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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포엠 포커스 5>
시적 조화로움과 통신의 기호처리
- 벼리영 시인의 시적 정조와 현학적 작인(作因)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본지 주간)
1. 시적 감응과 바람의 변주(變奏)
모름지기 절박한 삶의 일상에서도 시적 합리성에 맞물린 창조적 활동은 지극히 유의미한 정신작업이다. 까닭에 특정한 시인이 주어진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의 문제는 다각적인 접근으로 그 명료성 또한 확인할 일이다. 또 한편 맑은 영혼의 소유자로 소소한 삶의 일상에서 체득한 자잘한 기억 흔적을 절제된 감정으로 말끔 정제한 시편은 빛나는 생명체인 시적 작위(作爲)에 해당한다. 이 같은 관점에서 “정신적 피폐함으로 고통받는 현대인의 불안의식을 동양적인 숙명관(宿命觀)에 일관성 있게 연계지어 시적 토양에 경작(耕作)한 탓으로, 그 자신의 시적 특이성은 한층 더 즉물적 대상의 추이(推移)로 변형시키는 역동성을 공리적 시관(詩觀)으로 풀어낸 인간존재에 관한 교시(敎示)인 까닭에 자못 놀라운 신선한 충격이다.
특히 전남 여수출생이며『월간문학』지로 등단하고 현재 모던포엠 작가회원이며, 계간『한국디카시』의 편집주간인 벼리영 시인은, 삼포지향(三抱之鄕)의 도시인 부산에 거주하며 도시 공간의 정취와 해양도시의 담론에 익숙한 실체이다. 까닭에 그 자신의 남다른 시적 변명이라면 놀랍게도 2022년 출간한 제5회 회화시조집 『들꽃여인』의 「작가의 말」에서 ”Beyond the cross 개인전 타이틀이기도 했던 십자가 너머엔 분명 잔잔한 감사와 비움의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새로운 삶을 약속합니다.”라는 자신감 넘쳐나는 확신도 그렇거니와 “오랜 전통에서 하이퍼미디어까지 시대를 초월하며 다가온 디카시가 가슴을 두드리는 신선한 감동을 충격적으로 안겨주는 그림처럼 섬세하게 다른 이의 가슴을 움직이는 작가가 되기를 오랜 날 가늠해 왔듯이”「포켓몬스터 배우기」를 포함한 10편으로『모던포엠』통권 272호「모던포엠 포커스」지면의 시편 해설은 그만의 시 의식에 맞물린 직물 대상과도 자못 깊은 연계성을 지닌다.
차제에 평자 그 나름으로 맑은 영혼에서 통신(通信)된 따뜻한 감성적 형상화를 전제로 시 의식의 파동을 기호화한 창조적 결과물은 새삼 그 존재감이 빛난다. 따라서 정신작업의 종사자인 그 자신은 짐짓「시적 감응과 바람의 변주(變奏)」의 양상에서 빗나간 전통의 끈을 시 의미망에 다시 꼬아 놓는 힘겨운 역주(力走)를 합리적 해법으로 풀어내야 한다. 일단 포켓몬스터(Pocket Monsters)란 ‘닌텐도와 포켓몬 컴퍼니가 발매하는 게임 시리즈와 이를 원작으로 한 텔레비전 만화영화, 만화, TCG 등이 어우러진 미디어 프랜차이즈로, 해당 시리즈에 등장하는 가공 생물인 '포켓몬스터'를 통칭하는 말이다. 또 한편 시적 구도처리나 내재율을 일체 배제한 시 심리에서 ‘괜찮다’라고 스스로 그 자신을 자위(自慰)하며 ‘잠시 아이의 세계에 들어가 나도 한 마리 몬스터가 되는’ 흥미로운 시적 매혹에 빠져들지라도 “주머니에서 괴물을 꺼내는 아이/손바닥만 한 카드를/보고 또 본다/눈망울이 반짝인다//외계 행성 같은 이름들이/입안에서 굴러다니다/나는 또 잊는다(포켓몬스터 배우기)”라는 동기부여는 이채로울 뿐 아니라, 그 자신의 시적 이미지의 형상화에서 상식이나 기교적 처리는 고정 인식의 틀을 깨는 발상의 전환에서 비롯되는 신선한 감동의 회복이다.
