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의 취향대로 사랑하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닙니다. 이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우리의 스타일대로, 생각하는 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것도 마음대로입니다.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이 기준으로 작용합니다. 성당에 오고 싶으면 오고, 말고 싶으면 오지 않으면서도 성당에 다닌다고 말합니다. 봉헌하고 싶으면 하고 싫으면 하지 않으면서,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봉사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믿는 것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도, 하느님께 봉사하는 것도 아닌 착각인 것입니다.
사랑의 기준은 우리가 불쌍히 여기고 우리의 도덕성과 윤리성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새 계명을 구약의 계명들과 비교해 보면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랑의 대상입니다. 구약에서 사랑의 대상엔 이방인이 제외되었습니다. 유다인끼리 사랑한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어떤 지경에도 참을 수 있는 것은 가족이기 때문이지 남의 자식을 위해선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구약의 사랑은 하느님께 선택받은 동족끼리라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은 사랑의 대상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유다인이나 이방인,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 백인이나 흑인, 늙은이나 젊은이, 남종이나 여종, 성별이나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모두 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사랑과 하느님이 하시는 사랑은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기준을 예수님이 새 계명으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새 계명입니다.
둘째, 사랑이 한계입니다. 구약의 사랑은 용서와 더불어 채찍과 징계라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은 한계가 없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사랑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죄에 대한 용서를 일곱 번까지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의 용서는 일곱 번이 최대 용량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용서에 한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한국인의 정서는 삼세번입니다. 그다음엔 흔히 ‘국물도 없다’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개념과 많이 다릅니다.
셋째, 사랑의 방법입니다. 구약에서 사랑의 방법은 율법과 명령입니다. 율법에 어긋나고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죄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의무적이거나 율법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방법은 먼저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바닥에 휴지가 떨어져 있을 때 주울 것을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솔선수범해 줍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 방법입니다.
우리는 손가락 사랑을 많이 합니다. ‘이것 하라, 저것 하라’고 손가락으로 지시하는 사랑을 합니다. 그리고 입으로도 사랑을 많이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기도에 자신이 속아 넘어가기도 합니다. 화려하게 기도한 후 그게 자신인 양 착각합니다.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 방법은 구약의 율법적 사랑과 전혀 다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서 바오로 사도가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주님의 사랑의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조건 없이 희생하는 무한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해 본 적도, 가져본 적도 없는 사랑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심장부는 그만두더라도 사랑의 이름만 불러도, 겉모습만 보아도, 냄새만 맡아도 우리는 충격을 받습니다. 우리가 하는 사랑을 촛불에 비교한다면, 예수님의 사랑은 태양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어누 누구도 태양과 같은 존재라고 표현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김일성과 김정일이 민족의 태양이 될 수 있고, 운동선수나 이데올로기 등이 대중의 태양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런 것은 하느님께만 어울리는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이 독특한 것은 주님이 친히 본을 보여 주신 점과 사랑을 이성이나 훈련, 노력, 의지 등으로 하지 않고 성령으로 부어 주신다는 점입니다. 로마서 5장 5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이 독특한 것은
주님이 친히 본을 보여 주신 점과 사랑을 이성이나 훈련,
노력, 의지 등으로 하지 않고 성령으로 부어 주신다는 점입니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