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의 유림들의 지지하에 영조4년 이인좌의 난이 발생한다 영조의 경종독살을 유포하고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을 왕으로 하려는 난이다
이인좌의 난
조선조 영조(英祖)가 즉위(1724)하자 그 당시의 정권은 이광좌(李光佐)를 영의정(領議政), 유봉휘(柳鳳煇), 조태억(趙泰億)을 좌·우의정(左·右議政)으로 하여 소론(少論)이 이를 담당하였으나 전년의 무옥으로 세력을 잃고 있던 노론(老論)도 그들이 지지하던 세자가 왕위에 오르니 여기에 먼저 이의연(李義淵)이 신임사화(辛壬士禍)가 무옥임을 밝혀야 한다는 상소를 하고 충청도 유생 홍득일(洪得一)은 김일경(金一鏡), 목호룡(睦虎龍)을
국문하라는 주장을 펴니 조정은 논의가 비등하였다. 영조(英祖)는 당쟁의 병폐를 깊이 염려하던 중이라 노·소론(老·少論)에 구애됨이 없이 노론의 이의연(李義淵), 소론의 김일경(金一鏡) 등 파쟁의 색채가 가장 농후한 자를 국문하니 이의연(李義淵)은 수일내에 물고하였으며 또 일찍이 4흉(四凶)을 논한 김일경 소(蘇)와 역변을 고한 목호룡을 잡아 국문하니 목호룡은 옥중에서 변사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영조는 신임무옥을 규명하고 김일경과 그 일당인 이천해, 윤치상, 이사상을 죽이고 노론을 등용하여 정호, 민진원, 이관명을
각각 의정으로 삼으니 모두 영조 즉위 원년(1724)이었다. 영조는 소론을 배척하고 노론을 입조케 하였으나 그 목적은 공평을 위주로 하였다. 영조의 이와같은 탕평책(蕩平策)에도 불구하고 처형 김일경의 유족과 남인(南人)의 잔당은 실의의 불평객을 유합하여 반란을 꾀하게 되었으니, 재기의 기회를 엿보던 중 영조 3년에 노론의 상신(相臣)들이 물러나는 것을 보고 더욱 그 계획을 추진하여 무력으로써 서울을 점령한 뒤 종실 밀풍군(密豊君)을 추대하기로 하고 영조 4년(1728)에 청주(淸州)의 이인좌(李麟佐)는 대원수(大元帥)를 자칭하고
정희량(鄭希良)을 원수(元帥)로 남방에서 기병하고 평안병사 이사성(李思晟)은 북방에서, 김중기(金重奇), 남태징(南泰徵)은 중앙에서 호응하기로 하여 반란(叛亂)을 일으켰으니 이것이 곧 이인좌(李麟佐)의 난(亂)이다. 이 반란군은 남방 각지에서 행동을 개시하였으니 우선 호서(湖西)에서 이인좌의 군은 상여에 병기를 싣고 청주성에 잠입하여 충청병사 이봉상을 죽이고 영장 남연연을 잡아 항복을 받으려 하였으나 불굴하므로 이를 죽였다. 이인좌는 대원수라 자칭하고 권서봉을 목사(牧使), 신천영을 병사(兵使), 박종원을 영장으로
삼아 여러읍에 격을 전하여 병마를 소취하고 또 이어서 전천으로 진군하여 일부는 죽산, 일부는 안성으로 북상하였다. 호남에서는 백필현이 태인에게 기병하여 전주로 향하였고, 영남에서는 정희량이 거창에서 기병하여 일부는 지례로 일부는 무주로 향하였다. 이때 용인에 은거하고 있던 소론의 원로인 최국서는 변보를 서울로 올리니 왕은 병조판서(兵曹判書) 오명항(吳命恒)을 4로(四路) 도순무사로, 박찬신을 중군, 박문수, 조현명을 종사관, 이여적, 박동구를 후원으로 하여 서울의 병사를 이끌고 남하 토벌하게 하였다. 도순무사
오명항은 진위에 이르러 직산으로 간다고 말하고는 은밀히 안성으로 향하여 일전에 이를 격파하고 또 죽산을 공격하여 이인좌, 권서봉 등을 생포하여 서울로 압송했다. 한편 경상감사 황준과 선산부사 박필건, 곤양군수(昆陽郡守) 우하형은 영남의 반군토벌에 나섰다. 특히 곤양군수 우하영과 함께 하동군 북천면의 유생 김중원은 정만욱, 조영하, 서명창, 신경섭, 김성준 등과 함께 50인을 모아 의병으로 참전했다. 경상도 거창에서 기병한 정희량은 대대로 안의에 살아오는 명가의 출신으로 가세는 부유하였고 그 명망이
높았던 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의 충신 정온(鄭蘊)의 손자이다. 정희량은 소년시절에 과거시험장에서 당시의 임금인 경종(景宗)을 뵙게 되었고 경종은 수려한 이 소년을 뜰 앞에 불러내어 그의 성명을 물어 그가 바로 정온의 후손인 것을 알자 크게 격려를 준 후에 귀향하여 공부를 열심히 하여 후일에 대성할것과 나아가 국가의 기둥이 될 것을 기대한다고 하였다. 희량은 일개 유생으로 왕에게 알림을 당하게 되었고 이제는 일반인과 같이 굳이 과거를 통하지 아니하고서도 앞날이 약속된 셈이었다. 정희량은 가슴 가득히 감격을 안았다.