모처럼 ‘한 팔로워의 해박한 글솜씨에 막힌 체증이 뚫린다. 기원전 진나라에서 부활한 황자 같은 우아함이 주어지는 현실적인 정황’일지라도 하나같이 “Ai의 옷은 마우스가 만든다는 사실을/모를 리 없다//그가 꿈꾸는 피그말리온을 위해/더 요염해져야 한다/같은 옷을 재단해서 입었다//몰랐다/사랑이 감정의 폭군이 된다는 사실을(줄리엣의 사랑)”의 보기에서 또 하나의 동일성은 다음의 시편에 맞물리듯 ‘호기심은 최고의 덕목, 구독자가 따라다니지’에서 마침내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는 나의 구세주, 그들이 환호한다.’와 같이 한껏 부픈 공감대로 변형됨은 지극히 놀라운 충격이다.
특히 AI 없이는 살 수 없는 AI 사피엔스(AI Sapiens) 시대로 변화하는 작금의 시간대에서 한국디카시인협회 발족의 대모 격(格)인 그 자신이 정교한 언어를 치밀하게 직조(織造)한 디카시(Dica-Poem)는 ‘상징과 압축, 지성과 감성, 깨달음 그리고 감동과 같은 영혼의 속삭임이 빛나는 언어의 편린(片鱗)임에는 틀림이 없다. 까닭에 인용하는 시편에서 단독자로서의 실존에서부터 AI인 상징의 범주(範疇)까지 확대되는 현상은 짐짓 호흡을 가다듬고 긴장감을 응축시켜 조응하지 않을 수 없다.
완벽한 당신은/로봇입니까/사람입니까//
당신이 숲으로 들어가자/의심이 뿌리처럼/어둠을 더듬었다//
나는 그때/훌륭하다는 것들에서/조용히 등을 돌렸다//
숲을 뒤졌으나/고양이 새끼 한 마리 없었다//
-「구독자」에서
위에 인용한 시편에서 구독자(購讀者)의 사전적 개념은 ‘신문이나 잡지, 책 등의 간행물을 사서 읽는 사람을 뜻하기’에 비록 거리 두기의 낯설기는 아니더라도 ‘그곳에서 당신은 나를 읽고 있었다. 고양이 없는 숲처럼 완벽하게’의 일면에서 시의 본말(本末)인 서정시와는 별개로 형식이나 내재율과 무관하게 화가인 그 자신의 능란한 화필의 개아적(個我的) 작위(作爲)는 못내 다채롭다.
2. 빛으로 지향한 아득한 몽환(夢幻)
모름지기 푸른 산자락이 낙조(落照)에 물드는 황혼 녘에 무심코 창밖을 응시하면서 시고(詩稿)를 손질하다가 뜻밖에 그 자신이 흘려보낸 일상의 자잘한 기억 흔적을 한껏 나직하게 읊어내고 채색(彩色)한「빛으로 지향한 아득한 몽환(夢幻)」의 잔상(殘像)을 손금 보듯 찬찬히 접할 수 있음은 영혼이 피곤한 현대인에게 정신적 평안을 안겨주는 동기부여(動機附輿)는 한층 더 뜻깊을 따름이다.
이처럼 그 자신이 피안(彼岸)의 세계를 내포한 공간대로 생명의 근원이자 동경의 세계를 향한 통로와 잇닿은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의 시 세계를 비중 있게 형상화한 시편에서 또 그렇게 하나같이 ‘누드를 그렸고 클림트처럼 그와 정사를 나누었다. 또 복제된 모델이 올 것이다.’라는 막연한 기대감마저 주어지는 현상에서 그 자신이 “나는 점점 무능해지고,/언젠가/그의 명령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환상을 꿈꾸었지만/고흐처럼 그림을 팔지 못해/캔버스만 쌓여간다//술이 젖은 캔버스마다/정물이 흔들리다/천천히 분해된다(초현실주의 숲)”라는 객관적인 관점에서 끝내 ‘큐비즘을 닮은 그림을 나는 버린다.’라는 일상의 동일화 뒤에 ‘우울이 내려앉는’ 시적 시사성(時事性)을 외면하고 지나칠 수 없기에 시적 상상력이 확장된 언어의 그물망은 못내 경이롭다.
그렇다. 좋은 시 쓰기의 분할·통합을 위해 그 자신의 시적 질료를 정직하게 응시하면, 언어의 생명력에 관한 식별력이 돋보인 점을 쉽게 확대할 수 있는 까닭에, 그 자신의 시편은 비교적 언어 감각의 유연성과 전체적인 구조의 안정성, 그리고 내면의식의 개성적 표출이 지극히 탁월한 조짐이다. 차제에 그 자신이 ‘눈은 바닥에서부터 내리고 당신의 그림자는 거꾸로 흐르는 ’현상에서도 스스럼없이 ‘깨진 유리의 온도’에 견주어 짐짓 ‘우리의 온도는 몇 도였을까?’라는 의구심으로 불면(不眠)의 밤을 밝히는 견고한 고뇌는 지극히 인간적이다.
