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조심 더 깊게파다 손 벨라 / 성욱
청양 문화체험학교 성 욱 교장
"등줄기에 땀이 주르륵 흐르고, 조그마한 학교 운동장엔 긴 풀만 수북이 쌓여 있지만 아이들은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새끼손가락 크기만한 나무토막을 정성스레 잡고 떨리듯 조각칼을 댄다. 세밀히 줄을 긋기도 하고 아래 부분을 한움큼 푹 파내다 보니 어느새 씽긋 웃는 모습이 영락없이 장승을 빼닮았다. 지난달 30일 상갑리 문화체험학교 '소형 장승 깎기 프로그램'의 한 모습이다.
충남 청양군 대치면 상갑리 가파(嘉坡)마을. '아름다운 언덕'이란 뜻의 마을 이름처럼 예부터 이곳은 호리병 모양의 분지 지형으로 빼어난 경치를 자랑했지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탓에 청양에서도 가장 외진 곳으로 꼽혔다. 그러나 버려졌던 폐교가 3년 전 '문화체험학교'(041-943-4945)로 간판을 바꿔 달면서 가파 마을은 도시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고장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지난해엔 1200여명, 올해엔 7월말까지 벌써 1000여명이 이곳을 찾았다. 방학을 이용해 '농촌 체험'을 하기 위한 학생들이 대다수지만 주말을 이용한 가족 단위 방문자들도 적지 않다. 청양군 농업기술센터 김미숙 계장은 "가파 마을은 도.농 교류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라며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단 58가구만이, 그것도 대부분 60~70대 노인네들이 사는 이곳이 이토록 변신을 하게 된 데에는 문화체험학교 성욱(49)교장의 힘이 컸다.
Ŝ년 전 제가 이곳에 내려올 때만 해도 근근이 목숨이나 연장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성 교장은 서울대 국문과 75학번이다. 학창시절 '잡혀 가는 친구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한두번 시위에 참여한 것이 발목을 잡았다. 운동권으로 낙인찍혀 변변한 직장은 아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렵사리 조그마한 출판사를 냈지만 돈만 까먹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6년 위암 판정을 받았다. 그해 위의 80%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고 그는 요양차 상갑리 폐교를 찾았다. ŕ년 임대료 250만원이면 집도 텃밭도 가질 수 있다는 점이 끌렸어요."
초등생 두 딸 등 가족과 함께 내려와 2년쯤 지났을까. 맑은 공기와 가벼운 운동 덕인지 어지간히 몸을 추스르게 되자 그는 청양군 농업기술센터에서 농업 관련 교육과정을 차례차례 배워나갔다. 농산물 가공법, 자생화 재배, 친환경농업 등 그가 지금까지 수료한 교육과정은 30개가 넘는다. "농사도 과학이더라고요. 실습과 이론을 접목해 가면서 하나씩 배워나가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하던지…."
그는 자신이 익힌 선진 기술을 마을 주민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그의 말이라면 "농사의 농자도 모르면서 떠드는 얘기"라며 코웃음을 쳤다. "벼농사에 '오리 농법'이란 것이 있습니다. 농약을 치지 않는 대신 논에 오리를 풀어놔 해충을 잡아내는 방법이죠. 비록 수확량은 85% 수준으로 떨어지지만 벼의 질이 좋아져 값은 훨씬 높게 받을 수 있는데 사람들은 전혀 귀담아 듣지 않는 거예요. 제가 직접 해서 좋은 결과를 냈더니 '사기꾼이다. 몰래 농약을 친다'는 등 오히려 나쁜 소문만 나지 뭡니까."
보수적이지만 순박한 마을 주민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선 꾸준히 성과를 내는 것 이외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차츰 신뢰를 쌓아가게 되자 그는 용기를 내 2001년 낡은 교사 안에 '천연 염색 작업장'를 만들고 문화체험학교를 열었다. "돈을 벌고자 했던 게 아닙니다. 외지 사람이 찾아와야 이 고장에서 나는 청양 고추.구기자 등을 직거래할 수 있잖아요. 도시인을 한명이라도 더 끌어들이기 위해선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했죠."
천연 염색, 장승 깎기, 떡 만들기 등 손쉬우면서도 자연친화적인 수업 내용 덕분에 찾는 이들이 늘어나자 58가구 가파 마을 사람들도 두 팔 걷어붙이고 자기 일처럼 동참했다. 예순을 훌쩍 넘긴 어르신들은 전통음식 만들기, 짚풀 공예 등의 프로그램을 직접 진행했다. 100여명이 한꺼번에 몰려올 때면 온마을이 민박촌으로 바뀌었고, 이럴 때면 성 교장은 주민들이 직접 가꾼 농산물을 싼값에 파는 '반짝 시장'을 열기도 했다. 지난해 청양군은 이 지역을 '농촌 전통 테마 마을'로 지정했으니 성 교장이 지핀 불씨가 마을을 바꾼 셈이었다.
"돈은 여전히 없죠. 그러나 건강도 되찾고, 정다운 이웃도 생겼고, 살아갈 보람도 얻었으니 이 정도면 행복하다고 볼 수 있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