이 때 경종의 죽음이 애매하여 여러 가지 억측과 풍설이 유포되었다. 경종의 죽음이 노론의 흉수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 남인 및 소론의 일부 과격 분자들은 영조의 즉위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경종을 위하여 복수운동을 일으키려했다.
이상은 이우섭 교수의 주장인바 또 그 원인으로 중앙집권층의 지방에 대한 압력이 가중해지고 민중의 불만이 속으로 타서 들어감에 따라 그 중간위치에 있는 지방 토호(土豪)들의 불안이 점점 높아 간 것이다. 토호란 원래 명문명조(名門名祖)의 후손으로 부력과 세력을 가진 지방
토착 양반들을 말하는 것이나 조선조 후기에 접어들면서 정권이 중앙에 있는 소수 훈척에 의하여 결정되고 사회적·경제적으로 그들의 지배역량을 확대 강화시킴에 따라서 지방 양반들은 반비례로 점차 거세되고 몰락되어 간 것이기 때문이다. 사색당파(四色黨派)의 파별을 보면 중앙 훈척은 대개 노론이며 지방 양반이란 것은 남인이 대부분이었다. 남인중에도 남인의 근거지인 영남의 남인들은 벼슬의 길이 아주 좁아졌는데 따라서 경북지방의 양반들은 그대로 틈을 타서 간혹 출세를 할 수 있었음에 비하여 경남의 양반은 전연
그런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퇴계학파에 속하는 경북양반(안동중심)들은 중앙 귀족층에 의하여 종종 발탁의 기회를 얻게 되었으나 남명(南冥)의 연원인 48가(서부경남의 양반들)는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완전히 고갈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인좌는 명종 때의 영상을 지낸 이준경의 후손, 청주의 토착 양반이며, 남이계의 사람이다. 지방에서 은거한 몰락 양반들의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인 반란의 일면 성격을 가진 것이 이 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희량은 이인좌의 아우 이웅좌와 같이 주장이 되어 즉시 고현의
곡창을 풀어 모집한 병사들에게 배급한 다음 안의현(安義縣)을 습격하여 점령하고, 진군하여 거창을 점령했다. 창고의 곡식을 풀어 지방민들에게 분배하고 각 절의 승려를 동원하여 기계를 운반하고 각 역에 지시하여 말을 대기시켰다. 합천도 호응하는 자세였으며 한편 경상감사 황준의 장계에 의한 보고를 받은 조정은 전술한 바와 같이 출병하였으며, 정희량은 영남병사를 이끌고 북상하려 했으나 선산, 상주 등 웅진이 동조하지 않아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다시 함양으로 가서 호남지방으로 우회하려 하였으나 이것도 운봉 영장
손명대의 완강한 방어로 팔량령을 넘지 못하고 거창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러는 동안에 정부군의 대거 남하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하댜 도순무사 오명항이 추풍령을 넘었을 때 정희량과 이웅좌는 함양 사근역에서 경남 감사 황준과 선산부사 박필건, 곤양군수 우하형이 이끄는 군사에게 치명적인 대패를 당하고 있었다. 함양 사근역의 전투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50명의 병사로 참가한 하동 북천의 김중원은 정희량과 이웅좌를 생포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이것으로 이인좌의 난을 국가에서는 평정하였고 김중원에게는 일등공신을
제수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난 자체는 겨우 1개월 동안에 끝이 난 미미한 것이었으나 난의 동기가 정치적·사회적인 여러 복잡한 관련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중시하여 난 후 여러 가지 대책을 세웠다. 이 사건의 원인이 당색의 감정에 있다고 하여 남인의 고장인 영남을 노론화시켜서 대립된 감정과 세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려고 조영복을 경상감사로 임명, 명문거족들을 역방하면서 유혹과 위협으로 노론에 가담하도록 하여 무마시켰다.
