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변화
홍상수 영화는 카메라를 쓰는 방식이나 배우에 대한 태도나 주제의식 등은 새로운 작품이 나올 때마다 변화했지만 일상과 우연을 기저에 깔아 둔다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관객이 그것에 천착 하지 않도록 컷을 나누는 대신 줌인 줌아웃으로 처리하고 대사를 소화하는 배우들 역시 일상 언어를 쓰지만 현실로 받아들이기 힘든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번 작품에서는 기저에 깔아 두던 일상과 우연을 관객이 인지 하도록 표면에 올려 둠으로써 메타포가 아닌 담백하게 진솔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듯하다.
보이는 ‘말’들
언제나 그렇지만 홍상수 영화를 서사적 관점으로 본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느슨하게 연결된 관계를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매번 주어진 상황이 신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도망친 여자>는 세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5년 만에 남편의 출장으로 시간이 생긴 감희가 세명의 지인을 만나는 과정을 쫓고 있다. 첫 번째는 영순이 사는 곳을 찾는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외곽지역에 사는 영순의 삶은 단조롭다. 텃밭을 가꾸고 이웃이 키우는 닭이 우는 한가한 동네다. 앞집 남자와 길고양이 문제로 다투고 젊은 여자가 새벽에 집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지만 비교적 큰 사건 없이 흘러간다. 두 번째 챕터로 넘어가면 감희는 수영을 만나러 간다. 인왕산이 보이는 집을 얻고 적당히 예술을 하며 예술에 종사자들과 어울리려 애쓰며 산다. 두 개의 챕터를 거치는 동안 영화 속 시간은 묘한 기시감이 흐른다. 영순과 보내던 시간이 수영에게 그대로 반복되는 것이다. 예컨대, 영순의 집에서 닭 울음이 들렸다면 수영의 집 앞에선 까마귀가 울고, 영순의 집에 고양이 문제를 따지러 온 남자가 있었다면 수영의 집에는 무작정 들이대는 젊은 시인이 있었다. 그들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그걸 지켜보는 감희의 시선은 cctv와 인터폰 카메라라는 점도 비슷하다. 심지어 각각 집에 들어가는 방향은 반대로 둔다. 두 챕터 구성을 비슷하게 함으로써 우리가 놓치고 살아가는 일상이 평범에서 비범으로 변주해가는 과정을 주목하게 한다. 그렇게 관객의 시선을 모아 두고 던지는 것은 겹치는 신들 사이에 어긋나는 지점이다. 그 지점에 인물들이 뱉어내는 말들이 있다. 영화 속 주요 인물들은 그들에 대한 정보가 없다. 극도로 절제된 공간과 상황에 이들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하지만 인물의 진심은 화면에 포커싱과 미세하게 잡아내는 몸짓과 표정, 공간의 음영과 소리로 드러낸다. 관객은 어떤 인물들의 어떤 사연을 담은 이야기구나 하는 무의미한 추리 대신 사람이 사람에게 전달되는 그야말로 ‘말’이 구현화되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다.
피상적인 말과 흔들리는 것들
첫 번째와 두 번째 챕터는 감희가 찾아가 만난 사람들이었다. 접점과 어긋나는 순간들이 교차하는 지점이 있었다면 세 번째 챕터는 우연이 개입을 한다. 감희은 영화를 보러 들른 극장에서 우진과 만난다. 그 극장은 우진이 일하는 곳이고 잠시 뒤 정선생의 북 토크가 예정되어 있다. 이들의 약간은 서먹한 대화에서 짐작이 가듯 감희는 우진의 남편인 정선생과 사귀었던 사이다. 우진은 현재 남편에게 권태로운 감정을 느끼고 있는 듯하고, 과거에 감희에게 준 상처를 사과한다. 감희는 그런 우진에게 지난 일을 잊으라며, 아무렇지 않다고 다독인다. 하지만 그 말이 진심인지는 알 길이 없다. 영화 속 인물들은 많은 말들을 하지만 피상적인 것들로 들려오는 게 많다. 감희는 영순의 집에서 식사를 할 때도 소가 불쌍하다는 이야기를 하며 고기를 맛있게 먹는다. 그의 말이 가볍고 겉돌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세 개의 챕터를 관통하는 감희의 말이 있다. 5년 만에 떨어져 있는 남편의 이야기이다. “떨어져 본 적이 없어요. 5년 동안, 사랑하는 사람은 무조건 붙어있어야 한다고 말하더라고” 맥이 빠진 듯하면서 처연한 듯한 이 대사를 읊조리고 그러면서 그게 좋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 말을 하는 감희는 공허해 보이지만 영화에서 전달되는 정보는 극히 적다. 이지점은 인물의 내면을 가치 판단하지 말았으면 하는 감독의 의도가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감희는 그 말을 최면처럼 되뇐다. 관객은 그 순간 감희가 아닌 감희를 둘러싼 주변을 보게 된다. 영화 속 카메라는 대상 대신 대상을 관찰하는 시선을 담으려 한다. 말들은 피상적인 것들을 훑고 있지만 시선은 애틋하다. 말은 현재를 흐르지만 그 사이를 부유하는 시선은 우리를 흔든다.
여자들의 순간
이 영화에서 비 일상성을 찾는다면 집요하게 남자들을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도망친 여자> 속 남자들은 하나같이 비겁하고 이기적이며 지질하다. 등장의 방식 역시 뒤돌아 서있고, 영순의 집 근처에 사는 수탉은 자기 과시를 위해 암탉을 괴롭히는 존재로 묘사된다. 홍상수의 이전 작품들에 남자들도 좋은 모습으로 비치진 않았지만 이번 작품은 유독 소외되거나 대상화된 존재로 등장한다. 이것은 ‘김민희’라는 피사체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함이란 생각이 들었다. 전작인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고독을 받아들이고 파도 앞에 꼿꼿이 선 외로운 존재에서 <도망친 여자>를 통해 영화 속 시간을 유유히 흘러 다니며 나와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현실의 무게를 안고 사는 이들을 위로한다. 두렵고 막막하고 울 것만 같은 상황들을 안고 있다면 감희는 그것들이 피어날 보드라운 흙이 되어준다. 그것은 의도하지 않은 삶의 태도이다.
감희는 영화를 보고 나가다 정선생과 마주친다. 기분이 상한듯한 모습으로 극장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아까 감희가 봤던 스크린은 속 화면은 흑백이었지만 돌아오니 컬러로 바뀌어 있다. 그 안에는 여전히 파도가 치고 있고 감희는 관객이 없는 극장에 앉는다. 우진에게 이야기했던 것처럼 평화롭지만 진짜인지 위장된 평화인지는 알 길이 없다. 홍상수(혹은 당신)는 어디로 도망가려 했을까? 스크린 앞에 앉은 감희를 통해 영화 안으로 다시 가겠다는 선언 일까? 어떤 영화가 그렇지 않겠느냐 만은 받아들이는 건 관객의 몫이다.
첫댓글 오랫만에 홍상수 영화 보고싶네요.. 저는 즐겨보는 편은 아니라서 오수정 보고 안본듯. 뭔가 보고나서 불편한 감정들이 싫었던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