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너였어
류시경
저녁마다
시치미 떼다가
아침마다 들통나는
아니라고 우기다가
몰랐다고 죄송하다 하는
너의 순수는
도대체 뭐니?
어둠을 살라먹고
토해내는 너의 고백은
해 뜨면 오므리는
나팔꽃 입술
류시경 시인의 시, 「그래 너였어」를 읽습니다. 2인칭 ‘너’는 1인칭 ‘나’와 다른 존재입니다. 다르기 때문에 ‘너’는 ‘나’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배제의 대상이기도 하고 관찰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시, 「그래 너였어」의 ‘너’는 어떤 존재일까요. 표면적으로는 ‘너’는 ‘나’와 다른 존재로 관찰의 대상입니다. 아침과 저녁이 달라지는 이중적인 존재입니다. 깊이 새겨 읽으면 ‘너’는 또 다른 ‘나’입니다. 그리고 “저녁마다/시치미 떼다가/아침마다 들통나는”에서 보듯이 아침과 저녁이 다른 인격체입니다. 그리고 “아니라고 우기다가”도 곧이어 “몰랐다고 죄송하다”며 잘못을 인정하는 진실한 인격체이지요.
그렇지만 ‘아침’과 ‘저녁’에 나타나는 ‘너’는 정반대의 인물로 나타나지만 가식과 허위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아침의 너’도 나름으로 진실한(순수한) ‘너’이고 ‘저녁의 너’도 저녁이 요구하는 바를 실행하는 순수한 ‘너’입니다. 주어진 상황에 진실과 순수함을 다하는 ‘너’입니다. 그러면 ‘아침’과 ‘저녁’의 ‘너’는 왜 상반되는 인물로 나타나는가요. 이 시에 나타나는 ‘아침’은 ‘시작, 희망, 활기’와 같은 보편적 아침에 대한 이미지가 아닙니다.
이 시에 나타나는 ‘너’의 ‘아침’은 ‘현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현실’은 생활, 삶의 현장이지요. 그 현실에서는 ‘나’를 ‘현실’에 적응시켜야 하는, ‘자아’를 잊고 ‘현실’에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침’은 ‘자아상실’의 시간이 됩니다. 상대적으로 ‘저녁’은 현실에서 ‘나’로 복귀하는 ‘자아회복’의 시간입니다. 다시 말해 ‘나만의 이상’을 꿈꾸는 시간입니다. ‘이상’은 “어둠을 살라먹고/토해내는 너의 고백”에 지나지 않는, 어둠(저녁)의 시간이 지나고 “해 뜨면 오므리는” 즉 아침이 오면 체념하고 재빠르게 현실로 돌아오는 “나팔꽃 입술”입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돌아가 이 시에 나타나는 ‘너’는 누구인가? 바로 ‘나’입니다. 다시 말해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나’의 이중적인 삶에 대한 회의와 성찰인 것입니다. 이런 회의와 성찰을 통해 시인은 이상적인 삶의 실천을 끊임없이 꿈꾸는 것입니다.
첫댓글 많이 부족한 시에 신선한 의미를 부여해주셔서 부끄럽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좋은 글 감사히 읽습니다.
고맙습니다
해 질때 화장하고 집 나가서, 아침에 허느적거리며 돌아와 누워있는 모습에 열통이 터졌는데...
시가 너무 맛깔스럽습니다.
감동입니다~
나팔꽃이 항의 하네요
색색마다 성깔 다르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