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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0일 글마루 정기모임 이용우 소설가 소설 강의 6- 레이먼드 커버 <대성당>
지난 번 한국작가의 작품만 공부하다, 이번에는 미국 단편작가 레이먼드 커버의 대성당을 공부하기로 했는데 다 읽어 오셨나요? 한국의 소설가가 제 각각이듯, 다 문체가 다르고, 다루는 분야도 공상, 순정등… 이렇게 쓰는 것들이 다 틀리다. 사람의 DNA가 틀리듯, 모든 작가마다 다른 것이다. 미국의 영화나 소설 작품을 보면, 미국 사람들은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잔인하거나 괴기스러운 작품들이 베스트셀레가 되는 경향이 많다. 하지만 레이먼드 커버는, 인간의 섬세한 내면을 집어서 쓰는 작가로 유명하다. 기복이 심하게 드러나게, 소설 안에 구성의 장치가 있지 않다. 다른 작품과 같은 배우를 모델로하는 작품처럼 줄거리가 굵지 않다. 잔잔함 속에서 인간 내면을 건드린다. 예를 들면 웨추레스가 일하는 평범한 모습을 쓴다. 하지만, 커버의 글을 다 읽고 책을 덮고 나면, 아리아리한 것이 남게된다. 카버는 오직 단편만 섰다. 미국 문학의 정수에 서있는 작가다. 대성당을 , 주홍글씨처럼 기대하기 쉬우나, 오직 대성당은 은유적으로 보여지는 무엇인가의 실체를 통해 인간의 오묘한 관계를 쓴것이다. 어찌보면 이 소설의 내용은 대성당과 무관해 보인다. 이 글을 읽으면서 글을 이렇게 써보고 싶지 않은가? 아내가 주인공과 결혼하기 전 도와주던 맹인이 우리집에 찾아 오는 것. 얼개만 봐도 상당한 이야기가 상상되지 않는가? 이야기를 쓸 때도 이야기가 잡혀지지가 쉽지 않지만, 이런 이야기를 보면 쓰고 싶게 된다. 나는 다른 사람의 글에 푹 빠지지 못하는 습관이 있다. 내 상상대로 추측이 맞아지지 않거나, 내 관점에서 작품의 부족한 면이 보이면, 걸려서 , 물론 압도적인 작품은 그렇지 않지만, 그렇지 않으면 고쳐 보고, 첨가해 보면서 많은 생각으로 정독이 어렵다. 아내가 주인공과 결혼하기 전에 도우미였는데 그 후 맹인과의 편지와 자기의 일상을 녹음해 테잎을 주고 받으며 서로 교류가 있었다. 남편의 싯점으로 쓴 소설로, 남편은 고급스러운 상상과 오해를 할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할 수 있다. 그 둘은 남편보다 먼저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은 정신적으로 더 친밀한 관계다. 독자들은 대게,약한자를 돕고 싶은 경우가 많아 남편보다 맹인의 편을 드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소설의 구성이야기상, 화자인 남편이 주인공이다. 아내가 잠든 후 남편과 맹인의 상대하는 장면에서 TV를 통해, 맹인네 집에 칼라와 흑백 두대의 TV를 갖고 있고, 소리만 들어도 칼라TV임을 안다는 것이다. 맹인도 맹인대로, 눈에 보이지 않으나 공기를 통해서 전해져 오는 것에 민감하다. 2000년도 장애인 아시안 게임에 축구를 하는 것을 보았다. 보이는 사람은 모두 안대를 하고 경기에 출연한다. 소리가 나는 공을 사용해 축구를 한다. 또 어떤이들은 청각장애를 갖고 있는데, 입 모양으로 말의 내용을 알게 된다. 듣지 못하는 사람은 눈이 발달하게 된다.입 모양만으로 적대적인지 우호적인지를 파악한다. 남편과 맹인의 소통 장면 중 TV에서 어떤 장면이 나오는 것을 알게 된다. 디스커버리 체널같은 곳에서 나오는 대성당를 통해. 맹인은 추측할 수 없는 것을 남편에게 그려보게 한다. 맹인이 남편의 손에 대며 그리며 추측하게 된다. 손을 맞잡은 일을 계기로, 두 사람간의 거리감이 좁혀지고 소통이 되는 것을 경험한다. 정상인과 맹인의 이질적인 마음들이 한 순간에 다 녹아 버리게되는 감동적인 내용이다. 소재가 좋다.
