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박사는 출생부터가 기구했다.
1898년 생인데,
아버지가 친일부대의 대대장으로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역적 우범선이었다.
아관파천으로 전세 역전, 일본으로 망명한 '친일파' 우범선,
일본인 '사카이 나카'와 결혼해 2남을 생산하는데
그중 장남이 우장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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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우범선의 죽음으로
이 가족은 더 이상 비참할 수 없는 지경으로 빠진다.
일본 이름을 얻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업적을 남기는 논문과 공문 기록에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한국 성인 "우"를 집어 넣었다.
우장춘에게
일본은 혹독한 굶주림과 차별과 폭력의 나라였다.
일본에서
이민자가 얻을 수 없는 엄청 높은 지위를 얻긴 했으나
그건 순전히 장춘이 혼자 잘나서 그리 된 것이고
자신의 가족을 그토록 짓밟았던 제국주의에 미쳐 날뛰는 나라,
일본은 우장춘에게 영원히 함께 하지 못할 적국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에 매달렸다.
괴롭게도 조선은 우장춘을 역적의 아들로 낙인 찍었으나,
여전히 조선은 그의 뿌리이자 일본에게 짓밟힌 약자였다.
해임 후 지방의 농장장으로 재취업,
연구 활동에 몰두하던 우장춘은 여생을 그냥 그렇게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다.
육종학계 최고 권위자라는 명예를 간직한 채
일본 이민자 역사에 빛나는 태양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장춘에겐 운명이 정해준 사명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선,
아니 대한민국이 그를 애타게 찾기 시작한 거다.
해방 후 대한민국은 1947년부터 농업의 근대화를 위해
일본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실력자 우장춘을,
"같은 민족" 이라는 미끼로, 영입하고자 했다.
당시 한국은
미리 '한국 농업 과학연구소' 를 만들어 놓고,
소장 자리를 우장춘을 위해 공석으로 둔 상태였다.
우장춘의 가족에게
"이적료"로 1백만엔을 보낼 정도로 열성이었다.
당시 1백만엔이면 엄청난 돈이었다.
우장춘은
이미 골수 깊은 민족주의자였는지도 몰랐다.
난 조선에서 죄인이겠지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조선이 먼저 "어서오세요" 하는것을 보고
무척 감격했던게 분명했다.
그는
구원하고야 마는데,
그 업적의 핵심은
바로, 우량 종자 개발.
농업만 그랬겠냐마는
일제 치하의 조선은 철저하게 일본에 종속된
'식민농업지',였다.
일본에서 종자를 들여와
일본식 기술로 농사를 지어야 했는데,
일본이 패망한 뒤로는 그게 불가능해졌다.
식량조차 자급자족이 안되는 나라,
이 처절한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건
우수 종자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우장춘은
가장 먼저 우량 종자 개발에 주력,
최단시간 내에 배추, 무, 고추, 오이, 양배추, 양파, 토마토,
수박, 참외 등에 걸쳐 20여 품종에서 종자를 확보한다.
(그 외에도 한해 두번 수확하는 벼 품종 개발 등 무수히 많다)
그래서
아예 대놓고 구박하고 모욕을 줬다.
아예 공개석상에서 일본말만 지껄일 줄 알면서
무슨 애국을 하겠냐며 망신을 준 정치인도 있었다.
세계적인 유전학석학이
한국에 와서 졸지에 외국인 노동자가 된 거다.
이 때부터
그 잘난 대한민국의
처절한 과학자와 엔지니어 냉대 전통이
시작된 거라는 얘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어머니가 작고하셨을 때도, 딸이 결혼을 했을 때도
우장춘은 일본으로 건너가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이
출국 금지를 시켰던 것이다.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평소 바른 말을 잘하는 우장춘이
이데올로기 문제에 관해 입바른 소릴 한 모양이었다.
그 소릴 들은 이승만 정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