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육(肉)의 생각은 멸망
이번에는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따라올 수 없다고 하자, 베드로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대답을 통해 몇 가지 배울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베드로는 영적인 판단을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 전혀 모른 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결정을 중요한 것으로 판단했을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 지금 당장 이루어지는 줄로 착각합니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자신이 진짜 사랑하는 줄로 압니다. 그런데 기도를 마치고 눈을 떠 보면 그게 아닌 것입니다. 그 기도는 지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드리는 열정과 헌신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주님, 목숨까지 바쳐 따르겠습니다”라는 말 자체와 감정만큼은 진실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냉정하게 우리 자신을 돌이켜본다면 자신이 매우 이율배반적임을 알게 됩니다.
둘째, 베드로는 인간의 육으로 말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한 것은 거짓이 아닙니다. 그 시점에서 주님을 위해 생명을 바치겠다는 각오는 진실입니다. 그러나 육의 생각에 따라 그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깊이 들어가면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으로 말씀하시고, 베드로는 육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니코데모는 육으로 생각해서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겠습니까?”라고 반응했습니다.
예수님이 언제나 영으로 말씀하시고, 제자들은 언제나 육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영의 말씀을 영으로 받아들이면 갈등이 없는데, 육으로 받아들이면 서로 부딪히게 됩니다. 이에 관한 성경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도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육을 갖고 살아갑니다. 육은 잠을 자고 밥을 먹으며 생리 현상을 보이고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때리면 아픔을 느끼고 병이 들기도 합니다. 사람은 육에 굉장히 익숙해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육을 가꾸고 삽니다. 요즘 ‘Well being’이라고 해서 삶의 질을 높게 가지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웰빙에 대해 살펴보면 온통 육에 관한 것뿐입니다. 성경에서 육은 무익하고 살리는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은 하느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계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8,5-9)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서로 용납하고 사랑하며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수준을 넘어서 원수까지 사랑하는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육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런 세계로의 진입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영에 사로잡혀 있다면 육의 한계를 뛰어넘어 결코 어렵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것도 결코 어렵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13,38)
베드로가 주님을 따르는 데 목숨을 걸겠다고 하자, 예수님은 정말 목숨까지 버릴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그 이유는 베드로가 아무리 의지가 강하고 갖은 애를 쓴다 해도 육으로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