`문학적인 케릭터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자 누가 이 소설을 읽고 무엇을 볼 수 있었는지를 나눠주면 좋겠다.
<이일초>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은 설명이 아닌 보여주기로 인생의 숨겨진 핵심을 찔렀다. 맹인의 세계를 눈뜬자가 경험한, 눈이 보이기에 보지 못 하는 세계의 대비로서 우리는 자신의 세계에 갇힌 존재이기도 하며 타인에게 모두 맹인과 같은 존재란 메타포로 다가왔다. 간결한 문체. 사실적인 묘사.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묘사가 인상적이었다.심미안은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세계이며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철학이라는 것을 이 소설이 말하는 것 같았다. 대성당을 짓다가 생애를 바친 건축가들을 이야기하며 대성당은 보이는 자들을 위한 표식에 불과하단 걸 알았다. 마음의 세계에서 진실이 닿는 대성당도 대성당의 자리를 차지한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결과적인 것을 추구하며 요즘 문제시되는 대형교회 증축 등 현재의 문제를 생각나게 했다. 그러나 이 세계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조화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걸 느꼈다. 다음문장을 궁금하게 만드는 재주를 가진 작가이다.
<이용우> 대성당은 서양인의 의식구조 안에서 쓰여진 글로 우리와 잘 맞지 않을 수 있다. 커버의 100%를 찾아낼 수 없지만, 왜 이 작품을 ‘대성당’이라고 했을까?. 서양인들의 의식에서는 이작품과 같이, 인간관계의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교감이 대성당처럼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닐까? 서로 소통한다는 것을 대성당처럼 큰 가치로 여긴다는 의미는 아닐까?
<이일초> 아 그렇게도 이해할 수 있겠네요. 그래서 제목이 ‘대성당’이라는 의미를… …
<문무웅> ‘대성당’이라는 것이 신상을 얘기한 것이 아닐까? 마지막 부분에서 서로 각자가 볼 수 있는 것을 그려놓았는데, 그 결과물들이 과연, 결국 상상이라는 결과의 뒤죽박죽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이용우>그 장면을 생각해 보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연희>우리가 보는 세계가 보는 사람들에게는 부족할 것이라는 편견. 나중에 맹인이 눈을 떠도 좋다 할 때도 눈을 감고 있으면서 맹인의 세계가 부족한 것이 아니었고, 그 세계도 우리가 가질수 있는 편견만이 아니라, 뭔가 다른 무언가를 갖고 있구나하는 것의 발견이다. 눈을 뜨라고 맹인이 말하나 계속 남편은 눈을 뜨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이 손으로 교감을 하면서 느꼈던, 대성당을 만져보는 것이다. 이런 나름대로 한 것이 완벽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맹인은 대단한 것을 보고 있다는 것을 남편이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이다. 눈을 뜬자가 생각했던 부족, 어글리 한 것이 아니라 뭔가 풍부한 것을 느낀 것이다.
