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너머
하기야 그림일 뿐이다. 사진처럼 있는 그대로 찍은 게 아니라 붓으로 그린 병풍이니 무얼 배치한들 이상할 리 없다. 석류와 산호, 잉어와 어항, 원반 모양의 옥벽과 괴이한 돌까지. 선비의 학덕을 장려하기 위해 그렸다는 책가도에는 서책보다 다채로운 물건이 가득했다. 장수를 기원하고, 출세를 염원하며, 부귀영화를 소원하는 책거리 그림이 주객이 전도된 듯 보였다. 책을 중심으로 펼쳐진 공간을 그리기보다 사이에 놓은 물건에 열망을 응집한 것 같았다. 부처의 손을 닮은 저 감귤은 실재하는 것일까. 술과 안주를 담은 주합은 어떤 의미일까. 한참 그림에 빠져들던 그때, 오래전 보았던 책장 하나가 여덟 폭 병풍 속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고등학생 때였다. 영문학 교수라는 친구 아버지의 서재를 열자마자 폭풍처럼 몰아치는 활자의 함성이 들렸다. 책등에 새겨진 작가의 이름을 확인하며 환희와 부러움, 그리고 시기, 질투의 감정이 몰려와 한꺼번에 뒤엉켰다. 어지러운 종이 묶음 사이에서 한 권의 책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빌린 후 돌려주지 않았다. 돌려주기 싫었다. 수 만권 장서 가운데 이 책 한 권쯤 빠진다 해도 티 나지 않으리. 졸업 후 친구가 다른 동네로 진학했을 때, 책이 비로소 내 것이 되었다고 안도했다.
대학 입학 후 첫 교양 영어 시간, 출석을 부르던 교수님이 내 이름을 호명하더니 목을 빼고 얼굴을 찾았다.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으며 “나 선미 아빠야. 『김약국의 딸들』은 재미있었니?”라고 물었다. 그 책을 여기서 다시 마주할 줄이야.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단순히 책 한 권의 문제가 아니었다. 책을 돌려주는 행위가 내 전체를 돌려보내는 양 두렵고 불안했었다. 마치 공소시효가 끝났다고 방심하다 뜻밖의 순간 정체가 드러난 사람처럼, 결국 발각되고 말았다.
그때부터였을까. 후회와 죄책감은 책에 더욱 몰두하게 했다. 어딜 가든 남의 책꽂이에 눈길이 갔다. 제목을 훑는 것만으로도 말이나 행동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초상이 보였다. 무엇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지, 어떤 책에서 비롯되어 어디로 흘러가는지. 말이 뼈의 골절과 탈구를 확인하는 X-ray라면, 글은 복부 장기까지 보여주는 CT 같았다. 독서 목록은 그보다 더 정교한 MRI처럼 느껴졌다. 근육과 인대, 신경과 혈관까지 알려주는 MRI처럼, 책장은 생각의 흐름과 지나온 흔적을 따라 사고의 원천까지 들여다보게 했다.
아이 키우는 집 서가에는 부모가 스며있었고, 작가의 글방에는 고독이 어른거렸다. 저명인사의 인터뷰를 보면서도 발언 내용보다 배경에 있는 책장에 시선이 갔다. 철학자의 독서 목록을 따라 고전에 심취하기도 하고, 역사학자처럼 세계지도와 연표를 벽에 걸고 시간을 거슬러 오르기도 했다. 예술가의 서재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빛의 내력을 읽었고, 헌법과 역사서로 빼곡한 정치인의 방에서는 그이가 꿈꾸는 세상의 뿌리를 엿보았다.
많은 책장 중에서도 소설가 김훈의 책꽂이는 인상적이었다. 벽면 네 개를 꽉 채우고도 바닥과 책상이 책으로 어지러운 다른 명사들과 달리 그의 공간에는 꼭 필요한 도서 몇 권과 자전거뿐이었다. 책장은 오직 생각의 도구로만 존재했다. 단출한 그곳에 『아함경』이 있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문구를 길어 올렸을 때, 그동안 괴롭히던 고민들이 나를 향한 질문이었다는 걸 알았다. 내가 채워야 할 것은 책장이 아니라 내 안의 빈자리였다. 순간 용기가 솟았다. 수많은 불면의 밤이 곧 해결될 듯싶었다.
