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천포 팔포 바닷가 / 박재삼 시인
/배한봉
올해 6월은 박재삼(1933년~1997년) 선생(이하 존칭 생략)이 타계하신 지 만 7년이 되는 달이다. 20대에 「울음이 타는 가을강」이라는 절창을 뽑아내고 전후 한국 서정시의 대표적 시인으로 우뚝 섰던 그는 지난 1997년 6년 8일 [丁丑年 5월 4일(음)] 새벽, 당뇨 합병증과 신부전증 등으로 30여년의 투병 생활 끝에 영면에 들었다. 유택은 유언에 따라 충남 공주군 의당면 도신리 도덕교회 바로 뒤 양지바른 언덕에 마련되었다. 미당으로부터 "한(恨)을 가장 아름답게 성취한 시인"이라 불렸던 그가 떠난 빈자리는 7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후학들의 가슴을 허전하게 하고 있다.
그는 1933년 일본 동경에서 태어났으나 만 3세가 되던 때 외가가 있는 삼천포(현재 사천시)로 나와 노산(魯山) 아래 목섬이 보이는 팔포 바닷가 마을(동서금동)에서 성장했다. 출생지는 아니지만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을 보낸 이곳은 그의 고향인 셈이다. 어머니는 광주리로 멍게 장사를 했고 아버지는 부두의 지게 짐꾼이었다. 나는 열 몇 살의 어린 그가 아버지를 찾아 걸어다녔을 삼천포항 부두, 장사를 하던 어머니의 힘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겠다는 효성으로 매일같이 달려나갔던 어판장에 서서 먼 바다를 본다. 짙은 해무가 섬들을 흐릿하게 가두고 있다. 눈길을 거두면 항구에 정박한 수 백 척의 고깃배들이 정오의 햇빛 속에서 출렁이고, 한 떼의 갈매기 무리가 끼룩거리며 날아간다.
"내 눈물 마른 요즈음은/눈에도 아니 비치는 갈매기야.//어느 소소한 잘못으로 쫓겨난/하늘이 없던, 어린날 흘렸던,/내 눈물의 복판을,/저승서나 하던 짓인가./무지개 빛을 긋던 눈부신 갈매기야."(「눈물 속의 눈물」 중에서) 그가 삼켰던 눈물 속에 아롱지던 그 갈매기의 비행인가. 먼바다로 날아간 갈매기들은 한 점씩 해무에 묻혀 사라진다. 부두에는 옛날처럼 지게꾼도 없고, 대낮이라 그런지 선창도 의외로 한가하다. 회사에서 단체로 여행을 왔는지 막 도착한 몇 대의 관광버스에서 소란스럽게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선창을 한 바퀴 휘둘러 나는 그가 자주 산책하며 사색했던 노산공원을 향한다.
항구에서 노산공원 입구까지는 10분 거리. 1990년대 초에 나는 그와 이 길을 걸었던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밥 먹고살기조차 어려워 초등학교 졸업 후 삼천포여중에서 사환 노릇을 했지"로 시작하여 처음 시와 만났던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삼천포여중에서 사환 노릇을 하던 중 교장의 도움으로 야간중학교에 입학, 2학년 때 국어 교사였던 초정 김상옥 시인을 만나 시를 공부하게 되었다고 했다. 생애의 전환점은 어떤 스승을 만나느냐에 따라 바뀐다며 살풋 미소를 짓던 그의 눈빛이, 생각하면 지금도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생전에 그는 힘든 학창시절이었지만 시를 만나게 돼 참 행복했었다고 그 시절을 돌이키곤 했다.
