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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민물장어
장마가 거세지면 민물고기들이 급류에 쏠려가지 않기 위해 저마다 피할 자리 찾아 오글오글 모이는 습성이 있다. 붕어나 송사리는 주로 말뚝 박힌 자리에 걸린 물풀 더미 뒤로 몸을 재빨리 숨겨 물살을 피하고 뭍게들은 뚝방 구멍에 발톱을 감추고 집게발로 나뭇가지를 꽁꽁 문 채 바깥에 나오지 않는다. 어미 민물장어는 물살이 쏟아지자마자 석축 구멍 틈새로 들어가 몸을 움츠리고 새끼 민물장어들은 예닐곱 마리씩 모였다가 옆으로 뚫린 물길 지류를 찾아 재빨리 헤엄쳐서 웅덩이로 오글오글 피한다. 정환이는 지금 그렇게 물살이 없는 웅덩이로 피한 무리들을 한꺼번에 잡아오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새끼 민물장어 잡기가 그렇게 만만한 건 아니다. 몸의 두께가 뜨개질실처럼 가느다란데다 비늘이 워낙 미끄러워 손바닥에 감아쥐어도 순식간에 쏘옥 빠져나가 버린다. 그래서 가운데손가락에 돌려 검지와 약지 사이에 끼운 다음 똬리 틀 듯 두 차례 이상 꾸불텅꾸불텅 비틀어야 바구니에 간신히 넣을 수 있다. 더러는 손가락 사이에 모래나 진흙을 묻혀 미꾸라지를 포박하지만 그럴 경우 민물장어 피부가 찢어지는 문제가 생긴다. 게다가 몸이 워낙 얇아서 그물망 틈새로도 빠져나가므로 찢어진 모기장을 그물처럼 꿰매서 사용해야 한다. 그나마 물가에서는 새끼 민물장어가 눈에 쉽게 띄지 않으므로 한꺼번에 잡으려면 장마철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강철이네 바깥마당 토방에서 사내아이들끼리 햇살을 쬐며 ‘무엇이 가장 맛있을까?’를 화제로 꺼내던 아주 특이한 날이다. 그리고 알았다. 맛있는 음식 이야기에 빠지면 직접 먹지 않더라도 입맛이 뱅뱅 돋고 헛배가 차오른다는 것을. 그래서 아이들은 새로운 음식 이름을 말할 때마다 모양과 맛을 허공에 떠올리며 혓바닥을 짭짭 돌리곤 했다.
먼저 가지나물과 짠지가 슬쩍 지나가다가 그보다 더 귀하고 맛있는 찐계란과 굴전에 덮여졌다. 찐계란은 소풍 때나 겨우 하나 정도 가져가 쬐끔씩 떼어먹었고 굴전은 혼인이나 초상집 과방 앞에서 한참을 기웃거려야 간신히 얻어먹을 수 있었다. 정환이가 파월 장병인 정구 형님이 제대할 때 싸들고 올 수도 있다며 베트남 바나나를 미리 꺼내었고 백일장 교내 대표로 나갔던 강철이가 인솔교사 노승방 선생님이 사준 중국집 짜장면을 들이밀었으니 더 이상 나올 게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장마철에 고복 저수지에서 그물질을 하고 온 관모가.
“민물 장어.”
돌연 물고기 잡는 이야기를 꺼내면서 화제가 딴 쪽으로 새어나갔다. 한술 더 떠.
“장금내 옆 또랑 웅뎅이 가먼 새끼 민물장얼 잡을 수 있는디……히야. 그게 죄다 돈이 되능 겨. 산 채루 황신상회에 갔다 주먼 빳빳헌 10원짜리 현찰루 바꿔준다. 겡장허지.”
봉구가 그 말을 받아.
“그렇댜. 민물장언 생물루 넘기야 되야. 죽으먼 쇠용읎어.”
황신상회에서 받은 놈들을 풍천 양어장에서 임시로 키웠다가 일본에 수출한다고 얘기만 들었다. 순간 정환이 머리에 퍼뜩.
‘먼저 잡는 게 임자다.’
그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일단 돈이 쥐어지기만 하면 손바닥에 피가 철철 나더라도 손가락을 펴지 않을 작정이다. 소아마비 화가 지망생 기환이에게 12색 크레용을 사주고 남는 돈은 내후년 중학교 입학금 저금통장에 차곡차곡 모을 참이다. 아무튼 지금은 물고기를 잡는 게 첫째 문제이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민물장어를 들고 오는 것이 둘째 문제이다.
