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베르톨트 브레히트)
나도 안다. 행복한 자만이
사랑받고 있음을 그의 음성은
듣기 좋고, 그의 얼굴은 잘 생겼다.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가
토질 나쁜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레 나무를
못생겼다 욕한다.
해협의 산뜻한 보트와 즐거운 돛단배들이
네게는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무엇보다도
어부들의 찢어진 어망이 눈에 띌 뿐이다
왜 나는 자꾸
40대의 소작인 처가 허리를 꼬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
처녀들의 젖가슴은
예나 이제나 따스한데
나의 시에 운을 맞춘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생각된다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엉터리 화가에 대한 경악이
나의 가슴속에서 다투고 있다.
그러나 바로 두 번째 것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코로나 아니면 카불, 우울한 소식들을 접하며 어떤 시도 쓰지 못하고 브레히트의 시집을 읽었다. 나치 독일을 피해 1939년 스웨덴에 거주할 무렵에 쓴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는 그 제목만으로도 문학사에 남을 명시. 브레히트는 간결하고 명료한 언어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못생긴 나무를 탓하지 말고, 나무를 구부러지게 만든 토질 나쁜 땅을 개선하라. 잘못된 현실에 원인을 제공한 토대를 봐라. 밑에서 네 번째 행에 나오는 ‘엉터리 화가’는 히틀러를 지칭한다.
난민이 되어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싸움터에서 밥을 먹고/ 살인자들 틈에 눕고 /되는대로 사랑을 하고” (시 ‘후손들에게’) 이 세상에서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지만 시는 남았다. 김소월보다 모더나에 더 익숙해진 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나는 우리는 어디로 가나. 엉터리 현실에 대한 경악과 가을에의 예감이 내 가슴 속에서 다투고….
독일에서 괴테 이후 세계적 명성을 날린 3대 작가로 토마스 만(Thomas Mann),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를 꼽는다. 이중 브레히트는 연극을 혁신해 현대화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에 근거한 연극이 클라이맥스, 엔딩의 구조 속에 감정이입을 높여가며 카타르시스를 주는 데 비해 브레히트가 내놓은 서사극(敍事劇)은 관객과 무대 위의 등장인물 사이의 감정이입을 차단하여 관객이 객관적 입장에 머물도록 하였다.
독일 바이에른 왕국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출생한 브레히트는 1차대전에 징집되지 않으려고 뮌헨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했지만 결국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에 병원에서 의무병으로 1달간 근무하였다. 1922년 <밤의 북소리>로 클라이스트 상을 수상하였으며, 28년 연극 <서푼짜리 오페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그는 일찍이 정치적으로 좌파 성향을 띄고 있었는데, 초기에는 무정부주의적 경향을 보였으나, 1920년대 후반부터는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여 자신의 사상을 작품에 이입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은 실질적으로는 그의 동료들과 공동으로 집필한 작품이 굉장히 많다. 그 예로 <서푼짜리 오페라>의 각본은 거의 대부분 그의 여비서였던 엘리자베스 하우프트만이 영국인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를 번역한 것을 메인 텍스트로 삼은 것이어서 후에 하우프트만이 공동 저자로 인정되었다.
작품으로는 <어머니>, <도살장의 성 요한나> 등이 있다. 1933년 나치스가 독일 정권을 장악하고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구실로 대대적인 정치적 탄압을 전개하자 브레히트는 덴마크로 망명하여 정치적 의식을 드러내는 시를 쓰는 한편, 연극 <제3제국의 공포와 빈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등을 썼다.
이후, 1941년 핀란드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는 미국의 매카시즘 때문에 스위스로 떠나 <안티고네>와 <파리 코뮌의 나날>을 쓰고, 연극론에 대한 개설서 <소사고 원리>를 집필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동독의 동베를린으로 가 자신의 작품들을 연출하면서 후배 연극인을 양성하였다. 모스크바에서 스탈린 평화상을 수상하였으며, 동독에서도 여전히 체제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작품을 남겼다.(최영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