끝으로 특기할 것은 이 난 이후에
영남일대에 50년 정거(停擧)를 시켰던 사실이다. 정거는 과거 응시자격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정신적 피해가 컸지만 심한 타격을 받은 것은 안의지방의 주민들이다. 난 후에 안의는 역적의 출생지라는 이유로 읍을 폐하여 거창, 함양 양읍에 분속시키게 되므로 안의 주민들은 인읍의 모멸을 받아 견디기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이인좌의 난은 역사적 성격으로 보아 사색당쟁에서 온 정권쟁탈의 난이었다.
조선후기 대구경북 차별의 근원이 된 이인좌의난
이인좌의 난은 영남지역을 조선후기 정치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거병지는 청주였지만 남인들의 고장 영남에서 모의자와 동조자가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즉 안동 등 일부 지역의 사대부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거사에 심적으로 동조했던 것이다. 이인좌는 선조 때 붕당을 예견했던 명재상 이준경의
후손이자 남인 윤휴의 손자사위여서 영남 유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난이 평정된 후 영조는 대구부의 남문 밖에 영남평정비를 세워 영남을 반역향으로 못박았다. 이로인해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한 영남지역은심한 지역차별을 격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지역감정과 지역차별의 아픈 역사를 격어왔던 경험이 있는 함경도 평안도 기호지방
경상도 지방의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이인좌의 난을 실패로 만든 두 노인(老人)
최로(崔老)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역리(驛吏). 조상 대대로 성환(成歡) 역리를 지냈으며 그 역시 칠순의 고령에 이르기까지 같은 직에 있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 3,000명의 난군이 성환에 쳐들어오자 역승(驛丞) 강백(姜柏)이 도망하고 온 고을 주민들도 난을 피해갔으나, 70여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역졸과 함께 끝까지 역관(驛館)을 지켰다. 이때 이인좌를 계획적으로 잘 대접, 술에 취하여 떨어지게 한 다음 밤중에 역졸을 시켜 뒷산에 올라가 외치게 하되, 수많은 군사가 적도(賊徒)를 토벌하기 위하여 진격해오는 것처럼 꾸미는 한편 갑자기 말을 풀어놓아 좌우 충돌하게 함으로써 일대를 교란시켰다. 이에 놀란 난군(亂軍)은 그 태반이 흩어져 달아났고, 이인좌 역시 황급히 회군하였으나 군세(軍勢)를 떨치지 못한 채 마침내 관군에게 잡혀 반란이 진압되었다. 그가 죽은 뒤 이름은 널리 전해지지 않았지만 성환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최충신(崔忠臣)이라 하였다.
최규서(崔奎瑞) 1650(효종 1)∼1735(영조 11).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문숙(文叔), 호는 간재(艮齋)·소릉(少陵)·파릉(巴陵). 광주(廣州)출신. 삼당시인으로 꼽히는 고죽 최경창(崔慶昌)의 현손으로, 현감 석유(碩儒)의 아들이다. 1669년(현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0년(숙종 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출사하였다. 이때 서인의 나문에서 뛰어난 재주로 시명(時名)을 얻어 언관이 되었다.
