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줄거리 >
싱클레어는 신앙과 지성이 조화된 분위기 속에서 부모님아래에서 성장했다. 그의 가정은 말 그대로 밝은 세계이며 선의 세계이다. 또한 그 주위에 있는 아주 어두운 악의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싱클레어의 어린 시절 그는 동네 놀이 집단에 끼기 위해 도둑질을 했다는 허풍을 프란츠 크로머에게 떨게된다. 어두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어두운 생활을 하던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나게 된다. 데미안을 통해서 카인과 아벨이라는 새로운 해석으로 선과 악을 생각하게 되고, 데미안은 크로머를 만나 싱클레어를 옭아맨 올가미를 풀어준다. 싱클레어는 자기 자신 속의 두 세계의 갈등으로 즉, 금지된 것과 허락된 것의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베크는 그런 싱클레어를 술집으로 유혹한다. 뒷골목의 어두운 모습, 시궁창의 풍경은 금지된 구역에 들어서게 되고 자기소외와 자기부정에 빠져 사회와 이사에 대해 아예 부정해버린다. 그는 베크와 함께 카인과 아벨 신화의 이중성, 성의 금욕주의, 연애감정에 대해 생각한다. 다시 데미안을 만나고데미안은 싱클레어의 타락한 모습에 우려를 나타낸다. 싱클레어는 정신이 성을 갈망하는 육체를 통제하지 못하여 괴로워 한다. 싱클레어는 베아트리체를 만나면서 자기자신의 내부에서 일어 소용돌이치는 마음에 따라 그런 곳에서 벗어나게 된다. 싱클레어가 그녀의 초상화를 그린다. 그가 그린 초상화는 데미안을 닮아가고 있었다. 베아트리체가 아닌 남성적이면서 여성적인 모습으로 변하여 마침내 데미안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안에서 어느새 데미안을 그리워하고 있다. 싱클레어는 지구에서 날아오르려고 하는 새를 그려 데미안에게 보낸다. 그리고 데미안으로부터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더 나은 세계를 향해 날아가는 새, 먼저의 세계를 파괴하고 나온 새, 그리고 신 아프락사스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프락사스는 빛과 어두움의 공존, 선신이면서 동시에 악신이라는 것을 싱클레어는 알게 된다. 그는 데미안의 편지를 통해서 자기 내부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오르간 소리에 이끌려 싱클레어가 어느 교회로 들어간다. 그 곳에서 그는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를 만나서 아프락사스에 대한 공감을 느끼고, 그에게 아프락사스에 대한 가르침도 받게 된다. 싱클레어는 정신을 이끌어 줄 지도자와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데미안을 길에서 다시 만난다. 데미안은 그의 어머니와 함께 있다.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재회.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부인이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여인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꿈, 운명, 탄생의 괴로움을 알려준다. 싱클레어는 그녀에게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을 같이 느끼게 되고 정신적인 사랑으로 생각한다. 그 때 전쟁이 터지고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함께 참전한다. 싱클레어는 부상을 당하고 야전병원으로 옮겨지게 된다.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나란히 누워 있다. 데미안은 만약 언젠가 자신이 필요하게 되면 싱클레어 스스로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하고 어머니의 키스를 그에게 전한다. 다음날 아침 데미안은 옆에 없다. 싱클레어는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친구이며 지도자인 데미안과 꼭 같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본다.
< 독후감 >
내가 이책을 읽게된 동기는 방학 숙제를 하기 위해서이다. 난 이책을 읽고 자아 형성에 있어서 책임을 지는것은 그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에게 있다는걸 깨달았다. 이러한걸 깨달은 시점은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하던말이나, 싱클레어가 거울속에서 자신의 스승이라 생각해왔던 데미안의 모습을 자신의 모습 속에서 찾은 것에 미추어볼때 이다. 그리고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각자 다른의미에서 자신을 찾았다는 것을 보면 인간은 모두 다른 한계를 가지고있고 그것을 부수기 위해 노력하며 그 한계를 뛰어넘는 순간 특유의 본질을 깨닫는것 같다. 그런데 소설속에서 알껍질이란, 무언가를 얻기위해 노력하고, 고민해온 사람들이한번쯤은 다 겪은 그런 사회적인 제약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이 알을 깬다는것은 자신의 세계를 깬다는 것과 같은데 알을 깬 새는 어디로 날아가는가 보면 바로 아프라삭스 에게로 간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세계를 파괴하는 대신본질적인 세계인 신에게로 회귀하자는 뜻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 같다. 자아형성은 자신이 책임진다는 전제에도 불구하고 신에게 해답을 건다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