<좌수아김> 카버는 나와 동갑이다. 카버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해서 두 아이가 있었다. 시인을 거쳐 단편소설가로 바뀐다. 커버가 글을 쓰던 그 시대는 미국에 흑백 차별, 장애인 차별이 극대화 되었던 시대이다. 혼란이 심했고 흑백 문제, 각대학의 분쟁, 마틴루터킹의 암살시도등, 평등이 투쟁을 통해 성취되어야만 했던 시대이다. 그래서 커버의 마음 속에는 흑백 문제와 분쟁등의 문제들이 있었다. 이 소설에 보면 남편은 장님의 방문이 아주 못마땅했다. 특히 흔히 소설에 등장하는 등장인물의 이름들이 의마하는 이미지를 말하고 싶다. 로버트는 흑인계에 많은 이름이였다. 맹인의 아내가 ‘니그로였느냐’라고 묻는 장면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당시 커버는 술을 즐겼다는 것을 그간 쓴 많은 소설에서 짐작할 수 있다. 나중에 알콜중독에 빠지기도 한다. 소설 내용에 도착 후 술과 마약을 한 후 두 사람이 친해지고, 남자가 맹인을 대하게 된다. 원문에 보면 여자가 말하는 것에 보면 상향이 아니라 하층계급의 하는 말을 사용한다. 자기가 싫어하던 장애자와 그림을 그리는 화목으로 이어진다. 이 사람의 작품이 그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이 소설은 흑백 문제와 분쟁등 개선에 기여해 각 대학의 영문과 교제로 사용된다. 이 작품을 베스트 아메리칸 스토리에서 실어주어서 작가로써 확고한 자리를 굳히게 된다. 이 소설은 그런 의미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용우> 우리가 외국 작품을 읽는 다는 것은 작품의 분석은 그렇다 치고, 글을 배우는 사람으로서. 어떤 점이 기발하고 좋았나?에 대해 나눠보고 싶다.
<이혜숙> 이 작품이 1981년에 쓴 것인데, 참 모던하게 느껐다. 새롭게 느꼈다. 객관적인 표현. 자기현재의 아내를 남의 얘기를 하듯이 감정을 집어넣지 않아서 신선했다. 일초씨 얘기대로 표현이 신선했다. 카버 자신이 폐암으로 죽었다고 했는데, 마리화나를 피우는 장면등은 사실적묘사로 정말 경험한 자만이 쓸 수 있는 표현으로 읽혔다. 또한 카버는 알콜중독자였다는데 소설 속에 그런 묘사들이 아주 잘 묘사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친구같은 아내와의 관계가 느껴졌다. 하지만 끝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슨 결말이 이런가? 이 소설의 끝을 잘 모르겠다.
<이용우> 누구 이 소설을 읽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있으면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선자 > 미국 소설을 공부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대성당를 읽기 시작했다. 특히 안톤 체홉에 비길만한 단편작가라는 수식어가 붙는 카버라는 말에 더 기대를 가지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소설이 시작되었지만, 상당한 페이지 수가 지나도록, 한 맹인이 한 가정을 방문에 식사를 하고 TV를 보는 너무나도 식상하고 답답하게 이어지는 상황들이 열거되어 지는데 실망을 하면서 읽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물론 체홉에게 비긴다면 체홉의 작품이 그렇듯 무언가 그 상황을 확 뒤집어 버리는 결말이나 한층 상황을 몰아간 뒤 극적인 조치들을 갖추고 있을 것이라는 예감을 떨치고 싶지 않았지만 상당한 부분이 지나고 있었지만,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지는 간음키 어려웠다. 또한 단편은 한 문장이라도 작품과 연관되어지지 않는 문장이 없어야 한다고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문장들이 뭐 이렇게까지 자세히 쓸데 없는 것들을 묘사하는지 답답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중에 대성당을 끝내며 다시 앞쪽의 묘사들을 다시 꼼꼼히 짚어가며 다시 읽게되었지만, 상당한 부분을 읽어 내려가면서도 별 감동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체홉을 들어 말하고 있다는 것을 마지막 끝부분을 읽으면서 이해하게 되었다. 처음, 작품을 읽으며 느껴지는 것은 다만 맹인의 자신있는 태도와 마치 눈을 뜬 것같이 행동하는 것과 말투등은 무언가를 말하려한다는 것과. 