입맞춤은 얼음이 되고/시간이 천천히 응결된다//
붉었던 시간,/우리의 추억은 술잔 속에서/상한 냄새로 발효되었다//
나는 잔을 기울인다/기억이 목을 타고 흐른다//
혀끝에 남은 건/당신 이름이 아니라/깨진 유리의 감촉//
겨울이 다시 들어온다/창문에 김이 서리고/나는 그 위에 쓴다//
-「깨진 유리의 온도」에서
위에 인용한 시편에서 시적 명제(命題)는 ‘깨진 유리의 감촉’에 맞물림이기’에 ‘깨진 유리의 온도’는 자연 풍화 이전의 의연함이며 인간의 창조 의지가 또 하나 무지의 확인이었음에 ‘시간이 천천히 응결되는 현상’ 또한 사려 깊게 가늠할 점이다.
모름지기 그 자신이 지식·정보화의 시간대에서 ‘페이드아웃(fade-out) 홈쇼핑의 쇼호스트 말씀이 유창해요. 그 말씀에 남자도 레깅스를 사게 되죠’라며 분망한 삶의 일상에서 대다수 현대인이 ‘환각제 등에 의한 도취 상태에서 자극을 받는 심리 상태를 시 심리의 추이(推移)로 변형을 시도한 점은 새삼 이채롭다. 또 한편 “나는 작은 우주예요/당신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교감이 말 없는 산책을 하고/바다와 숲을 구워도 당신은 늘 멍//백 개도 넘는 채널이 미래의 레시피를 만들어요/온도가 제멋대로인 몇 개의 채널은 굽다가 타버리죠//갈수록 코미디 같은 사람들/삭제하면 어떨까요(Turn on)”의 시적 이미지의 형상화는 지극히 현대적인 삶의 일상화다. 까닭에 시대적 현상을 곁들인 시적인 의미망의 확장은, 현대시의 이중구조로 충직하게 빚어낸 시적 수사와 기법의 맞물림은 또 하나의 충동이다.
각론하고 지극히 현대적인 삶의 양상에서 그 자신이 다각적인 디카시의 일면에서 ‘AI가 당신의 빗나간 일기예보를 읽어요’라며 인플루언서(influencer)에 ‘몰락(沒落)’이라는 부제의 시적 작위(作爲)는 충직한 독자의 호응을 불러주기에 짐짓 부족함이 주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그 같은 맥락에서 “거름망 없이 쏟아진 레몬 맛이란/바닥을 털고 일어난 꿈/이걸 당신은 엿맛 같이 길다고 하죠//댓글이 자라나 우리가 풍성해지는 것 같지만/그건 날마다 형태가 달라지는 구름모자//5월을 무시하면 댓글의 시종이 되고 말 거예요/팔로워는 구르는 낙엽 같은 것/구걸하지 않겠어요(인플루언서 – 몰락)”라는 보기에서 새삼 확증도 그렇거니와 ‘혀가 알을 낳고 또 낳고 신조어를 낳는’ 그 현상도 결단코 외면할 수 없다.
특히 비교적 그 자신의 시편 중에서 고정 인식을 뛰어넘은 한순간 다소 낯설기라는 키워드로 시 인식의 뒤편에서 지난(至難)한 정신풍경의 이행은, 생명의 씨앗을 파종하는 농부의 보폭처럼 다소 느림의 미학이나 절제된 정감은 신선함과 예감의 맞물림이다. 이처럼 시적 정황에 미루어 “시적 형상화, 쌓기와 허물기”의 반복작업은 신표현주의를 표방한 화가 안셀롬 파커(Anselm Kiefer)의 “현실적인 모든 것은 단지 이미지일 뿐이다.”라는 이론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불교적 해법과 결과적으로 무관치 아니하다.
