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배신 앞에 선 예수님
예언을 마치신 예수님의 마음은 산란하셨습니다. 여기서 ‘산란하다’라는 말은 여러 감정이 뒤섞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를 말합니다. 힘 있는 자가 고독할 때 힘을 사용하면 간단히 해결됩니다. 그러나 있는 힘을 사용하지 않을 때 고독해집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고독입니다.
돈도 많고 권력도 막강한 사람은 간단하게 상대방을 없앨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 하지 않는 게 겸손입니다. 가진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상대방을 살릴 수 있는데, 이를 외면하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여기에 가진 자의 고독이 있고 힘 있는 자의 아픔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문 밖으로 나갈 때까지 강구하십니다. 생각을 바꾸고 회개하여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을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음직하고 보임직해서 따 먹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 사건에는 깊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아담과 하와의 범죄 현장을 보고 얼마든지 막으실 수 있을 텐데 그냥 두셨습니다. 이는 유다의 배신과도 연관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13,21)
이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것이지만, 실은 유다에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심적으로 몹시 힘드셨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마지막 식사를 하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사랑하는 제자들 중 한 사람이 배신할 것에 대해 매우 힘들어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런 일에 대해 괴로워하십니다. 이는 타락한 자식이 가출해 돌아오지 않을 때 아버지의 심정과 같은 것입니다. 자식이 돌아오지 않겠다는데, 아버지는 어찌하지 못하고 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독한 존재인 것입니다.
4) 아버지의 마음
우리가 재산을 상속할 때 옆집의 모범생 아들이 아니라 불효자일지언정 자기 자식에게 물려줍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심정입니다. 아들이 조금만 잘해 주면 아버지는 매우 좋아하십니다. 이게 인지상정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몸만 살짝 돌려도 그분은 너무 좋아하십니다.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께로 돌아와 회복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원해야 합니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한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유다만은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지를 꺾지 않고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말씀 앞에 더욱 위장으로 일관했습니다.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13,22-23)
당시 유다인들은 식사할 때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음식을 먹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식사에서 유다는 옆으로 누워 예수님의 품에 기댄 것입니다. 그때 유다가 “주님, 사실 제가 이런 마음을 먹었습니다”라고 고백했다면 문제는 간단해집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 하느님이 찾으셨을 때 즉시 “하느님, 제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했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와 자존심은 항상 다른 방향으로 돌아갑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