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그릇의 변천사
먼저 이 사진을 한 번 보자. 테가 넓지 않은 갓을 썼으니
중인 정도의 계급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로 보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나름 집안이 빈한하진 않은 집안일 것이다.
이런 사람이 먹는 밥의 양을 보라. 거기에 국 그릇까지!
아마 지금 막 밥을 먹기 시작한 건 아닌 것으로 보이는 바
, 밥도 밥그릇 가득 고봉으로 담겨 있었을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죽었다 깨도 못 먹을 양일 것이다.
근데 이런 양의 밥은 우리 조상들에게는 보통이었던 것이다.
밥심으로 산다는 얘기가 괜히 나온 것은 아닌 것이다.
실제 구한말 조선을 방문한 선교사들의 기록이나
, 우리네 옛 기록들을 보면 우리 조상들은 참 식욕이 왕성했다.
실제 체격적으로도 당시 동아시아에서 상당히 큰 편에 속했고,
19세기에 서양인들도 대부분 '루저'수준이었던 걸 생각하면
먹는 만큼 체격들도 컸던 모양이다.
이렇게 우리 조상들이 많이 먹은 것에 대해서
많은 설들이 있는데 대략 간추리면 이렇다.
1. 농경사회라서 일을 많이 한다. 고로 많이 먹어야 한다.
2. 말을 타는 것 아니면 가마, 도보가 일상적이었기 때문에 칼로리 소모가 크다.
3. 한반도는 풍요한 땅이다. 심각한 기근이나 흉년이 들지 않는 한 먹을 게 많았다.
4. 식용 식물이나 여러 가지 고기 부위의 쓰임새를 잘 알고 있었다.
이것저것 찾아 먹을 줄도 알았다.
5.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보다 초식 위주의 식사를 했다.
이것이 밥을 많이 먹게 한 원인이 되었다.
현대에도 막노동이나 농사를 짓거나 스포츠 경기 등으로 몸을 쓸
일이 많은 사람들은 식사량이 많다. 또 영화나 게임 같이 즐길 거리가 별로 없었던
시대에 식도락이라는 게 주된 즐거움이었을 지도 모른다.
아무튼 많이 먹기로 유명한 그 시대에도 '대단한 대식가'로 여겨진 사람이 있었다.
필원잡기라는 책을 보면 '홍일동'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조선 세조 때
사람으로 바른 말을 잘 하고 문장도 뛰어난 인재였다고 알려져 있다.
아무튼 이 사람이 먹는게 참 어마어마했던 모양인지 먹는게 기록될 정도였다.
진관사라는 곳에 놀러갔을 때 이 사람이 먹은 것들의 목록이다.
떡 한 그릇, 국수 세 그릇, 밥 세 그릇 (그릇은 위 사진만한 크기였을 것이다.)두부와 청포 아홉 그릇
이만큼 먹고도 배가 고팠던 모양인지 돌아와서 또 먹었다고 적혀있다.
삶은 닭 두 마리, 생선국 세 그릇어, 회 한 그릇, 술 사십 잔
엉뚱한 의미로 위대하신 분인데,
이 사람 결국 이후에도 많이 먹다가 위가 터져서 죽었다고 한다.
참고로 조선 중기 무장인 원균(여러분이
아시는 그 원균)도 꽤 많이 먹었다고 하는데
한 끼에 쌀 한 말을 밥을 지어 먹었고 반찬으로 닭도
여러 마리 잡아먹었으며 술도 동이로 비웠다고 알려져 있다.
밥 이야기를 좀 더 해 보자. 민속학자인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쓴
'한국의 음식'이라는 글에는 1890년대 주막에서 개다리
소반을 받아 식사하는 도포와 갓 차림의 남자 사진이 등장한다.
밥상 위에는 밥그릇, 국그릇과 김치 보시기, 간장종지, 장아찌,
나물, 콩자반 등을 담은 접시 등 모두 8개의 그릇이 놓여 있다.
인상적인 것은 밥그릇, 국그릇의 크기다. 밥그릇은
높이가 9㎝, 입의 지름이 거의 13㎝ 정도 되고
거기에 밥을 가득 담았다.
요즘 세 끼 분량쯤 된다. 국그릇은 더 크다.
주 교수에 따르면 임진왜란 피난기인 <쇄미록>에는 전쟁통인데도 불구하고
'한 끼'에 7홉(420g)의 쌀로 밥을 지어먹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 사람들이 대식가였다는 것은
선교사 등 외국인의 기록에도 제법 등장한다.
주 교수는 이를 '조선 사회가 절대 빈곤의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먹을 것이 생기면 물불 가리지 않고 먹었기 때문으로 풀이한다
. 정확한 이유를 알기는 힘들지만 조선 사람들은, 늘 먹을 게 모자라
소식(小食) 문화를 정착시킨 에도(江戶) 시대
일본인과는 반대의 길을 걸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오늘 여기서 하려고 하는 말은 우리 조상들이 밥을 많이 먹었다는
얘길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 하려는 얘기는 밥그릇이다.
밥그릇은 밥상 위 얼굴이다. 사실 고운 그릇에 담긴 밥은 보는 것만으로
시각적인 포만감을 준다. 이렇게 중요한 밥그릇의
별칭은 ‘공기’. 한자로 빈 그릇이란 뜻이다.
이 공기란 말은 옛날부터 있던 말은 아니다.
원래 밥그릇을 이르는 한자어는 ‘반기’다. 남녀가 유별하던 시절,
남성과 여성의 밥그릇이 달랐다.
남성의 것은 ‘주발’, 여성의 것은 ‘바리’나 ‘합’이라고 했다.
주발은 밑바닥이 약간 좁고 윗부분은
벌어져 있는 남방형과 몸통은 불룩하고
윗부분이 좁은 북방형이 있었다. 합은 위아래 부분의 폭 차이가
거의 없어 옆에서 보면 직사각형으로 보인다.
요즘의 밥그릇 디자인은 이런 전통적인 반기의 모습을 고수하는 것이 드물다.
전기밥솥의 보온 기능이 있는 덕에 열기가 날아가지 않도록
한 뚜껑 있는 밥그릇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밥그릇은 소재에 따라 유기나 사기가 있지만
, 역시 최근에는 보기 드물다. 유기는 무겁고 사기는 잘 깨져서
편리함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아서다.
그래서 등장한 밥그릇이 스테인리스강(스틸) 밥그릇이다
. 1960년대 들어 나온 스테인리스강 밥그릇은
이제 일반 가정에서는 많이 쓰지 않는다.
하지만 식당에서는 뚜껑 달린 스테인리스강 밥그릇이
여전히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여기에 밥을 미리 담아 온장고에 넣어두며
보관하는 방식을 쓴다.
밥그릇의 크기 또한 크게 달라졌다.
언제나 배고프던 시절, 밥을 넘치게 담은 ‘고봉밥’은
행복 그 자체였을 터. 하지만 이제 밥의 양보다는 질을 따진다
. 밥 먹는 양이 줄면서 밥그릇의 크기 또한 작아진 것이다
. 행남자기에서 1942년 내놓은 혼수세트에 포함된 밥그릇의 용량은
700㏄(밥그릇에 물을 담아 측정)였다. 크기는 점차 작아져
올해 나온 제품의 용량은 230㏄까지 줄었다. 3분의 1로 줄어든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