까닭에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사물의 미동을 주의 깊게 응시하면, 그 나름의 특이한 정신작업에는 낯설음과 허망함이 간혹 어둠과 교접되어 생의 본능에서 연유한 불안과 초조, 그리고 절박함이 그나마 조화의 순리로 변형되는 조짐이 쉽게 파악될 것이다. 또 한편 나직한 통곡(慟哭) 뒤에 따뜻한 정신기후의 조성을 위한 그만의 시격(詩格)은 생존을 위한 치열성에서 비롯된 절망이 아니라, 곧바로 코앞의 모든 현상을 애정이 어린 시선으로 응시하고 조명하는 강한 자존감과 따뜻한 감성의 존재임을 이처럼 확증시켜주기에 결코 모나거나 부족함이 없다.
어디까지나 무한경쟁으로 치닫는 비정한 사회에 처할지라도 최소한 맑게 깨어 있는 의식으로 ‘자기만의 시혼을 읊어내려는 빛나는 그 존재감’은 놀랍게도 흔들림 없다. 까닭에 비록 그 자신이 부산박물관에 소장된 황비창천(煌丕昌天)의 청동거울이나 충주에서 발견된 명문 황비창천의 청동거울을 각각 연상하며 때로는 거울의 뒷면에 거친 파도를 헤치는 돛배가 그려져 있음을 애써 확인하지 않더라도 ‘화구가 서랍 속에 잠들고 도료는 말라버렸다. 무엇이 통증을 키웠습니까?’라는 반문 앞에서 그 자신이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 신과 겨루고 있습니다. -독을 품었습니까? 약이 독을 품었습니다’라는 막연한 의구심을 수시로 풀어내는 삶의 존엄성은 못내 엄숙하다.
껍질이 가루처럼 날리고/동그라미 버짐이 있는 뻥 뚫린 나무에 집을 지어야지/나를 묻어야지//
때론 코를 피노키오처럼 늘어뜨리고 자유를 팔러 다녀야지//
휘청거리는 빛/흑점을 얹은/모탕이 되어 식어가야지//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다/채도를 높이고 배경을 삭제하니/캔버스가 환해졌다//
-「거울의 뒷면」에서
위에 인용한 시편에서 새삼 밝혀지듯이 이 같은 시각의 관점이야말로 부득이 디지털(digital) 시대의 새로운 문학 장르(genre)로, 언어 예술이라는 기존 시의 범주(範疇)를 다채롭게 확장하여 영상과 문자를 하나의 텍스트로 결합한 멀티 언어 예술인 점에 비춰 더없이 이채로울 따름이다. 그렇다. 그 자신이 동시대의 어느 시인에 견주어 자기관리에 엄격하며 시의 틀 짜기에 열중인 그만의 다소 반어적인 기법이나 수사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시적 작위에 몰두하는 편은 새삼 미더울 따름이다. 이 같은 현상에서 그 자신의 시작과정은 전반적으로 필립 라아킨(PhilipLarkin)의 “시란 맑은 정신의 문제, 즉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것이다.”라는 당위성은 확정적이다.
3. 상황인식의 변형과 시적 발상
어디까지나「상황인식의 변형과 시적 발상」의 일면에서 폴란드 작가인 센키비치(H. Sienkiewich)의 단편 「등대지기」에서 러시아 지배하에 폴란드 망명객으로 ‘등대와 절벽과 고독, 그리고 갈매기’에 익숙한 스카빈 스키가 암울한 현실 앞에서 침통하게 고뇌하다 일터에서 해직당하는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다시금 ‘민족의 혼이며 역사인 모국어에 대한 각별한 관심사’는 막연히 세계화를 지향하는 우리 사회에서 지혜롭게 풀어갈 또 하나의 중차대한 문제이다.
까닭에 가끔은 ‘위로의 말들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면, 그래프는 늘 아래로 향했고 그것은 잠깐의 기술적 반등 그뿐이었다’라는 잊고 지나칠 정황도 그렇거니와 화롯불 같은 뜨거움이 없었던 건 아닐지라도 “더는 내려갈 곳이 없는 그로기 상태//믿음이/가닥가닥 뜯긴 철근처럼 철거되고 있다//옳게 날아보지도 못한 채//목줄이 묶여 버린 남자가 운다//얼어 있던 응어리들이/쏟아진다(단단한 바닥)”라는 그 같은 일면에서 비록 인간은 날개가 없기에 새처럼 날 수는 없을지라도 ‘꿈’이라는 욕망이 있다.