그에 반해 이 소설의 화자인 맹인을 초대한 아내의 남편은 이 맹인과는 너무나 상관이 없어서 좀 답답함을 증폭시키고, 그저 막연히 손님을 초대하고 식사하는 것에 목적을 둔, 철저히 구경꾼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 즉 맹인이나 손님의 초대나 아내에 대해 무언가 소통이 잘 되지 않는 상황등이 느껴졌다. 그에 반해 맹인은 죽은 아내의 친구들을 혼자서 기차역을 바꿔 타면서 방문한다든지. 죽은 아내와 결혼한 사실과 실제로 부부관계를 잘 이어가면서 살았던 점. 또한 집에 도착하면서 부터 보여지는 그의 행동과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면서도 별 주늑이 들어있지 않은 태도들의 자세한 묘사들이 대비를 이루는 것을 느꼈다. 또한 대성당이 제목인데 성당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도 시작되지 않았는데, 벌써 페이지는 얼마를 남겨두지 않고 있는 것이 과연 이 소설은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식사 후 우연히 틀어논 TV를 통해 다큐인듯 흘러나오는 소리를 통해 대성당이 소개되는 지점이 되어서 이제 무언가를 말하려는 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기대하면서 읽어내려가는데 과연 맹인의 알고 있음이 화자를 뛰어넘고 있다는 것과 보는듯한 이 소설에서는 이렇게 표현된 부분
“이 사람, 다 괜찮네.” 그 맹인이 말했다. “난 좋아, 자네가 뭘보든지 상관없어. 나는 항상 뭔가를 배우니까. 배움에는 끝이 없는 법이니까. 오늘밤에도 내가 뭘 좀 배운다고 해서 나쁠 건 없겠지. 내겐 귀가 있으니까.” 그가 말했다.
처럼 그는 눈은 가리워져 있었으나 귀를 열어놓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맹인과 마주 앉아 TV를 보고 있는 그는 눈이 멀지도 귀가 막히지도 않았지만, 모든 것이 막혀져 버린 상태로 단절의 상징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자신과 연관이 있는 것에도 별 관심도 없고,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볼 수 있는 눈과 무엇이 펼쳐지고 있는지 들을 수 있는 귀가 막혀져 버려 오히려 맹인보다는 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극명히 대립시킨다. 만일 눈이 가리워지고 귀만 열어 놨어도 맹인처럼 이렇게 그 자리에서 배우는 것을 통해 그는 대성당을 훨씬 더 알 수 있었으리라. 지금 TV를 통해 배우고 있는 맹인처럼. 역시 카버의 소설을 기대했던 것만큼 채워주는 문장들은
“이제 눈을 감아보게나.” 맹인이 내게 말했다. 나는 그렇게 했다. 나는 그가 말한 대로 눈을 감았다. “감았나?”그가 말했다. “속여선 안 돼.” “감았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럼 계속 눈은 감고.”그가 말했다. “이제 멈추지 말고, 그려.” 그는 말했다. 화자의 감겨진 눈과 감겨진 귀가 열림을 향해 진입하는 장면의 묘사이다. 이어서
그래서 우리는 계속했다. 내 손이 종이 위를 움직이는 동안 그의 손가락들이 내 손가락들을 타고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에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묘사는 화자가 얼마나 답답하게 막혀진 상황이였는지 실제로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말하는 문장이다. 이어지는
그때 그가 말했다. “이제 된 것 같은데. 해낸 것 같아.” 그는 말했다 “한번 보게나. 어떻게 생각하나?” 하지만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난 더 그렇게 눈을 감은 채로 있자고 나는 생각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때? 그가 물었다. “보고 있나?”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집 안에 있었다. 그런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나는 말했다.
대성당은 자신안에 갇혀짐으로 인해 눈과 귀를 열어놓지 못한채로 살아온 한 남자가, 보는 것과 들리는 것을 갖춘 맹인을 만나 눈과 귀를 뜨면서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라고 말하며 진정한 것을 보고, 듣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는지는 소상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점은 독자들의 상황에 따라 자신이 무엇을 보아야 하며 무엇을 들어야 하는 지, 독자들의 몫으로 돌린다.
