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나는 꽃을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빠, 이게 무슨 꽃이야?”라고 묻는 딸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기 위해 꽃에 관한 책을 사서 읽게 되었고, 그게 계기가 되어 전국의 야생화를 찾으러 다니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꽃에 대해 질문하던 어린 딸은 이제 스물일곱 살의 성년이 되었다. 그 사이 꽃에 대한 내 지식수준도 높아졌다. 『문학 속에 핀 꽃들』, 『서울 화양연화』처럼 문학과 꽃을 결합시킨 책을 써봤는데 반응이 꽤 좋았다. 이후 꽃에 관한 컬럼도 많이 쓰게 되었다. 꽃에 관한 글을 쓰다 보니 박완서의 작품이 자주 연결되고 인용되었다. 하여 박완서 작품에 등장하는 꽃만 집중적으로 다룬 『꽃으로 박완서를 읽다』라는 책도 펴냈다.
최근 출간된 『꽃으로 토지를 읽다』는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 나온 꽃을 집중 분석하기 위해 새롭게 도전한 결과물이다. 소설 『토지』는 1969년부터 1994년까지 무려 26년에 걸쳐 집필되었는데, 5부에 걸쳐 20여권으로 이루어졌다. 이 책을 한번 다 읽는 데만도 무려 석 달 이상이 걸렸다. 처음에는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등장인물과 꽃과의 연관성에 대한 작가의 의도를 명확히 감지하지 못해 방황했다. 하지만 몇 번이고 다시 훑어보면서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에는 항상 꽃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작가 자신이 실토했듯이 26년 동안 600여명이 등장하는 20여권의 책을 높은 집중력을 계속 유지하면서 쓰기는 힘든 일이다. 하지만 유독 꽃이 등장하는 장면에는 박경리 작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글을 쓴 흔적이 역력했다. 꽃이 나오는 장면만을 모으면 『토지』의 최고 부분을 간추린 요약본과도 일치한다.
이 책에서 가장 대표적인 꽃을 들자면 최참판댁을 상징하는 능소화와 해방을 상징하는 해당화를 들 수 있다. 특히 일제시대에 해당화는 해방의 염원을 담은 한용운의 시 ‘해당화’와 해방이 멀지 않았음을 상징하는 이인성의 그림 ‘해당화’를 통해 해방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소설 『토지』의 끝 부분에서 서희는 해방이 되었다는 아들의 말을 들은 뒤 해당화 가지를 휘어잡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해당화 가지에는, 짧지만 억세고 불규칙한 잔가시가 무수히 많다. 따라서 해당화 가지를 휘어잡은 서희의 손바닥은 피범벅이 되었을 것인데 작가는 이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작가가 해당화 가지에 가시가 많다는 것을 고려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해방이라는 감격 때문에 해당화의 억센 가시가 서희에게는 아무런 고통도 주지 못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감격적이지만 냉정을 잃지 않는 『토지』의 마지막 장면 생략)
해당화는 사랑을 상징하는 꽃이기도 하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나 이미자의 노래 ‘섬마을 선생님’(1967)에서도 해당화는 사랑을 의미한다. 소설 『토지』에서는 서희를 짝사랑하는 병수가 담장 구멍으로 서희를 엿보다 길상에게 들키는 장면에서도 해당화가 나온다.
(어리숙하고 우스꽝스럽지만 순수한 병수의 모습 생략)
길상이, 파초와 같이 품이 넓은 남자
용이와 월선이의 사랑의 상징, 버드나무
양현과 영광의 안타까운 쑥부쟁이 사랑
조선과 일본인을 동시에 사랑한 수국 같은 여인 유인실
....
(생략)
뱀발. <장미의 이름>으로 유명한 움베르트 에코는 “화자가 스스로 해석하는 글은 소설이 아니다. 소설이라는 것은 수많은 해석을 창조해야 하는 글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에코의 관점에서 보자면, 소설가 박경리가 꽃을 활용한 의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독자가 그것을 어떻게 멋지게 해석하는 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독자이자 작가로서 꽃에 대한 지식을 『토지』라는 소설을 통해 창조한 김민철 작가의 시도는 따라서 매우 신선하다고 생각됩니다. 박경리 작가가 살아계셨다면 아주 좋아하셨을 것입니다.
꼰대는 상상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아는 세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꼰대의 전형적인 특징은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못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부터 모르는 얘기가 나오거나, 심지어 자기가 아는 것과 조금이라도 다른 얘기가 나오면 화를 냅니다. 예, 맞습니다. 저는 꼰대입니다. 저는 아이들의 말도 잘 듣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저에게 꽃에 대해 한두번쯤은 물어보거나 아는 척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고요. 화를 냈는 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꽃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가 죽 이어져 왔습니다. 두 딸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꽃을 공부하다가 박경리의 대하소설, 또는 문학을 재창조하는 경지에 이르신 김민철 작가의 강의, 잘 들었습니다.
첫댓글 언제나 솔직하고 재미있는 강의평, 잘 읽고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