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단비 감독의 장편 데뷔작 ‘남매의 여름밤’을 봤다. 방학을 빌미로 할아버지 집을 찾은 아빠와 옥주, 동주 집을 나와 합세한 고모까지 삼대가 한집에 모여 여름을 보내는 가족의 일상을 평이한 시선으로 담고 있다. 보는 동안은 고레에다 하로카즈나 오지 야스지로의 가족을 다룬 영화들이 떠올렸지만 스크린에 엔딩 크래딧이 올라가는 동안 멍하니 장면들을 반추했다. 이제는 몇 없을 옛날식 양옥과 마음에 스민 배우들의 연기, 엄살없이 담담하게 이야기를 전하는 연출 참 오랜만에 좋은 한국영화를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기하는 공간
영화의 앵글은 철저히 인물들의 동선을 따라 움직인다. 억지스런 움직임이나 감정을 극대화하는 방식을 피하는 대신 인물이 프레임에서 사라지는 순간 몇초간 혹은 인물대신 공간을 중심에 놓기도 한다. 초반 시퀀스에서 옥주,동주가 살던 낡은 아파트, 해질녘에 바스라진 햇살이 거실로 밀려드는 양옥집 빨래가 널려 있다가 없어지고 스산해 보이는 2층 베란다. 아빠의 작은 봉고차까지 영화속 가족 구성원의 감정에 따라 공간 역시 오브제가 아닌 감정을 지닌 존재처럼 취급 되는 느낌을 받는다. 카메라의 시선을 받는 순간 공간 역시 미장센의 일부가 아닌 역을 부여 받은 배우가 되는 마법 같은 순간들이 있었다.
꿈과 기억 사이에
아빠와 고모는 자신들의 엄마 이야기를 종종 했다. 포대기에 쌓인 자신을 안고 횡단보도를 뛰던 엄마를 기억한다고 고모는 말했다. 하지만 포대기에 쌓인 자신을 스스로가 기억 할 수는 없다며 아마 그건 꿈일 거라 말한다. 꿈을 기억으로 착각할 만큼 그리운 존재가 있다면 어른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말은 잃는 경험을 가슴에 묻고도 살아내야 하는 한여름의 성장통이다.
옥주에게 쌓이는 감정
영화의 내러티브에 큰 비중이 옥주의 감정 변화에 있다. 옥주는 사춘기 소녀이다. 의젓한 모습도, 풋사랑에 애가 타는 소녀의 모습도 복잡하게 형성되는 시기지만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스스로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불안해 한다. 가족을 떠난 엄마를 그리워하는 동생 때문에 괴로워 하기도 하고, 할아버지의 집을 차지한 자신의 가족들 때문에 미안한 감정까지 옥주의 마음엔 조금씩 짐이 늘어간다. 윤단비 감독은 옥주를 중심으로 인물들의 내면이 서서히 드러내도록 세심히 연출했다. 과잉된 감정이나 극적인 사건대신 일상의 미세한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가깝다고 느끼지만 애써 모르려고 했던 서로의 한계를 보여주려 한다.
신중현의 미련, 할아버지
잠깐만 신세 진다며 비집고 들어온 아들 내외도, 집나온 작은 딸도 할아버지는 그저 받아들이신다. 함께 생활을 해가며 서로를 조금은 이해하는 것 같지만 각자는 서로가 불안하고 안스럽다. 할아버지는 밤에 혼자 음악을 들으신다. 거실 소파에 앉아 듣던 노래는 신중현의 미련이었다. 옥주와 동주 세대에겐 거리가 멀지만 할아버지는 그 노래가 좋다. 만날 수 없어 잊으려 애쓰지만 마음에서 놓으려 해도 그러지 못하는 감정이 할아버지에겐 인생이었다. 동시에 그 노래는 공간의 분위기를 덧칠한다. 세대의 벽은 공간에 발린 묵은 분위기로 허물어진다.
그렇게 한 계절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아이들은 자란다. 그만큼 어른은 늙어간다. 기억으로 남는 건 함께한 순간들 뿐이다. 텃밭에서 딴 고추를 비빔국수에 넣어 먹고, 할아버지는 옥주가 선물한 모자를 쓰고 동주와 함께 방울 토마토를 딴다. 저녁이면 아빠와 고모가 집으로 돌아오는 풍경이 여름이다. 이 안온한 일상은 영원하진 않다. 살아있다는 건 끝임없는 이별의 연속일테니까. 그렇게 한 계절이 흘러간다. 김애란의 소설속 문장처럼 ‘너는 자라 고작 내가 될’ 가족 이야기는 영화가 끝난 뒤에 진짜 시작 될 것 같다.
첫댓글 제목 보고 볼까 말까 했는데 봐야겠네여~~보고 다시 본문을 읽어볼게여~~^^
익스트림에서 평가가 좋기에 보고 왔는데 기대보다 좋았습니다.
왠지 이런 제목의 영화는 시골로 가서 과수원, 계곡있는 할아버지 집에서 과일 따먹고 물고기 잡는 힐링 영화가 기대 되는데 정반대로 도시에서 인물간의 관계에 집중 했더라구요.
최정운 배우 연기도 좋았고...
어제~~봤네여 ㅡ옥주의 마지막 씬에 제 마음도 울렁거렸네요
작년에 벌새
올해 남매의 여름밤이라더군요
전 개봉일에 봤어요
독립영화 좋아하신다면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