‘깃털들’과 ‘별 것 아닌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읽었는데 두 편다 재미있었다. 역시 책을 내려놓고 싶지않게 만드는 끌림이 있었다. 아이의 죽음과 그 죽음 앞에서 억울하고 격앙된 부부가 빵집 주인을 만나며 그가 만들어 내는 상황으로 동화되어 아이가 죽은 상황 가운데서도 먹고 마시며, 자신들의 아품을 토해내며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별 것 아닌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 좋았다. 카버의 소설은 대성당의 맹인 로버트, 깃털들의 올가와 그 아기, 또 빵집주인과 같은 캐릭터들이 지극히 평범한 속에 갖추고 있는 진수로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갖고 있다. 카버가 소설에 고수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세편의 작품을 읽었지만, 다른 작품들도 기대하게 만든다. 소설을 더 알고 싶다는 도전을 갖게 하는 좋은 소설을 만났다. 그리고 카버가 시인 아내를 만나면서 새로운 삶의 방향으로 터닝하는 때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시들이 궁금해졌다. 그의 시들을 만나보고 싶다.
<이일초> 이 소설을 연극무대로 올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용우> 미국소설은 우리의 추측을 불가하게 한다. 연극 얘기가 나와서인데 맹인의 문 두드리는 장면을 보면서 그 장면이 떠오른다면. 글이 머리와 가슴을 두드리면, 아주 성공한 것이다. 글 속에 아내의 대화나 묘사를 보면, 미국 백인여자의 냉정한 표정이 눈에 보이지 않는가? 291쪽의 장면을 나레이션해보면, — “남편은 계속 어깃장을 놓는다. 그 사람은 아내가 죽었어. 뷰라라는 이름은 니그로야” 흑인들이 잘 짓는 이름이 있다. 애쉴리같은 이름도 흑인들이 많이 짓는 이름이다. 이 소설 안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이 깔려있다. 대가의 많은 장치가 얼마나 깔려있겠는가?
아내가 하던 일을 생각하지 못하고 다룰 정도로 설명하지 않고 묘사로 모든 것을 처리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이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설명하지 않고 묘사로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을 배우기 바란다.
<이일초> 번역은 어떤지 나누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정연희> 가령, ‘작은 것이지만 좋은 것’ (a small but goodthing)을 번역해 놓은 것들이 의역과 직격 중에 의역을 하면 그 의미를 잃는 것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생각해 보라 그 것은 실제로 아이의 죽음으로 마음이 극도로 상한 상태의 부부가 다시 평강을 회복하는 역활을 해준 작은 빵이다. 빵집 주인이 밤을 새워가면서 만든 조그만 계피롤빵. 그래서 그 작은 것이 이들 부부의 마음을 녹이고 결국에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평강을 회복하게 만든다는 내용으로, 번역에 직역보다 의역을 한 것이 더 원작을 살리지 못한 경우이다.
<이용우> 원더풀이라는 낱말이 있다 이 원더풀을 어떻게 번역하겠는가?. 좋습니다. 그러나 좋습니다가 원더플을 넘어서지 못한다. 한국 소설 속의 어떤 것은 한국말이 영어보다 더 나을 수 있다. 언어의 표현 중 영어와 한국어의 엄마와 맘이 가장 가까웁다는데, 여튼 번역의 문제도 소설에 상당한 부분을 좌지우지 한다고 볼 수 있겠다.
<정연희> 영어 에서는 ‘대성당’의 마지막 장면의 남편이 하는 말 “ it’s realy something”이 한국어 번역에서 그만큼의 효과는 기대할 수 없었다. 빵이 주는 상징성도 번역에 문제가 있다.
<좌수아 김> 이 번역이 잘되었는가를 보았는데, 대성당은 2-3개의 번역이 있는데 그래도 김연수의 번역이 가장 잘된 것으로 느꼈다. Me and he me are 처럼 횡설수설하는, 완전 술취한 상태를 그대로 표시했는데 그런것은 한국말로 표현 할 수 없지 않겠는가. 영문에서는 둘이 완전히 범벅이 된 상태를 알 수 있는 표현이다.
