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海(만해) 韓龍雲(한용운) 詩 21首(수)
獨夜(독야) 韓龍雲(한용운)
홀로 있는 밤
玉林垂露月如霰(옥림수로월여산) : 숲에 맺힌 이슬 달빛에 싸락눈 같고
隔水砧聲江女寒(격수침성간여한) : 물 건너 들려오는 어느 집 다듬이 소리.
兩岸靑山皆萬古(양안청산개만고) : 저 산들이야 마냥 저기 있으련만
梅花初發定僧還(매화초발증승환) : 매화꽃 필 때면 고향 찾아 돌아가리.
新晴(신청) 韓龍雲(한용운)
새로 갬
禽聲隔夢冷(금성격몽냉) : 새 소리 꿈 저쪽에 차고
花氣入禪無(화기입선무) : 꽃향기 선(禪)에 들어와 스러진다.
禪夢復相忘(선몽복상환) : 선과 꿈 다시 잊은 곳
窓前一碧梧(창전일벽오) : 창 앞의 한 그루 벽오동나무!
雲水(운수) 韓龍雲(한용운)
탁발승
白雲斷似衲(백운단사납) : 흰 구름은 끊어져 법의(法衣)와 같고
綠水矮於弓(녹수왜어궁) : 푸른 물은 활보다도 더욱 짧아라.
此外一何去(차외일하거) : 이곳 떠나 어디로 자꾸 감이랴.
悠然看不窮(유연간불궁) : 유연히 그 무궁함 바라보느니!
淸寒(청한) 韓龍雲(한용운)
설한 추위
待月梅何鶴(시월매하학) : 달을 기다리며 매화는 학인 양
依梧人亦鳳(의오인역봉) : 오동에 의지하니 사람 또한 봉황이네.
通宵寒不盡(통소한부진) : 온 밤새도록 추위는 안 그치고
遶屋雪爲峰(요옥설위봉) : 집주변을 둘러싼 눈은 산을 이루네.
孤遊(고유) 韓龍雲(한용운)
홀로 거닐며
一生多歷落(일생다역락) : 일생에 기구한 일 많이 겪으니
此意千秋同(차의천추동) : 이 심경은 천추(千秋)에 아마 같으리.
丹心夜月冷(단심야월냉) : 일편단심 안 가시니 밤 달이 차고
蒼髮曉雲空(창발효운공) : 흰머리 흩날릴 제 새벽 구름 스러짐을.
人立江山外(인립강산외) : 고국 강산 그 밖에 내가 섰는데
春來天地中(춘래천지중) : 아, 봄은 이 천지에 오고 있는가.
雁橫北斗没(안횡북두몰) : 기러기 비껴 날고 북두성 사라질 녘
霜雪關河通(상설관하통) : 눈서리 치는 변경 강물 흐름을 본다.
半生遇歷落(반생우역락) : 반평생 만나니 기구한 일들.
窮北寂寥遊(궁북적요유) : 다시 북녘땅 끝까지 외로이 흘러왔네.
冷齋說風雨(냉제설풍우) : 차가운 방 안에서 비바람 걱정하느니
晝回鬢髮秋(주회빈발추) : 이 밤새면 백발 느는 가을이리라.
訪白華庵(방백화암) 韓龍雲(한용운)
백화암을 찾아서
春日尋幽逕(춘일심유경) : 그윽한 오솔길을 봄날에 찾아드니
風光散四林(풍광산사림) : 풍광(風光)은 숲속에서 사방으로 흩어지고
窮途孤興發(궁도고흥발) : 길도 끊어진 여기 흥은 일어서
一望極淸唫(일망극청금) : 바라보며 마음껏 시를 읊조리다.
雪夜(설야) 韓龍雲(한용운)
눈 오는 밤
四山圍獄雪如海(사산위옥설여해) : 산이 사방으로 에워 싼 감옥 눈이 바다 같은데
衾寒如鐵夢如灰(금한여철몽여회) : 찬 이불 쇠와 같고 꿈은 재와 같네.
鐵窓猶有鎖不得(철창유유쇄불득) : 철창조차 가두지 못하는 것 있나니
夜聞鐘聲何處來(야문종성하처래) : 한 밤중 종소리 어디에서 들리는가.
咏雁(영안) 韓龍雲(한용운)
기러기를 읊다
一雁秋聲遠(일안추성원) : 외기러기 슬픈 울음 멀리 들리고
數星夜色多(수성야색다) : 별도 몇 개 반짝여 밤빛이 짙다.
