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번 단련된 굳셈(百鍊剛)(신영복)
(2006. 4. 15, 프레시안, 신영복의 서예 이야기 )
(백련강)精金百鍊出紅爐 梅經寒苦發淸香
좋은 쇠는 뜨거운 화로에서 백 번 단련된 다음에 나오는 법이며, 매화는 겨울의 한고를 겪은 다음에 맑은 향기를 발하는 법이다. 이 구절은 작자 미상의 낙구(落句) 두 짝이 만나서 이루어진 글귀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서예가들이 즐겨 썼던 글귀이기도 하다. <百鍊剛>이라는 액자체로 쓰기도 하고 두 짝을 대련(對聯)으로 쓰기도 하였다. 역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회자(膾炙)되는 글귀이다.
내가 이 글을 쓴 까닭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감옥을 홍로(紅爐)처럼 자기 자신을 강하게 단련하는 공간으로 삼고, 무기징역을 한고(寒苦) 속의 매화처럼 청향(淸香)을 예비하는 시절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담아서 썼다고 할 수 있다. 감옥에 있는 동안에 이와 비슷한 뜻을 담은 글귀도 썼었다. 이를테면 <금국능상>(金菊凌霜)도 그 중의 하나이다. 금빛 국화는 가을 서리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뜻이다.
이 글귀의 문자적 의미는 물론 감옥의 고통에도 굴하지 않는 의연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글귀 속에는 고통에 힘겨워 하는 절절한 아픔이 느껴진다. 표면에 드러난 의연함은 오히려 그 아픔의 반어적(反語的) 흔적으로 읽혀진다. 그것 역시 지극히 인간적인 것으로 읽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에 비하면 <百鍊剛>은 매우 직설적이고 분명하다. <百鍊剛>에는 자기의 의지를 단련하고 자신의 인격을 아름답게 가꾸어가고자 하는 보다 긍정적인 지향성이 분명한 어조로 선언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百鍊剛>은 <金菊凌霜>과는 달리 초년의 아픔을 어느 정도 겪고 난 이후에 쓸 수 있는 글귀이기도 하다.
감옥에서 서도(書道)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조선시대의 유배(流配)와는 달리 한국의 교도소에서 서도에 정진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전교도소에 1979년에 서도반(書道班)이 생겼다. 반이라고는 하지만 낮 동안에는 각 공장에서 작업을 하고, 작업이 끝난 후 저녁시간에 같은 방에서 함께 붓글씨를 연습할 수 있도록 허가한 것이다. 불교반, 천주교반, 기독교반 그리고 악대(樂隊)반 등이 이미 운영되고 있었다. 종교반은 물론 같은 종파의 신자들이 함께 생활하는 방(房)이다. 악대반은 악대부원들을 같은 방에 수용한 것이다.
이러한 종교방, 악대방에 이어 서도방(房)이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도방에는 붓과 벼루가 허용되었고 입방(入房)후부터 취침시간까지 약 2·3시간 동안 습자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서도반이 만들어질 당시에 이미 나는 공장에서 <재소자 준수사항>이나 <동상 예방 주의사항> 등을 붓글씨로 써 붙이는 일을 하고 있기도 하였다. 서도반이 생기자 자연히 그 방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에 서도반에 모인 사람은 서도에 관심이 있거나 서도에 경륜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서도반은 처음에는 저녁에만 글씨를 쓰다가 곧 서도반이 하나의 작업장으로 성격이 바뀌어 작업실을 갖게 되면서부터 하루 종일 글씨를 쓸 수 있게 되었다. 교도소의 여러 가지 부착물을 쓰거나 환경정리 작업 때문이기도 하였다. 나는 79년부터 88년 출소 때까지 상당히 많은 시간을 서도에 할애한 셈이다. 더욱이 훌륭한 두 분 선생님이 매주 교도소를 방문하여 지도를 받는 행운도 뒤따랐다.
이제는 두 분 선생님 모두 세상을 떠나셨지만, 한 분은 액자체(額字體)에 뛰어나신 만당(晩堂)선생이시고, 또 한 분은 전서(篆書)의 대가이신 정향(靜香)선생이시다. 그리고 한학의 대가이신 노촌(老村)선생도 서도반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징역 초년부터 동양고전을 읽어온 나로서는 서도반의 이러한 분위기가 매우 유익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서(書)와 문(文)을 동시에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옥중에서 쓴 <百鍊剛>을 출소 때 가지고 나올 수 있었던 사연을 이야기해야 한다. 옥중에서 쓴 글씨를 출소 때 가지고 나가는 것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나는 86년에 대전교도소에서 전주교도소로 이감(移監)되게 된다. 사회로 출소하는 경우와 달리 다른 교도소로 이송(移送)되는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내가 그 때까지 썼던 글씨들을 내의(內衣)와 책 등 다른 개인 사물(私物)과 함께 가지고 갈 수 있었다. 떠나는 대전교도소에서도 까다롭지 않았다. 사회로 출소하는 것이 아니라 전주교도소로 이송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전주교도소에 도착하자 대전교도소에서 가지고 온 글씨를 전주교도소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전주교도소 창고에 영치(領置)시킨 것이다. 다른 입소자(入所者)의 사물(私物)과 마찬가지로 출소 때 찾아가게 하였던 것이다. <百鍊剛>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전주교도소 창고에 영치되었다가, 내가 1988년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할 때 자연스럽게 가지고 나올 수 있었던 몇 점의 글씨 중의 하나이다. 이감(移監)이라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 가지고 나올 수 있었던 글씨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百鍊剛>은 나에게는 유별난 의미가 있는 글씨이다. 내가 가장 많이 임서(臨書)했던 미불(米芾, 중국 남송의 서예가 겸 화가)의 기미(氣味)가 가장 잘 나타나고 있기도 하려니와 그 글귀가 갖는 의미가 나의 수형 생활 20년간의 자세가 비교적 여실히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낙관석과 아호에 관하여 한 가지 설명을 덧붙입니다. 옥중에 있을 때는 아호를 소당(紹堂)으로 썼습니다. 그때 서예지도를 하시던 만당선생님께서 주신 호입니다. 당(堂)은 잇는다(紹)는 뜻으로, 당을 잇는다는 것은 가(家)를 잇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때 말씀하시기를 당신(晩堂)을 잇는다는 뜻으로 받아도 되지만, 그것이 부족하다 싶으면 완당(阮堂, 김정희의 호)을 잇는다고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잇는다>는 것은 매우 훌륭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창조 역시 새롭게 잇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작품에 찍은 아호가 소당입니다.
그리고 낙관석은 돌이 아니라 흙입니다. 당시 대전교도소에는 연와(煉瓦)공장이 있었습니다. 벽돌을 굽는 가마(窯)도 있었습니다. 진흙을 얻어다 인장모양으로 먼저 만든 다음 연와공장 재소자에게 부탁하여 초벌구이를 합니다. 그 초벌구이를 받아서 호와 이름을 새겨서 다시 재벌구이를 부탁하여 만든 것입니다.
대전교도소의 흙으로 만든 낙관입니다. 대전교도소의 땅에 수많은 사연이 묻혀 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 사연이 묻힌 흙이 지급 제 책상 설합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출처] (20190211) 백 번 단련된 굳셈(百鍊剛) - 신영복|작성자 서창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