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창 19:26)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과 불로 심판하실 때 그 성에서 나와 도망치던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봄으로 소금 기둥이 된 내용을 본문으로 한 설교들을 보면 모두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한다.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심판받는 세상에 미련을 두고 돌아본 것이 죄가 되어 받은 심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심판을 받을 세상에 미련 두지 말고 돌아보지도 말고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나아가는 신앙이 되자’라는 교훈으로 이어진다.
롯의 아내에게 소돔과 고모라는 평생을 살아온 삶의 터전이다. 그곳을 아무 미련도 두지 않고 버리고 나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롯과 롯의 아내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싫어서 자발적으로 나온 것이 아님을 생각하면 뒤돌아보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뒤를 돌아본 것을 심판받는 땅에 여전히 마음을 둔 죄의 행위로 해석하는 것도 타당하다 할 수 있다. 더군다나 돌아보지 말라는 말씀도 있었으니 불순종의 죄가 되는 것도 분명하다.
그런데 의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왜 소금 기둥이 되게 하는 것인가?’라는 점이다. 소금 기둥은 언젠가는 녹아서 사라질 것이다. 만약 롯의 아내를 통해서 세상을 돌아보는 죄에 대한 교훈을 남기기 위한 것이라면 소금 기둥보다는 돌기둥이 되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또한 롯 아내의 개인적인 심판이라면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유황과 불이 떨어져 죽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보면 소금 기둥 된 것을 단순히 심판의 의미로 해석하기에는 모자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소돔과 고모라가 위치했던 지역과 연결하여 말하기도 한다. 소돔과 고모라가 사해 근처에 있었는데 사해의 특성이 일반 바다보다 훨씬 높은 염도로 인해서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죽음의 공간인 것처럼 세상을 돌아보는 것은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되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 소금 기둥이 되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을 돌아보지 않는가? 세상에 마음 두지 않고 사는 인간은 없다. 항상 행복이 있는 세상을 꿈꾼다. 그런 우리에게 ‘세상을 돌아보지 말고 예수님만 바라보며 살자’라는 말은 단지 말일 뿐 세상 현실로 이루기는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단지 교훈적 의미로 해석할 소금 기둥은 아니다.
롯의 아내는 롯의 아내 이야기로 해석하면 된다. 따라서 “롯의 처를 기억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눅 17:32-33)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마리로 삼아 접근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예수님은 롯의 아내의 사건을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여 잃은 것으로 말씀한다. 심판을 받는 땅을 돌아본 것이 사람이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이상한 점은, 롯의 아내는 이미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왔기에 목숨이 보존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 뒤를 돌아본 것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이 문제는 뒤를 돌아본 행위가 아니라 뒤를 돌아보게 한 속성에 초점을 두고 생각하면 된다. 심판의 현장인 세상을 돌아보는 속성을 통해서 롯의 아내가 우리 자신이고 ‘롯의 처를 기억하라’는 말씀은 롯의 처를 통해 드러난 인간 됨, 즉 우리 자신을 기억하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롯의 때를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 것으로 말씀한다(눅 17:28). 이 사람들을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게 하여 멸망시킨 것이다. 노아 때는 비가 내려 심판을 받았고 롯의 때에는 비 오듯 내리는 불과 유황으로 심판을 받음으로 노아 때와 롯의 때의 인간 형편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노아와 롯의 때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장가들고 시집가며 살았다. 특별히 악하다고 할 것이 없는 평범한 일상생활을 했을 뿐이고 우리 또한 그들의 생활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 생활이 자기 목숨을 보전하기 위한 것이었고 심판의 이유였다면 롯의 때나 지금 우리는 다르지 않다. 심판의 세상에서 심판받을 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을 심판의 현장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필요한 곳으로 바라보며 애착하는 것이 롯의 아내와 같다.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이 있는 날 동틀 때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내라고 한다. 그런데도 롯이 지체하자 천사가 그들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둔다. 이것을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라고 말한다(창 19:15-16). 따라서 심판이 있는 소돔과 고모라 밖은 하나님의 자비가 역사하는 현장이며 롯과 그의 가족은 천사에 의해 하나님의 자비의 세계로 이끌려 나온 것이 된다.
중요한 사실은 롯과 그의 가족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더해졌다 해도 그들은 여전히 먹고 마시고 사고팔면서 자기 목숨을 보전하기 위한 삶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기 목숨을 보전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자비에 마음을 두는 인간으로 바뀌지 않는다. 이러한 인간 됨이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본 것으로 드러난다. 결국 하나님의 자비의 세계에서 인간은 실패자로 존재한다는 것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롯의 아내다. 여기에 소금 기둥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다.
성경에서 소금은 롯의 아내의 사건으로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레 2:13)라는 말씀이 있다.
롯의 아내로 시작한 소금은 인간의 실패를 나타내고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실행되고 성취된다. 이런 뜻으로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하고 이것을 언약의 소금으로 말한다.
민 18:19 절에서 말하는 ‘영원한 소금 언약’도 같은 의미다. 변하지 않은 소금의 특성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패에도 변하지 않고 반드시 성취하신 언약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소금 기둥에 담긴 취지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성도를 세상의 소금이라 한다. 성도는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언약을 이루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증거할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행함으로 예수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보전하고자 하는 것이기에 잃을 것이라고 하신다.
소금 기둥은 자기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한 실패자로 존재하는 인간 됨을 증거한다. 이러한 인간 됨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맛을 잃은 소금이며 쓸데없어 버려진다.
-신윤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