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잠 16:3)
성경이 생명의 말씀이고 영생에 관한 이야기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 해석의 방향이 인간이냐 아니면 십자가냐로 갈리는 중요한 척도가 되기에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중심에 있고 인간의 유익을 위한 해석도 성경에서 말하는 바른 해석으로 오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에게도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말씀이었고 성경을 연구했다.
하지만 자신들의 영생을 위해 연구했으며 자신들이 연구한 대로 하나님을 알았고 자기들 방식으로 믿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하는 종교의 길로 갔던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라고 말씀한다.
성경은 예수님을 증언하고 예수께로 가기를 소원하게 하는 것이지 영생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께로 가면 영생을 얻을 수 있으니 예수를 믿는 것이 영생을 얻는 방법이지 않은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영생을 목적으로 하는 믿음은 자기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자기 믿음 상태에 민감하다. 결국 자신의 믿음이 좋고 나쁨에 따라 영생이 결정된다는 것이기 때문에 바른 믿음이 아니다.
사람들은 믿음이 좋으면 복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일을 여호와께 맡기는 것도 여호와를 믿고 신뢰하는 좋은 믿음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런 믿음으로 자기의 일을 여호와께 맡기면 하나님이 다 이루어주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 맡깁니다’라고 고백하고 기도하지만 사실 진심으로 맡기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저 형식적으로 ‘맡깁니다’라고 말할 뿐이고 실제는 자기 힘으로 자기 일을 이루기 위해 힘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일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사람의 일에는 죽은 자가 되고 실패한 자가 되기 위한 것이 없다.
이처럼 자기 일이 잘되기를 위한 믿음이 결국 사람의 일로 판명되는 것이고, 이러한 믿음으로 자신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긴다는 것 자체가 애당초 안 되는 일이다.
우리가 나의 일을 여호와께 맡겼다면 그 진실함의 여부는 일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내가 전혀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다.
하나님께 맡겼다면 일의 결과는 나로부터 떠난 것이다.
나의 원함과 관계없이 일의 결과가 성공이든 실패든 하나님이 이루어주신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진심으로 맡겼다는 증거로 드러난다.
하지만 우리는 오로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기만 소망한다.
실패를 하나님이 이루신 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인간으로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부터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의 말씀에서 인간이 아닌 예수님을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만이 자기의 일을 여호와께 맡겼고 여호와께서 이루셨기 때문이다.
여호와께 맡긴 예수님의 일에 자기의 뜻은 없다.
여호와가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예수님의 뜻으로 자리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이 엉터리라는 증거다.
맡겼다고 하지만 여전히 나의 뜻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내 뜻대로 이뤄달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앞에 두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라고 기도하신다.
예수님의 기도는 ‘예수님의 원’과 ‘하나님의 원’으로 나누어진다.
예수님의 원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의 고통 앞에서 인간적인 고민을 하신 것이 아니다.
자기를 위해 예수를 버리고 흩어질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기도로 들어와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의 기도로 들어오면 나의 원대로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게 된다.
우리에게는 어려움과 고통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나의 원함이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기도한다.
그러나 그것이 이방인의 기도라는 것을 예수님의 기도에 들어오면 알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의 원대로 이루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가 영생의 영광에 참여하는 길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원대로 이루신 십자가는 저주와 죽음의 세계다.
따라서 우리가 십자가에 들어오게 되면 나의 일, 나의 뜻을 이뤄달라는 기도를 할 수 없음이 드러난다.
우리의 죄의 값인 저주를 예수님이 홀로 대신 담당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 앞에서 나의 뜻은 지워질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죄와 저주가 전부인 우리가 ‘나의 뜻’을 요구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를 멸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주받아야 할 자가 저주를 무시하고 ‘나의 일을 여호와께 맡기면 다 이루어진다’라는 자기 일의 성공에 마음을 둔다면 그것이 예수님의 기도에 들어와 있지 않은, 십자가 밖에 있는 이방인의 행사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르고, 하나님의 길이 우리의 길과 다른 것처럼 우리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라는 말씀을 행한 분이 예수님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이 내용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행위와 계획이 악하여 오로지 저주에 속했을 뿐임을 알고 나의 행사를 빌미로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예수님의 기도에 들어가 아버지께서 예수님으로 이루신 십자가의 세계를 보고 감사하는 자가 본문이 의미하는 성도다.
하나님은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라는 말씀으로 일하시고 이 말씀을 아들 죽음으로 응답하셨다.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면 복을 주고 소원대로 이루신다는 응답은 성경에 없다.
단지 인간의 소원에 응답해준다는 우상을 미끼로 이용하여 영원한 저주에 붙들어 놓고자 하는 사탄의 일일 뿐이다.
-신윤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