노산공원은 옛 삼천포시 승격 해인 1956년 도시계획에 의해 시민의 유일한 휴양지로 만들어진 곳. 북으로 와룡산, 각산 등과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으며, 남으로 한려수도의 거울같은 맑고 푸른 바다와 크고 작은 유·무인도 그리고 고깃배와 유람선이 보인다. 노산은 시의 중심부인 선구동과 동서금동의 경계에서 남쪽바다로 돌출한 갑(岬)의 독메로 물이 들 때에는 섬이 되었으나 시가지를 형성할 때 해안일대를 매축하여 현재와 같이 완전히 육지와 연결되었다고 한다. 시가지가 형성되기 전 노산에 서당인 호연재가 있었는데 여기에 다니기 위하여 큰 돌로 징검다리를 놓았던 바, 당시 사람들이 이 징검다리를 '노다리'라 부르고, 다리 이름을 따서 '노다리산'이라 하다가 노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고, 호연재의 팔문장중에 '노(魯)'라는 호가 있는 선비가 있어 노산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이곳은 일제 초기엔 현 백진학원의 전신인 보흥의숙(普興義塾)의 그 전신인 광명의숙(光明義塾)을 설립하여 신문화운동과 민족의식 배양의 요람지가 된 곳으로 시가지 일대와 한려수도를 굽어보는 풍경이 아름다워 시의 승격과 동시에 공원으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공원의 숲길을 걸어 팔각정, 비둘기집, 충무공탑, 충혼탑을 지나면 시 「천년의 바람」이 새겨진 박재삼 시비가 나온다. 솔숲이 내뿜는 맑은 바람이 내 목덜미를 서늘하게 적신다. 시비 주변의 동백나무 몇 그루도 목덜미가 서늘하게 젖어있다. 시비 앞면에는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아, 보아라 보아라/아직도 천 년전의 되풀이다." (「천년의 바람」중에서)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글쓴이의 이름(이동기)이, 아래 기단에는 "우리 고장이 낳은 시인 박재삼의 시비를 그가 늘 올라 바라보기를 즐기던 이 한려수도의 한 복판 노산 공원에다 세워 세월과 함께 오래 기린다. 1988. 4. 10. 삼천포 청년회의소"가 새겨져 있다.
그때 그는 이 자리에 앉아 옛날이 떠올랐는지 피우던 '장미' 담배를 끄고는 애창곡 '홍도야 우지마라'를 나지막하게 흥얼거렸었지. 나는 숲 사이로 드러난 바다를 본다. 막 여름을 향해 줄달음치는 늦은 봄의 바다는 그의 표현대로 화사한 꽃밭 같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그 풍부한, 화사한 상상력을 키웠을 것이다.
1
화안한 꽃밭 같네 참.
눈이 부시어, 저것은 꽃 핀 것가 꽃 진 것가 여겼더니, 피는 것 지는 것을 같이한 그러한 꽃밭의 저것은 저승살이가 아닌 것가 참. 실로 언짢달 것가 기쁘달 것가.
거기 정신없이 앉았는 섬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살았닥 해도 그 많은 때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숨소리를 나누고 있는 반짝이는 봄바다와도 같은 저승 어디쯤에 호젓이 밀린 섬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 것가.
2
우리가 소싯적에, 우리까지를 사랑한 남평 문씨 부인은, 그러나 사랑하는 아무도 없어 한낮의 꽃밭 속에 치마를 쓰고 찬란한 목숨을 풀어 헤쳤더란다.
확실히 그때로부터였던가, 그 둘러썼던 비단 치마를 새로 풀며 우리에게까지도 설레는 물결이라면,우리는 치마 안자락으로 코 훔쳐주던 때의 머언 향내 속으로 살닳아 마음닳아 젖는단 것가.
*
돛단배 두엇, 해동갑하여 그 참 흰나비 같네.
─ 「봄바다에서」 전문
김강태는 1997년 월간 『현대시』 6월호 커브스토리에서 이 시에 대한 감상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광호에 의하면 박재삼 정서의 원형은 '슬픔'이다. 나는 이를 '서러움'으로 보고 시인에게 한없이 취한다. 유독 박재삼의 서러움은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과 품새가 같다. '가난'이 모티프지만 그의 가난이 무척 아름다운 걸 어쩌랴. 그로서는 진정 하염없고 찢어지는 아픔이었지만, 내겐 그것이 사랑을 빗댄 '서툰 기쁨'이거나, '소년으로 돌아오는/(이)신선티 신선한 허망'(「신록에 접을 붙여」)에 가깝다. 그의 정서가 담긴 고향의 원형도 물비늘과 햇빛에 반짝이는 미류나무로 변신하여 존재한다. 인용시 「봄바다에서」에 의하면 봄바다의 결은 아주 비극적이나, 상대적으로 화사한 몸짓을 갖는다고 한다. 죽음마저도 전혀 아름답게 치환시킬 줄 아는 능력이 뛰어나다. 여기서의 가난은 추억이지 상실이나 아픔이 아닌 것이다. 그의 사랑은 이처럼 진실한 노래로 나온다."
