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같이 울고 같이 슬퍼해 주는 곳 (루카 17,20-21)
우리는 흔히 하느님 나라는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하느님 나라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음을 강조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태어나 관계 속에서 죽습니다. 사람에게 생기는 대다수의 문제는 관계 속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관계가 건강하여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공동체를 하느님 나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위, 우리 이웃과 건강하게 관계 맺고 살 때 비로소 그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삶이 힘겨울 때 누군가가 자기 손을 잡고 같이 울어 주기를 바랍니다. 내 감정에 공감하고 나를 걱정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깨우쳐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출신 심리학자인 브루노 베텔하임은 “나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게 한 힘은 누군가 밖에서 나의 운명을 염려하고 있다는 작은 믿음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기도와 단식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수단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고 말한 것도 이와 비슷한 의미입니다. 기도는 내 마음 안에 낀 영혼의 두꺼운 때를 씻어 내기 위한 것으로 기도를 통해 마음을 씻어 내면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이 보이고, 하느님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기도는 나와 다른 사람,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만들어 주고, 서로의 삶을 나누는 통로를 만들어 주는 거룩한 행위이지요.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해도 그 기도가 오로지 자신과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울어 주는 것이 아니라면 그 기도는 진정한 기도가 되기 어렵습니다.
단식 역시 비슷합니다. 하루에 몇 끼를 굶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내가 가진 것을 얼마나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었는가, 내가 얼마나 희생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왔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기를 먹지 않고 밥을 먹지 않는 행위 자체보다 내가 먹지 않은 고기와 밥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진정한 단식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며칠을 굶어도 이웃을 위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다 부질없는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도 나의 상실감이나 슬픔을 완전히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적어도 황량한 내 마음에 추운 바람이 드는 것을 막아 주는 벽과 같은 역할을 해 줄 수는 있습니다. 슬픔은 관계 안에서 생깁니다. 그리고 슬픔을 희석시키고 감소시키는 것도 역시 관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마음이 힘겨울 때 괜히 강한 척 혼자 있지 말고, 같이 울고 슬퍼해 줄 수 있는 이들에게 가야 합니다. 그러한 이들이 있는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이기적인 성향을 버리고 서로 나누는 삶을 살려고 할 때에, 온 세상이 하느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