정언으로 있을 때 “서북인을 통청(通淸)하라.”는 왕의 하교에 맞서 “인문(人文)이 황폐하고 가합자(可合者)가 없다.”는 논지로 상소를 올려 논객(論客)의 면모를 보였다. 또한, 서인이 노소로 갈라졌을 때 나양좌(羅良佐)를 옹호하는 등 소론에 가담하였다. 1685년 지평에 올랐고, 이어 이조좌랑·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도 최석정(崔錫鼎)의 파직을 변호하는 등 소론의 소장으로 활약하였다. 1689년 대사간에 올랐는데, 이때 남인에 맞서 희빈장씨(嬉嬪張氏)의 책봉을 반대하는 데에 앞장을 섰다. 그뒤 1694년 외직으로 전라도관찰사로
나갔으며, 이어 강화유수를 역임하고,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하면서 부제학, 형조·예조 판서, 대제학 등 현직(顯職)을 누렸다. 1711년 소론의 최석정 등이 삭탈관작되고, 1716년 병신처분(丙申處分)으로 소론이 실세를 거듭하자 지중추부사 등의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 광주(廣州)로 내려가 여생을 마치려하였다. 이때 그는 많은 사직소를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1721년(경종 1) 소론이 득세하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이 되었고, 1723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이때 노론들이 연잉군(延礽君:뒤의 영조)의 대리청정 등을 추진할
때 이에 맞서는 등 소론정권의 주역을 맡았으나, 강경파 김일경(金一鏡) 등이 신임사화를 일으킬 때 완소(緩少)로 온건하게 대처하였고, 이어 치사(致仕)를 빌어 봉조하(奉朝賀)를 받고 일선에서 물러나 성묘를 핑계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1724년(영조 즉위년) 영조가 즉위하여 노론이 집권하였을 때에도 무사하였다. 1728년 무신난(戊申亂)이 일어날
때 용인에 있으면서 이 정보를 입수하고는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맨먼저 조정으로 달려와 이를 알린 다음, ‘역정포고의(逆情布告議)’라는 토난책(討難策)을 건의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원옥(寃獄)이 없을 것을 당부하여 완소계열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일사부정(一絲扶鼎)’이라는 영조의 어필이 내려졌고, 이어 공신에 녹훈하려고 하자 이를 끝까지 거절하였다. 당인(黨人)의 중심인물이었으나 온건하게 대처하였고, 지방관으로 나갔을 때에는 많은 선정을 베풀었다. 특히, 전라감사로 있을 때 선정으로 이름나 사람들이 부서한(簿書閑:관청
문서가 한가함.), 공방한(工房閑: 아전들이 한가함.), 기악한(妓樂閑:기생·풍악이 한가함.)의 삼한(三閑)이라 하였다 한다.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시문집으로 《간재집》 15권이 있다.
경상도는 영조의 전왕인 경종을 영조가 독살했다는 유언비어를 빌미로 경상도 남인이 경상도를 중심으로 일으킨 1728년의 무신난 (戊申亂), 즉 이인좌의 난 이후 무려 135년이 지나 대원군이 집권하여 탕평책을 쓸 때까지 "반역향"의 라벨을 붙이고 살아야 했습니다.
영조의 경상도에 대한 철저한 배척은 그가 닌 평정 후 대구에 세운 "경상도를 평정했다"는 의미의 평영남비(平嶺南碑)가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또 영조 이래로 경상도 출신 당상관이 단 한명도 없었던 것은 그 차별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말해 줍니다.
벼슬길에서 소외된 경상도 선비들은 135년간 서원에 모여 공리공담 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헐린 서원은 경상도가 전국 최다였던 점이 말해줍니다.)
참고로, 순조,철종대에 소위 세도정치를 편 안동김씨는 언뜻 보기엔 경상도 기반인듯 하나 사실은 전혀 경상도 지역하고는 연고의식 자체가 없었습니다. "안동" 김씨가 그 시조라 하여 명목상 안동김씨라고 불리웠지 실은 한성에 토착한지 수백년된 서울 문벌로서 서울 장동에 집거한다 하여 "장동 김씨"라고 자타가 일컬었습니다. 그래서 소위 안동김씨 세도 기간 중에도 그들은 지역단위로서의 경상도 차별 시정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무려 135년간 경상도가 반역향으로 찍히고 경상도 선비의 벼슬이 철저히 엄금 됐던 계기가 된 이인좌의 난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조선 후기 경상도 차별의 시발점 이인좌의 난>
이인좌의 난 시발점은 1717년 조선의 19대왕 숙종의 소위 "정유독대"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숙종이 장희빈의 아들 세자 균 (후일의 경종)이 병약한점을 우려하여 경종 사후 자신의 또다른 아들 연잉군 (후일의 영조)가 대를 잇는걸 확실히 해달라고 노론 영수 이익명에게 부탁한것이 바로 정유독대입니다.
