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서갱유(焚書坑儒)
책을 태우고 선비를 묻은 진시황의 폭정
태울 분/글 서/구덩이 갱/선비 유
焚書坑儒는 焚書와 坑儒의 두사건을 가리킨다. 秦始皇이 中原을 統一한지 8년이 지난 어느날(紀元前 213年) 咸陽宮에서 盛大한 宴會를 벌여 자신의 功德을 稱頌케 했다.
술이 몇순배 돌자 이야기는 엉뚱하게 체제논쟁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당시 진시황은 法家의 주장을 받아들여 儒家의 理想인 封建制를 廢止하고 郡縣制를 實施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 때문에 儒家들은 事事件件 진시황의 政策에 不滿을 품고 있었으며, 진시황은 그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그래서 機會만 보고 있던 차 이 기회에 儒家의 勢力을 瓦解시키겠다는 생각에서 全國에 命을 내려 農業과 醫術, 占卜에 관한 書籍을 除外하고 儒家의 書籍을 몽땅 불사를 것을 명했다{焚書}. 사실 焚書는 儒家들의 反政府 活動을 더욱 激化시킨 꼴이되고 말았다. 그래서 진시황의 心氣가 편치 않았던차 마침 側近의 臣下 盧生과 厚生이 秦始皇의 暴政을 非難하고 逃亡친 事件이 發生했다. 激憤한 진시황은 儒生들에게 분풀이를 하여 당시 咸陽의 儒生 460여명을 生埋葬시키고는{坑儒} 이를 諫한 太子 扶蘇마저 北方으로 귀양 보내고 말았다.
焚書坑儒는 자신을 暴君으로 만드는데 決定的 役割을 했을 뿐 아니라 결국 亡國으로 몰고가는 契機가 되었다. 2년 뒤에 그가 죽고 다시 3년이 지나 秦나라도 亡했기 때문이다. 가혹(苛酷)한 政治는 나라까지 망하게 할 수 있음을 보여준 境遇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