燈深猶未宿(등심유미숙) : 등불 사위어 가고 잠도 안 오는데
獄吏問歸家(옥리문귀가) : 언제 풀리느냐고 옥리(獄吏)가
天涯一雁叫(천애일안규) : 아득한 하늘가에 외기러기 우니
滿獄秋聲長(만옥추성장) : 옥에 가득 가을 소리 길기만 한데.
道破蘆月外(도파로월외) : 갈대를 비추는 달 말하는 외에
有何圓舌相(유하원설상) : 그 어떤 원설상(圓舌相)이 있다는 건가.
榮山浦舟中(영산포주중) 韓龍雲(한용운)
영산포의 배 안에서
漁笛一江月(어적일강월) : 어적(漁笛) 소리 들리는 밤 강에는 달이 밝고
酒燈兩岸秋(주등양안추) : 술집의 등불 환한 기슭은 가을.
孤帆天似水(고범천사수) : 외로운 돛배에 하늘이 물 같은데
人逐荻花流(인축적화류) : 사람은 갈꽃 따라 하염없이 흐르노니!
過九曲嶺(과구곡령) 韓龍雲(한용운)
구곡령을 지나며
過盡臘雪千里客(과진랍설천리객) : 천리 밖 객은 섣달 눈을 다 보내고서
智異山裡趁春陽(지이산리진춘양) : 지리산 깊은 골짝 봄볕에 길을 가면
去天無尺九曲路(거천무척구곡로) : 하늘에 닿을 듯한 구곡령 길도
轉回不及我心長(전회불급아심장) : 뒤틀린 내 마음의 그 길이엔 못 미치리.
蝴蝶(호접) 韓龍雲(한용운)
나비
東風事在百花頭(동풍사재백화두) : 봄바람에 꽃을 찾아 분주하거니
恐是人間蕩子流(공시인간탕자류) : 아마도 사람이면 탕자(蕩子)쯤 되리.
可憐添做浮生夢(가련첨주부생몽) : 가뜩이나 꿈인 세상 꿈을 덧붙여
消了當年第幾愁(소료당년제기수) : 그 당시의 어느 시름 씻었단 말인가.
山家逸興(산가일흥) 韓龍雲(한용운)
산골 집 흥취
兩三傍水是誰家(량삼방수시수가) : 누가 사는지 물가의 두세 채 집
晝掩板扉隔彩霞(주엄판비격채하) : 낮에도 문을 닫아 놀을 막네.
圍石有碁皆響竹(위석유기개향죽) : 돌을 둘러앉으면 바둑 소리 대숲을 울리고
酌雲無酒不傾花(작운무주불경화) : 구름에 잔질하니 꽃 보며 안 마시는 술이란 없어
十年一履高何妨(십년일리고하방) : 십년을 한 신 끌기로 고상함 무엇 해치리.
萬事半瓢空亦佳(만사반표공역가) : 만사는 표주박 속 비었어도 관계없네.
春樹斜陽堪可坐(춘수사양감가좌) : 석양의 나무 그늘 앉을 만하니
滿山滴翠聽樵茄(만산적취청초가) : 만산 신록(滿山新綠) 속에 풀피리를 듣느니!
龜岩寺初秋(구암사초추) 韓龍雲(한용운)
구암사의 초가을
古寺秋來人自空(고사추래인자공) : 옛 절에 가을 되니 마음 절로 맑아지고
匏花高發月明中(포화고발월명중) : 달빛 속 높이 달린 박꽃이 희다.
霜前南峽楓林語(상전남협풍림어) : 서리 오기 전 남쪽 골짜기 단풍나무 숲
纔見三枝數葉紅(재견삼지수엽홍) : 서너 가지 잎 새가 겨우 붉어졌도다.
香積韻風景(향적봉풍경) 韓龍雲(한용운)
차영호화상향적운
蔓木森凉孤月明(만목삼량고월명) : 숲은 썰렁한데 밝은 달빛이
碧雲層雪夜生溟(벽운층설야생명) : 구름과 눈 비추니 완연한 바다.
十萬珠玉收不得(십만주옥수불득) : 십만 그루 그 구슬 하도 고와서
不知是鬼是丹靑(부지시귀시단청) : 조화인 줄 모르고 그림인가고.
藥師庵途中(약사암도중) 韓龍雲(한용운)
약사암 가는 길
十里猶堪半日行(십리유감반일행) : 십리도 반나절쯤 구경하며 갈만은 하니
白雲有路何幽長(백운유로하유장) : 구름 속 길이 이리 그윽할 줄야!