<이용우> 김연수 소설가도 자기가 가능하면, 본문의 것을 살리려고 했다고 한다. 이런 작품을 그정도로 번역했다는 것은. 작가로써의 역량이 있어 가능하다고 본다. 번역의 긴장감과 짜임새가 있는 것이 좋았다
<문무웅> 제가 읽은 것으로는. 김연수 소설가의 번역이 잘 된 번역이라고 본다. 그런데 한국에서 사는 사람이라서 미국에서 쓰여지는 가령 296페이지을 보면 “이사람아~ 나야 스카치파지”라는 대화를 번역한 것을 보면, 이것을 받는 남편은 “나보고 이사람이라니”하는 표현은 불쾌감이 잘 나타나지 않았다.조금 맘에 않드는 것은 멀끔멀끔으로 번역한 것은, 단정하게 보이는 것을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표현으로 보았다. 마지막 극명한 진실을 알아가는 문장은 원문보다는 많이 미치치 못해서 이 소설을 좀 맥빠지게 했다는 생각이 든다.
<좌수아 김> 카버의 소설을 보면, 마약을 하는 이야기를 그린 것은 그당시로 보면, 상당히 금기된 것을 과감히 그린것이다. 젏은 작가가 금기를 깨고 현실 그대로 쓴다는 것은, 과감하고 용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용우> 미국의 ‘암웨이’ 회사도 이름이 그대로 나온다
<좌수아김> 카버가 알콜중독자라 하는데 “남은 여생을 포기해도, 나도 술을 끊고 싶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술과 마약등 그 당시 사회적으로 반향적인 내용을 과감히 써내려갔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용기있는 사람인지를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이용우> 대성당 토론으로 시간이 많이 갔습니다. 이 소설집 중에서 가장 짧은 ‘보존’을 읽겠습니다. ‘별것 아닌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 좋은데 이 책중에서 가장 길어요.
남편의 실직과 그 실직한 남편의 집안에서의 태도와 그에 반응하는 아내의 아타까움 그리고 냉장고의 고장으로 인한 음식물의 녹음과 부패 그리고 냉장고를 다시 사야하는 상황들. 들이 이어지면서 보여주는 묘사로 이 단편은 짜여져 있다. 다만 해결이나 무슨 제시가 아니라 단지 상황만을 리얼하게 묘사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정연희> 답답하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말로 하지 말고 묘사해라. 말로하지 말고 눈에 보이듯이 그려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것이 보여진다.
<이용우> 남편의 태도. 앉지도 않고. 상황들이 답답하고 암울하다. 남편의 일만 생기면 다 해결되는 일이다. 고장난 냉장고도 새것으로 바꿀 수 있다. 아주 우울한 상황. 그 상황에서 냉장고가 고장나고 모든 먹을 것이 썩고 있다. 왜 아이는 없는 것으로 그렸을까? 김연수의 번역인가? 다른 번역과는 단어가 약간 다르다. 한 문장이 완전히 빠진 것도 있다. 대성당 보다는 훨씬 더 상황을 짐작하기 쉽다. 우리 같으면, 답답한 상황을 잘못쓰면, 답답하다는 말로 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소파에서만 뭉게는 남편을 보면 우라통이 터지는 것이었다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이 영화를 보듯이 장면을 묘사하면 머리에 나온다. 우리가 읽었을 때 그림으로 그려지게 써야한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게가 아니라. 읽는 동안 독자가 무엇을 계속 생각하게 만드는 글을 써야한다. 예를 들어 요즘 연극을 보면 관객을 참여시킨다. 쓰는 사람이 읽는 사람을 참여시킨다. 내가 그의 글을 읽었을 때 할일이 있는 것이다. 글을 보고 있다가, 바싹 닥아들게 글을 써야한다는 것이다. 읽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가슴을 뛰게 하는 글을 써야하는 것이다. 이렇게 정상의 한국 소설과 미국 소설을 공부하는 이유는, 좀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함이 아닌가? 누구나 자기의 스타일이 있겠지만, 좋은 작품을 읽고 달라진 것이 어떤 성과와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 보여주어야 한다. 