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눅 20:25)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이 찾아오면 단번에 말씀으로 인한 은혜와 기쁨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교회 생활을 통해서 배우고 이해하고 알았던 말씀의 틀이 흔들리고 균열이 시작되면서 옳다고 믿었던 지식의 세계가 혼란에 빠지고 무너지는 것이 먼저다.
이러한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정확한 질문이다. 말씀은 우리가 알고자 하는 문제의 답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질문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말씀이 유발하는 질문이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질문은 모르거나 의문이 되는 것을 물어 답을 얻기 위해 한다. 그런데 질문을 말씀에 대한 자기 수준과 실력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소위 수준 높은 질문으로 자기 실력을 나타냄과 동시에 상대방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성경 전문가로 자처하는 신학자와 목사가 그러하다. 자기의 답이 있는 상태에서 질문으로 상대방을 시험하는 것이다.
하지만 말씀은 우리를 바른 답을 아는 실력 있는 신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을 하는 자로 주께 나오게 한다. 예수님께 질문하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의 질문은 성경에 대한 자기 실력이나 수준과는 무관하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말씀이 유발하는 질문이 있는가?’이다.
사람들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는 말씀에서도 바른 답을 찾고 싶어 한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무엇인지 답을 찾아서 바치면 말씀에 맞는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안다. 그래서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지만 그것은 말씀이 아니라 바른 신자가 되고자 하는 욕구가 유발하는 질문일 뿐이다.
우리는 가이사에게 세를 바쳐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는 노림수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세를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 정부를 반대하는 세력으로 고발할 수 있고, 바치라고 하면 유다를 정복한 이방 세력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유대 민족을 배반하는 것이 된다. 우리도 현대 사회에서 이런 문제에 부딪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 간과하는 것은 세를 바치고 바치지 않는 것이 우리를 신자 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른 신자, 바른 삶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우리를 바른 신자의 삶으로 이끌기 위한 말씀으로 듣는다. 그래서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분별해서 바치라는 것을 말씀이 주는 답으로 알고 한 나라의 국민으로 부담해야 할 세금을 성실히 납부하면서 하나님께 바쳐야 할 하나님의 것도 바쳐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예수께 질문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대답에 책잡지 못하고 놀라워하며 침묵한다. 말씀의 뜻을 알고 이해하며 설득당했다는 것인가? 만약 우리가 그들이었다면 예수님의 답변에 충분히 만족했을까?
사실 예수님의 말씀이 유발하는 질문이 있다. 그것은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어떻게 구별되며 우리는 또한 그것을 구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설령 하나님의 것이 무엇인지 답을 알았다 해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지에 의문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질문이 없다면 스스로 말씀의 취지와 답을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 잡지 못하고 침묵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이사에게 바칠 것이 있고 하나님께 바칠 것이 있다는 뜻으로 듣기 쉽다. 가이사에게 바칠 것은 세금으로,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은 율법으로 정하신 십일조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뜻으로 들었기 때문에 책을 잡지 못한 것이다.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고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는 말씀으로 생각한 것이다.
세금도 십일조도 결국 돈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돈을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으로 구분하셨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답에 의하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렇다면 가이사의 것으로 분류될 것은 없다고 해야 하는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하신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처럼 말씀은 수많은 질문을 유발한다. 그런데도 침묵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들이 알고 있는 답에 맞춰서 결론짓기 때문이다. 즉 자신들이 알고 있는 답에 스스로 설득당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데나리온 하나를 보이라고 하시고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라고 물으신다. 그리고 가이사의 형상과 글이 있는 것을 가이사의 것으로 말씀한다. 이것을 단지 로마 황제의 얼굴과 글이 새겨져 있으니 가이사의 것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것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화폐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쓸데없는 질문에 부딪히게 한다.
우리가 생각할 것은 형상과 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형상과 글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간이 보고 읽을 수 있다. 인간이 알 수 있도록 드러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가이사의 것’의 의미라면 ‘하나님의 것’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며 인간이 보고 알 수 있도록 드러나 있지 않다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로 부터 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볼 수도 알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칠 수 없다. 이것이 말씀이 유발하는 질문이다.
‘세를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은 자신을 믿는 자로 전제한다. 믿는 자로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을 행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질문이다. 소위 복음을 안다는 사람이 ‘십일조를 하는 것이 옳은가 하지 않는 것이 옳은가?’라고 질문하는 것도 같다. ‘어떻게 하는 것이 나를 옳은 신자 되게 하는가?’에 중점을 두는 것이다. 그래서 답을 아는 것보다 질문이 필요하다. 질문이 곧 질문하는 자기 생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것을 분별할 수 없고 바칠 수 없는 인간이 옳은 일을 행하여 이룰 수 있는 것은 없다. 하나님께 바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행위의 옳고 옳지 않음을 따진다. 이렇게 말씀은 참된 생명에 눈뜨지 못한 죽은 자의 집착을 지적한다.
-신윤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