시비를 중심으로 왼쪽으로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목섬이 보인다. 목섬은 서금동 앞 노산공원 동쪽의 무인도로 바닷물에 침식된 기암절벽과 섬에 우거진 노송으로 장관을 이루며 부근 일대는 해삼, 전복 등 해산물이 많아 옛날에는 해녀들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섬은 동서금동 일대의 자연적인 방파제가 되어 이곳 주민들의 목숨과 같다하여 목섬이라 불리게 되었다. 목섬. 그렇다 나는 오늘 목섬을 만나러 온 것이다. 아니다. 이 언덕에 앉아 그 목섬을 망연히 보고 앉았을 시인 박재삼, 그를 만나러 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없다. "화안한 꽃밭 같네, 참/………/돛단배 두엇, 해동갑하여 그 참 흰나비 같네". 그 화안한 꽃밭 같은 고향 삼천포 바다 너머의 세계로, 흰나비처럼 그는 날아 가버리고 말았다. 그가 없는, 목섬이 보이는 노산공원의 언덕. 그가 앉았을 자리에 나는 턱을 괴고 앉는다. 김훈의 표현을 빌리자면 "햇빛이 '쟁쟁쟁' 내리쬐는 바다는 그 끝없는 무정형의 출렁거림으로" 빛나고 있다. 불운한 그의 집안 내력이 파도에 실려 철썩이는 듯하다. 그의 집안의 남자 어른들은 고무신짝 같은 작은 배를 타고 이 바다로 나간 후 돌아오지 않고, 소박을 맞은 이모는 모래밭에 고무신을 곱게 벗어놓고 그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래서일까.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그가 몹시 슬픈 표정으로 내 옆에 앉아있다. 늦게 핀 한 송이 붉은 동백꽃으로.
우리의 바닷마을에 옛날엔 바람난 가시내가 있었다 한다. 바닷바람이 무서웠더란다. 치마 끝에도 이는 바람은 꼭 귀신(鬼神) 소리더란다. 사람들의 눈 흘기는 눈짓보다도 더욱 몸을 휘감고 보채는 바닷바람이었더란다. 무서워 방에 앉아 있을라치면 또한 아쉽기도 한 바람소리였더란다. 그 바람의 한 자락을 잡을락했던지는 모르지만 하루에도 몇 차례를 방문을 차고 머리 헝클어진 채 바다 쪽으로 내닫더란다. 그러나 바람에 얹힌 집채만한 물고래에 무서움 질려 집으로 돌아오곤 하더란다.
바람에 못견디는 그짓 밖에는 아궁이에 한 고래 불 때는 일이 그 전부(全部)였더란다. 부지깽이로 거둔, 불에도 홀리어 눈이 쓰린 욕보던 가시내였더란다.
그런 세월과, 그런 갈증과, 그런 마을에, 바람 기운이 없는 어느날 앞바다를 섬 하나이 흘러오고 있었더란다.
마침, 불 때나 볼 붉은 그 가시내가 부지깽이를 든 채 나와선, 가슴 차도록 섬이라도 안으면 살 길이나 열리리라 믿었던가 한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더란다.
그때부터란다. 우리의 바닷마을의 바람막이 목섬이 동백기름을 바른 머리 태(態)의 숲으로 시집살이 오래오래 살아온단다.
─ 「목섬 이야기」 전문
시비에서 이삼백 미터 정도를 걸어가면 바닷가 바위 위에 목조로 만든 정자가 서있다. 일명 육각정. 이곳에 서면 한려수도의 전망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자에서 내려서면 바닷가를 거닐며 파도를 느낄 수도 있다. 청정해역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물이 맑고 푸르다. 생전에 그가 청주를 즐겨 마셨던 것도 이런 빛깔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곳 바닷가는 모두 바위로 둘러싸여 있어 주위경관이 아름다워 사진 찍기에도 좋다. 이곳이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팔포 바닷가다.