그렇다. 상대적으로 절실히 요구되는 결핍함마저 이처럼 그 자신으로 하여 욕망을 꿈꾸게 하기에 그 자신의 시편인「단단한 바닥」에서 ‘꿈(dream)’의 어의적 의미는 끝내 ‘이상, 몽상(夢想)’으로 해석되어도 결코 지나치지 아니하다. 차제에 인간의 뇌 기능은 인지하고 있는 지식과 정보를 현실 세계에 전이하는 역할을 담당하기에 그 자신의 의식세계를 파악하고 있음은 못내 희망적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 시단에 존재의 근원에 기인(起因)한 생명에의 몰입은, 전통적으로 서정시의 문제에 관한 논란의 키워드는 즉 자아와 세계가 충돌하여 빚어낸 모순을 동화시킴으로써 자아와 세계의 틈새를 좁히는 시적 세계관의 반영을 일깨워주는 추이다.
차제에 저토록 ‘빛을 당기고 젖이 도는 소리, 연두가 소곤거리며 몸살을 앓는 소리, 들어 봐요. 견디면 봄이 올 거라는 말 아픈 당신께 꼭 전하고 싶어요’라는 가슴 저며줄 절박함이 주어지는 지대한 관심사일지라도, 아래 인용한 시편인「연두」에서 ‘모진 날을 참아낸 나무가 숨을 크게 쉬네요’라는 그 자신의 시선은 묵언의 응시 끝에 이처럼 비장감(悲壯感)이 주어질 따름이다.
왜 한 개뿐일까를 생각했죠 총부리가 왼 가슴을 겨냥하는 듯 무서웠어요/달리기가 힘들고 비탈길이 버거운 늘 오르막 같은 생//
한파에 놓인 나무속엔 회색 유서가 난무할 거예요/불쏘시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비쩍비쩍 마르게 하죠//
숨 잘 쉬고 잘 걷는 것이 잘 사는 거래요 행복이 좋은 생각을 따라오듯,/쫓아가면 안 된대요/죽음을 함부로 발설하지도 말래요//
-「연두」에서
위에 인용한 시편에서 비교적 연두(軟豆)는 푸른 식물성인 ‘완두(豌豆)의 색깔과 같은 노란색이 섞인 초록색을 의미할 것’이나 그 자신의 시적 충동감과 기대에 부푼 삶의 여적(餘滴)은 평자의 역설처럼 ‘예술에는 국경이 없지만, 예술가에게는 조국이 있다.’라는 그 절박함에 견주어 담담한 술회(述懷)의 낌새다.
그 같은 맥락에서 그 자신이 차별화된 디카시의 양식(樣式)을 수용하여 폭넓고 다양하게 구도 처리한 현대 서정시의 패러다임(paradigm)의 급격한 변조로 ‘반서정 또는 탈서정의 다양한 해법’은 한층 더 교시적(敎示的)인 분위기다. 이같이 그 자신의 시편에 전통적인 서정의 정서를 다분히 수용하고 시적 의미와 특이성을 견딤의 시학으로 형상화하여 차별성을 지닌 디카시의 추이(推移)는 끝내 치밀한 식별력으로 가늠할 점이다. 차제에 평자 그 나름으로 비중 있게 펼쳐 보인「시적 발상과 상황인식의 변주(變奏)」야말로 응당「모던포엠 포커스」에서 비중 있게 평가해도 결코 지나치지 아니하다. 까닭에 그 자신은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임에 삶의 처소에서 우리가 지닌 소중한 관심사라면 하찮은 일상에서도 타자 간의 배려로 인간소외의 경계를 허물고 관계성의 회복을 위해 전방위적으로 자존감을 지켜내는 창조적 행위다.
결론적으로 가슴이 따뜻하고 정직한 그 자신의 시적 행보(行步)는, 현실의 안주를 거부하는 전의식(前意識)에 의한 내면의 성숙함을 확증하는 심적 탐색으로 해명될 것이다. 모처럼 저토록 격랑의 와중(渦中)에서 충직한 독자의 한결같은 심적 평온은 폐쇄된 정신적 자유나 사고 가능성을 열어 보이는 일이다. 까닭에 본질적인 고뇌 뒤에 그 자신의 창조적인 정신작업은 따뜻한 감성적 일깨움으로 ‘충직하고 개방적인 중개자로서의 시대적 소임’을 담당하는 현재성에서 그 존재감의 검증행위다. 모쪼록 시적 상상력을 가일층 확장 시켜 불가능을 가능으로의 전이도 놀랍거니와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현상에서 평자 그 나름의 절박한 기대치라면 영혼의 깊은 상처로 고통받는 소외자의 갈등과 증오심을 신선한 생명감으로 말끔 정화(淨化)시켜줄 역사적 소임의 엄격한 수행(遂行)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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