업그레이드를 쓰는 이와 읽는 이가 알게 된다는 것이다. 좋은 글을 직접 쓰게되면서, 소설적인 기법을 수필과 시에 도입하면 생동감 있는 글을 쓰게 될것이다. 오규원 시인의 시는, 날이미지로 카버의 소설을 읽듯 그림으로 탁 다가온다. 마치 연극을 보는 것같다고 느끼는 것처럼. 살아있는 엑기스를 끌어 내 살아있는 글과 좋은 작품을 써야한다. 산문시는 왜 나왔나? 보편적인 것에서 새로운 시도로 나온 것이 산문시가 아닌가? 글을 쓰는 사람은 어느 분야고 어느 쟝르에서도 배워야 한다. 드라마에서도 어느 장면에서는 고급스런 소설을 만들 수 있다. 그러니까 모든 것에서 배워야 한다. 이 강의가 12월에는 어떻게 되는가? 올 한해를 소설공부로 보냈는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가?
<정연희> 저는 독서클럽을 하는데 한국 소설을 보면 교훈적인것을 다루는데, 미국소설은 교훈에서 자유하다.
<이용우> 한국에서 보는 시선은 시상작품에 기준이 적용되는 것으로, 그런 경향이 있다. 전에 송상옥 선생님 말씀에 우리가 사람 사는 이야기를 쓰면, 작가가 의도했든 안했든 주제가 들어가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쓰는 사람도 아무렇게나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읽는자가 무엇이든 얻게 된다. 가령 카타르시스나 기쁨을 받게 된다. 상황이 같은 것을 써도 처음에 글을 쓸때, 읽는 독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기로 마음을 정했으면, 작가가 마칠 때가지 따듯한 마음의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로 모래한 줌을 탁 뿌리면, 모래가 잔잔히 박히듯이 어미 하나 토씨 하나도 선택할 때 그 느낌이 쫙 깔리게 써야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끝까지 그 기조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령 하루종일 글을 쓰는데 매달릴 수 없어서 얼마간 멈췄다가 다시 써도 그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앞의 글을 읽으면서, 그 기조로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작품이든지, 대게의 작품들은 정신의 고혈을 짜내서 쓰는 것이다. 예로 김영하가 번역을 하면 김영하의 소설처럼 번역을 하게 되는 것을 볼 때, 작가의 많은 부분들이 그 글 속에 투영된 것을 벗어나기 어렵다고 본다.
다음 달은 12월로 이 해를 마감하는 달이다. 여러분들의 생각을 좀 알고 싶다. 12월이지만, 남들 다하는 송년회보다는 1년간 산문과 소설을 공부하면서, 여러분들의 바램이나, 글쓰기에 대한 생각들,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을 등을 나누고 싶다. 나는 여러분이 정성을 들여 써온 글을 분석하고 또 도움이 될 수 있는 옳은 방향을 제시해 주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니 다음 달에는 모두 허심 탄회하게 글에 대한 마음들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 것도 의미가 새로울 것 같다. 그리고 내년에는 실제로 여러분들이 소설을 쓰고 그 소설로 응모하여 결실을 이루는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 일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다음 달에 우리 좋은 글쓰기를 위하여 여러 의미있는 의견들을 나누고, 도전도 되는 시간으로 진행했으면 좋겠다.
참석자; 자리 순 존칭 생략 (이용우, 정해정, 조정화, 이혜숙, 이일초, 좌수아김, 조만연, 이정호, 이만우, 이선자, 정조앤, 박춘희)
*** 이 글은 구술로 강의하신 내용을 받아 적은 것입니다. 빠진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알립니다. 다만 글을 쓰는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올립니다. 양해를 바라오며 감사를 올립니다.
<글마루문학회 총무 이선자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