숙종 사후 노론은 숙종의 유지대로 연잉군을 세자로 세우며, 연잉군은 급기야 일찍 죽은 경종 뒤를 위어 왕위에 오르니 바로 영조입니다.
영조의 즉위로 정치적 기반이 위태롭게 된 소론, 그중에도 과격세력은 숙종대의 "갑술환국" (인현왕후 복위문제로 서인이 남인 축출하고 집권한 사건)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과 공모하여 영조와 그 주변 노론을 제거할 음모를 꾸밉니다.
경종을 영조가 독살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그것을 빌미로 영조를 폐위하고 소현세장의 증손 밀풍군 탄을 세울 모반을 도모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모반계획은 1727년 정미환국으로 영조가 뜻밖에 소론 정권을 들여 세우자 명분이 없어 지고, 동조자도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급기야는 조정에 고변됨에 이릅니다. 기밀이 누설되었음을 안 반역 세력은 더 이상 지체 할 수 없어 이인좌가 선봉이 되어 반란의 깃발을 듭니다.
<이인좌 난의 평정과 "반역향"으로서의 경상도 차별 시작>
1728년 3원 15일. 스스로 대원수를 칭한 이인좌는 청주성에 진입해 충청 병사등을 살해하고 청주성을 점령을 점령하였습니다.
이 소식이 전해 지자 경상도의 전역이 일제히 호응하였는데, 정희량이 이인좌의 동생 이응보, 인척 조성좌와 함께 경상도 합천과 함양을 점령합니다.
그러나 그 기세를 타서 북상하던 경상도 반란군은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게 대패하고, 청주성도 도로 빼앗긴 후 이인좌를 비롯한 반란 주도 세력이 생포되자 반란은 실패하고 맙니다.
이 사건에 분개한 영조는 대구 감영 입구에 평영남비를 세우고 이 사건을 경상도 지역의 반란으로 규정 짓습니다.
나아가 경상도를 반역향으로 지목해 일체의 과거 응시를 금지시키고, 앞으로도 절대 등용 말라고 유시하는 초강경 조치를 취합니다.
영조 10년 이조판서 송인명이 "영남사람은 비록 추천되더라도 낙점을 받지 못하는 자가 많습니다"라고 하며 영남 차별에 문제 제기를 할 정도였습니다.
또 영조 13년에는 좌의정 김재로가 "조정에서 영남인에 대한 대우를 다른 道와 다르게 함은 마땅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할 정도이니, 그 차별이 얼마나 극심했는 지를 말해 준다 해겠습니다.
영조가 이인좌의 난을 경상도 반란으로 규정지을 정도로 온 경상도가 벌떼 같이 반란하여 일어 난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경상도가 남인 지역이며 이인좌 본인이 소론 이면서 경상도 남인 윤휴의 손자사위이기도 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영조는 경상도의 반란 호응을 경종 신원을 빌미로 정권을 한번 잡아 볼까하는 기회주의적 작태로 꿰 똟어 본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일 이후로 남인의 등용은 제한 되었고, 비록 이 난에 직접 연관이 없었다 해도 경상도 출신은 일종의 "연좌제"에 묶여 출사나 진급을 금지당했습니다. 영조 13년 병조판서 민응수가
"영남의 풍속이 벌써 변하여 옛날의 경우 모두 남인이었는 데, 지금은 그중에 더러 갈리어 나간 자도 있습니다"고 한것은 경상도가 얼마나 남인 일색이었는지, 또 영조가 얼마나 경상도와 남인을 한 묶음으로 반역집단시 했는지를 반증 해 준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영남 차별은 영조,정조 대는 물론 순조, 철종을 이어 고종 즉위와 함께 대원군이 집권하여 탕평책을 쓸때까지 무려 135년간 거의 조선이 망할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경상도가 반역향으로 찍힌 기간은 전라도가 찍혔던 기간 3년여의 무려 45배였던 점을 감안하면, 경상도는 조선시대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반역향이었음을 결론 내릴 수 있다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