緣溪轉入水窮處(연계전입수궁처) : 시내 따라 가노라니 물도 다한 곳.
深樹無花山自香(심수무화산자향) : 꽃 없는데도 숲에서 풍겨오는 아, 산의 향기여!:
華嚴寺散步(화엄사 산보) 韓龍雲(한용운)
화엄사 산보
古寺逢春宜眺望(고사봉춘의조망) : 옛 절에 봄이 되니 조망이 좋아
潺江遠水始生波(잔강원수시생파) : 잔잔한 강 먼 물에 잔물결 인다.
回首雲山千里外(회수운산천리외) : 머리 돌려 천리 밖 바라보노니
奈無人和白雪歌(나무인화백설가) : 백설가(白雪歌)에 화답할 이 어찌 없으랴.
二人來坐溪上石(이인래좌계상석) : 둘이 와 시내 위 돌에 앉으니
磵水有聲不見波(간수유성불견파) : 소리 내는 산골 물 물결은 보이지 않고
兩岸靑山斜陽外(양안청산사양외) : 양 기슭의 청산에 저녁 해 비칠 때
歸語無心自成歌(귀어무심자성가) : 돌아가며 흥얼대니 저절로 노래되네.
自京歸五歲庵贈朴漢永(자경귀오세암증박한영) 韓龍雲(한용운)
서울로 돌아와 오세암의 박한영에게 보내다
一天明月君何在(일천명월군하재) : 한 하늘 한 달이건만 그대 어디 계신지
滿地丹楓我獨來(만지단풍아독래) : 단풍에 묻힌 산속 나 홀로 돌아왔네.
明月丹楓共相忘(명월단풍공상망) : 밝은 달과 단풍을 잊기는 해도
唯有我心共徘徊(유유아심공배회) : 마음만은 그대 따라 헤매는구나!
悟道頌(오도송) 韓龍雲(한용운)
오도송
男兒到處是故鄕(남아도처시고향) : 남아가 가는 곳은 어디나 고향인 것을
幾人長在客愁中(기인장재용수중) : 그 몇 사람 객수(客愁) 속에 길이 갇혔나.
一聲喝破三千界(일성갈파삼천계) : 한 마디 버럭 질러 삼천세계(三千世界) 뒤흔드니
雪裡桃花片片紅(설리도화편편홍) : 눈 속에 점점이 복사꽃 붉게 지네.
雪夜看畵有感(설화간화유감) 韓龍雲(한용운)
눈 오는 밤 그림을 보고
風雪中宵不盡吹(풍설중소불진취) : 한밤중 눈바람은 그치지 않고
人情歲色共參差(인정세색공참차) : 인정과 저무는 해(年) 어긋남 많네.
生來慣被黃金負(생래관피황금부) : 지금껏 가난과는 친근한 사이
老去忍從白酒欺(노거인종백주기) : 늙어가며 술에는 또 속으며 사네.
寒透殘梅香易失(한투잔매향역실) : 매화에 추위 스미니 향기 쉬 스러지고
燈深華髮夢難期(등심화발몽난기) : 등불 사위는 밤 늙은이 꿈은 기약키 어려워.
畵裡漁翁眞可羨(화리어옹진가선) : 저 그림 속 고기잡이 노인은 참 부럽군.
坐看春水緣生漪(좌간춘수연생의) : 앉아서 봄철 물에 잔물결 치는 것을 보느니!
獄中感懷(옥중감회) 한용운(韓龍雲)
옥중의 감회
一念但覺淨無塵(일념단각정무진) : 마음을 집중하니 오직 생각이 티끌 없이 맑아지고
鐵窓明月自生新(철창명월자생신) : 철창으로 새로 돋는 달빛 고와라.
憂樂本空唯心在(우락본공유심재) : 우락(憂樂)이 공이요 마음만이 있거니
釋迦原來尋常人(석가원래심상인) : 석가도 원래는 예사 사람일 뿐.
山晝(산야) 韓龍雲(한용운)
산의 대낮
群峰蝟集到窓中(군봉위집도창중) : 봉우리 창에 모여 그림인 양하고
風雪凄然去歲同(풍설처연거세동) : 눈바람은 몰아쳐 지난해인 듯.
人境寥寥晝氣冷(인경요요주기냉) : 인경(人境)이 고요하고 낮 기운 찬 날
梅花落處三生空(매화낙처삼생공) : 매화꽃 지는 곳에 삼생(三生)이 공(空)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