텅 빈 작가의 책장과 내 책꽂이를 나란히 바라보았다. 어른이 되면서 제일 좋았던 것은 책을 산다고 해서 더 이상 혼나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 번 돈 대부분을 책값에 썼다. 부모 가르침대로 검소히 살았지만 활자를 향한 갈증만은 통제할 수 없었다. 책꽂이가 채워지면 지혜도 깊어지리라 믿었다. 읽는 속도가 사는 속도를 당해내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언젠가 읽을 거라며 못 본 척했다. 같은 책을 사는 실수를 몇 번째 반복해도 별일 아닌 척 치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토록 얻고 싶었던 지혜는 소유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
풀리지 않은 감정들이 연신 물음표를 던진다. 왜 그때 책을 돌려주지 않았을까. 책 속에서 나는 무얼 찾았나. 잃어버린 조각을 맞추는 내게 책가도가 물었다. 단번에 깨닫지 못한 걸 탓하듯 이제는 외면했던 진실을 마주하라 명한다. 병풍에 그려진 물건들은 각기 다른 세계를 이으며 주인을 비추는데, 너의 책꽂이는 무엇을 내포하는가. 나야말로 깨달음을 향한 갈망과 더 나은 삶의 열망을 책장 담뿍 담았다. 단순한 책들의 집합이 아니라 욕망이 투영된 거울이었다. 김훈의 책장에서 알아차렸다고 여겼으나 순간일 뿐이었다. 며칠 전 책선반에 올려둔 모과도 단순한 오브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향기롭게 살고픈 작은 바람을 모르는 새 담았나 보다.
활자를 헤맨 모든 순간이 모여 현재 내가 되었다. 지금껏 이끌어 준 시간에 고개를 숙인다. 내면을 읽던 손끝을 움직여 조심스레 책가도를 그린다. 평생 간직할 책 몇 권과 꼭 필요한 물건 몇 개를 이리저리 놓아보고, 끝자락에는 내일도 올려놓는다. 서가에 있으면 입체파 화가가 된 기분이다. 다양한 색채와 크기가 조화를 이루며 제자리를 찾는다. 손끝으로 넘길 때마다 미세하게 전해지는 종이의 촉감, 속삭이듯 사각거리는 소리, 낡은 책에서 나는 묵은내와 시큼한 새 책 냄새가 오감을 자극한다. 감각이 기억과 감정을 담은 상자의 증언을 부추긴다. 젊은 날의 방황과 지나온 실수들이 손을 흔들고, 함께 나눈 대화가 종이 위에 아롱진다.
이제는 책 사이에 살기보다 책과 함께 살고 싶다. 문장의 행간에 머물며 새 화두를 찾고, 이미 읽은 책과 지금 읽는 책이 어울려 균형을 이뤄 준다면 더 나은 어른이 되지 않을까. 어지럽게 휘말렸던 마음을 정리하니 그 자리에 고요가 찾아온다. 적막 틈에 오롯이 섰다. 스쳐 간 페이지들이 명확한 빛이 되어 먼 곳을 비춘다. 과거의 궤적이자 미래로의 스포일러인 책장 앞에서 오늘의 책을 펼친다. 오래된 책가도 앞에서 나를 그린다.
심사평
성경아 씨의 「책장 너머」는 “활자의 함성”에 민감했던 어린 시절 작가가 이제 자신이 채워야 할 것은 책장이 아니라 자신 안의 빈자리였음을 알아가는 일종의 성장담입니다. 그동안 스쳐 갔을 낱장들이 빛이 되어 먼 곳을 비추는 시간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끝세로줄을 위하여」는 오래된 악보집 오선지 마디마다 줄이 그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끝세로줄’에 대한 사색을 이어간 작품으로써, 아버지와 자신의 병력病歷을 통해 오늘도 한 발짝씩 끝세로줄을 향해 나아가는 아름다운 모습을 담았습니다.
이제 성경아 당선자는 삶의 근원적 이법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예술적 감각을 열정적으로 써갈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요한 순간에 오히려 소리를 발견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가는 역설적 사유는 ‘작가 성경아’를 구성해갈 몫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 산문 미학의 지남指南이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당선자의 문장이 가지는 예지와 상상력은 우리 수필의 심미적 결정結晶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더 깊고 넓은 곳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축하합니다.
심사위원: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교수)_글, 곽효환(시인, 전 한국문학번역원장)
[출처] 2025년 상상인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 _ 성경아|작성자 상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