이 매우 많았지만 모두 우둔하고 무식한 장사치여서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망경루에 올라가니, 쌓은 층은 5층이었으나 3층까지만 올라갈 수 있었고, 위의 2층은 계단이 없어서 올라갈 수 없었다. 누대의 높이가 몇 백 척(尺)인지 알 수 없었고, 사방을 두루 살펴보니 요성(城) 및 사방의 들판이 모두 눈앞에 있어서, 하늘에서 멀지 않은 곳인 듯하였다.
因次韻, 仍往白塔寺. 塔之高不知其幾丈, 層層刻石佛, 面面皆然, 極人力之巧也. 周覽三殿, 佛像高大, 平生所未見也. 中殿後刻須彌山, 畫以靑色, 奇巧亦無匹也, 後有藏經閣, 中設輪回之狀二層, 而其高亦不知其幾尺也 夫以中朝之崇儒,猶於佛宇,虚費人力如此,何哉?必是遼金,胡元時所刱也, 有兩生讀書於僧房, 令通事招來, 著冠不帶, 相與爲揖, 問其名字, 則都司學胡鳳廷, 瀋陽後學李明宇, 而俱讀≪書傳≫云, 抽其文問之則答以不知, 書字亦甚拙. 居僧烹猪肉將食云. 將登望京樓, 路逢雨下, 憩武安王廟門前, 武安則關羽也, 塑像儼然. 有守廟人六七, 一歲三祭云, 遠人來觀者甚衆, 皆頑劣無識興販者, 不可與語也. 上望京樓,累五層, 只登三層, 其二層無梯不可陞也. 樓之高不知其幾百尺也, 周視四面, 遼城及四野, 皆在目前, 卻疑去天不遠也
▶왕광조(光祖) : 자는 아승(繩) 또는 군유(君兪)이며, 북송 신종(神宗) 때의 장수로 연변안무부사(沿邊按撫副使)를 지냈다.
▶ 도사학(都司學): '요동도사학(遼東 都司學)'을 가리킨다. 명나라 때 요양(遼陽)에 설립한 학교로 당시 중국 동북 지역에서 유학을 가르치던 최고 교육기관이었다. 요동 도사(遼東都司)에서 교육을 관장했으므로 이곳에서 공부하는 학생을 '도사학'이라 불렀다.
▶ 심양위학(瀋陽衛學): 원문은 '심양후학(瀋陽後學)'이지만 '심양위학(瀋陽衛學)의 오류로 보인다. 왜냐하면, 명나라 홍무(武) 19년(1386)에 심양에 지방 행정기관인 중위(中)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이 심양 중위에 설치된 유학 교육기관과 그곳 학생을 '심양위학'이라고 불렀다.
▶ ≪서전(書傳)≫ : 사서오경(四書五經)에 속하는 <상서(尙書)≫의 경문을 해설하고 주석한 책으로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송대(宋代) 이후로 성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흔히 남송 채침(蔡沉)의 ≪서집전(書集傳)≫을 주로 읽었다.
《국역 배삼익 조천록》 p161 ~ 163, 김영문(세종대왕기념사업회 국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