해안을 따라 왼쪽으로 이삼백 미터를 걸어가면 식당과 상가가 빼곡하게 서 있다. 팔포는 사천시 서금동과 동금동사이에 있는 한내천 중심지역이며, 옛날에 한내의 물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 여덟 팔자같이 벌어졌다고 해서 팔문장, 팔장수가 났다고 했으며 지금의 팔포라고 불리게 되었다. 노산 기슭을 따라 형성돼 있던 마을은 20여 년 전 갯벌이 매립되면서 본격 상업지역으로 개발되었다. 그는 이 마을에서 3살 때부터 20살이 넘도록까지 살았다. 여관 종업원으로 취직한 형이 가져다주는, 손님이 먹다 남긴 김밥을 바닷가에서 씹어먹기도 했고, 기부금이 없어 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하던 날도 그는 물결높은 바다와 거기에 떠가는 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나온 형이/花月여관 심부름꾼으로 있을 때/그 충층대 밑에/옹송거리고 얼마를 떨고 있으면/손님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싸서/나를 향해 남 몰래 던져 주었다./집에 가면 엄마와 아빠/그리고 두 누이동생이/부황에 떠서 그래도 웃으면서/반가이 맞이했다./나는 맛있는 것을/많이 많이 먹었다며/빤한 거짓말을 꾸미고/문득 뒷간에라도 가는 척/뜰에 나서면/바다 위에 달이 떴는데/내 눈물과 함께/안개가 어려 있었다."(「추척에서 30」전문) 그는 멍게장수였던 어머니를 도와 멍게를 까며 밤을 새우던 유년시절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난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다시 생각키 어려운 지독한 가정환경을 김훈은 이렇게 정리한다. 그의 가난은 빈곤이 아니라 ‘서정’이라고.
나는 방파제에 서서 다시 목섬을 본다. 한 달에 두 번씩(매달 음력 1일, 15일) 바닷물길이 열려 섬과 육지가 연결되는 현상을 볼 수 있는 목섬이 코앞에 있다. 그는 목섬을 보며 바다에 뛰어들어 죽은 이모를 생각했던 것일까. "볼 붉은 그 가시내가 부지깽이를 든 채 나와선, 가슴 차도록 섬이라도 안으면 살 길이나 열리리라 믿었던가 한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더란다."고 노래했던 그 목섬.
그는 젊은 시절에 이런 슬픔을 소설로 쓰려했던 적이 있었다. 시보다는 아무래도 소설이 생활에 도움이 될 것이고, 또 평소 힘이 되어주었던 서정주, 박경리, 김동리 선생 같은 분들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 편의 소설도 완성하지 못했다. "고치고 또 고치며" 한 줄의 글이라도 완벽을 추구했던 그에게 몇 백 매, 혹은 천 매를 넘어서는 원고는 성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시인으로 남아야 한다는 운명적 하늘의 뜻이 그에게 소설가로서의 길을 허락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한봉이, 자네도 소설 안 쓰기 잘 했어. 시 쓸 사람이 소설에 눈을 돌리면 죽도 밥도 안 되는 법이야." 그의 목소리가 목섬을 넘어온 봄바다 바람인 듯 십 몇 년의 세월을 거슬러 내 귓전을 울린다.
또 그의 젊은 시절 추억 속에는 한 편의 시와 같은 사랑이 있다. 대상은 E대학 졸업반 여학생. 그는 현대문학에 근무하며 고대 국문과 2학년에 재학중인 때였다. 박경리 선생의 작품을 교정해 주고 교정료를 받은 날 그는 불쑥 그녀를 찾아가 사랑을 고백했다. 그녀는 삼천포여중 급사생활을 하며 야간 중학교에 다닐 때 만난 같은 또래의 여학생으로 아주 친하게 지내던 친구였다. 그는 우정을 사랑으로 꽃피우려 했으나 그녀는 어린 시절 순진한 친구로만 여기고 있었고, 이미 정혼자가 있었던 것. "그렇다,/너를 사랑하였을 적에는/나에게도 신바람나는 장단으로/머리카락이 바람에 출렁대기도 하더니/결국은 바다에 드는 강물로서 그 소리 없어지고/찬란한 반짝임만 남을 일"(「찬란한 반짝임만」 중에서)이라며 사랑을 아파했던 인간 박재삼. 그에게 시는 그의 삶과 존재를 증명하는 노래였던 것이다.
"시는 노래이고, 노래는 참말인기라." 시는 노래여야 한다고 굳게 믿으며 한국 전통 서정을 아름답도록 구슬프게 노래했던 시인 박재삼. 시와 삶과 자연과 사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그는 "이슬처럼 빛나게 살아야 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그렇게 먼 길을 가고 말았다. 그의 서적과 유품은 한국화약이 춘천에 건립할 문학박물관 內 박재삼관에 기증할 계획으로 유족들이 정리해놓았다고 한다. 나는 팔포 바닷가를 빠져 나와 옛 삼천포시 청사에 있는 그의 시노래비 「젊은 삼천포」앞에서 다시 한 번 가만히 눈을 감는다. 곳곳마다 그의 시향(詩香)이 배인 삼천포의 바람은 따뜻하고도 깊었다.
(계간 '시선' 2003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