일단 정환이 혼자 비밀로 간직했다가 귀신도 모르게 훑어올 것이다. 진둠벙 여울에서 한참을 거슬러 언덕 두 개를 넘어서도 또 그만큼 걸어야 하니 결코 만만한 거리가 아니다. 다랑이논 개울 지나 장금내 옆으로 흐르는 또랑 타고 기어오르는 그 지천(支川)이다. 오그르르 올라온 새끼 민물장어들이 또 도랑을 거슬러 올라와 섶으로 덮인 웅덩이에서 장마 물살을 피할 것이다. 그 비밀의 장소로 오랫동안 가슴에 꽁꽁 싸맨 채 딱 찍어놓았다. 가뭄 때 웅덩이에서 퍼 올리는 두레박질 물살을 받아 바닥이 조금 패이긴 했지만 미루나무 섶에 가려 쉽게 표시 나지 않는 그 지점을 외워두었다. 장마철 급류를 피한 물고기들이 지천 따라 우글우글 모였다가 물살이 약해지면 재빨리 냇물을 타고 다시 원래 그 자리로 내려가므로 그 웅덩이 자리에 모여있는 타이밍을 맞춰야 한다. 누군가 먼저 훑어버리면 또 찬스를 빼앗기니 거리가 멀더라도 기회가 왔을 때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무조건 잡아야 하는 길이다. 이번만큼은 장마철 폭우가 그치자마자 곧바로 양동이 꽉 차게 건져올 참이라고 정환이 혼자 마음 다지는 중이다. 친구들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해야 되는 일도 있는 것이다. 거리가 먼 게 마음에 걸리지만 돈을 벌기 위해선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
‘칭구들 미안.’
그런 생각은 가슴 깊이 감췄다가 금세 지워야 한다. 그보다는 물고기를 양동이에 넣고 민물에 채워오는 게 더 중요하다. 민물고기는 민물에서 살고 바닷물고기는 갯물에서 산다. 예전에 냇가에서 잡은 물고기를 빗물이나 펌프물에 넣었다가 실패했던 경험이 여러 차례 떠오른다. 펌프물에 넣으면 처음엔 지느러미 흔들며 헤엄을 치기에 ‘아싸, 사는구나.’ 착각했다가 이틀만 지나면 아랫배 하얗게 드러내며 수십 마리씩 물 위로 둥둥 뜨는 걸 본 적이 있다. 죽은 물고기들은 닭장에 던지기도 미안하므로 힘들더라도 양동이에 민물을 채워 살려야 한다. 그렇게 몇 시간만 빡세게 고생하면 50원 이상도 벌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진짜 큰돈이다.’
정환이 혼자 그 생각으로 두근두근 설레는 중이다. 지난주 폭우가 지난 새벽에도 동이 트자마자 40분 이상 걸어 웅덩이로 방문했으나 아차, 한발 늦었다. 관모가 이미 한차례 훑어간 뒤였다. 동작이 빠른 관모는 미꾸라지와 새끼 민물장어를 양동이 넘치게 잡아서 돈을 40원이나 모았다고 여기저기서 신나게 자랑했다. 이번에는 절대로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미꾸라지는 추어탕 분량이 되지 못하면 마땅히 쓸모가 없으므로 서너 마리는 그냥 닭장에 던져준다. 주로 새끼 민물장어만 따로 골라 성성하게 살려서 신작로 황신상회에 팔아야 목돈을 만질 수 있다. 황신상회 대머리 아저씨가 파놓은 뒤란의 양어장에서 사료를 주면서 키웠다가 소도시 식당에 배달하거나 풍천 양어장에서 임시로 키우다가 일본 수출용으로 판매한다고 수십 번은 들었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거기에 새끼 민물장어를 건네주고 돈만 벌면 된다. 지금 정환이로선 동무들 몰래 야밤을 노리는 게 최선이다.
‘미안헤두 워쩔 수 읎네. 칭구들. 이.’
그러나 싸그리 잡아도 어차피 다음 장마에 물고기는 또 채워지게 되어있으니 아주 미안한 건 아니다. 다만 농약이나 사이나 같은 독성분을 냇물 구석구석까지 쑤셔 풀어넣는 사람이 있으니 그게 불안하다. 지난 가뭄 때에 고두리 점박이 아저씨가 냇물 위와 아래를 흙으로 막아 차단한 채 사이나를 풀고 있었다. 붕어는 물론 새끼 송사리까지 배를 하얗게 뒤집고 죽어있으니 이런 식으로 두어 번만 긁어내면 아예 한머리 민물고기의 씨가 마를 판이니 그것 또한 걱정이다.
정환이네는 물 건너 해안선 가장자리 언덕에 자리 잡은 옴팡집이었다. 같은 한머리이긴 하지만 개울과 당재 언덕 건너편의 강철이네 집에서 꼬박 20분 넘게 걸렸으니 왕복 걸음으로 40분이 넘는다. 그 정도 먼 거리인데도 일주일에 두세 번씩 놀러 다녔으니 그게 절친의 우정이다. 그렇게 친한 동무에게도 비밀로 한 채 저무는 밤에 민물장어잡이에 나서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돈을 만질 기회가 없다.
정구 형님과 정환이는 열두 살 띠동갑 차이의 형제라서 차마‘형’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꼬박꼬박 ‘형님’이라고 불렀다. ‘귀신 잡는 해병’인 파월 장병 정구 형님과 정환이는 가운데 ‘정’자가 같고, 둘째 정환이와 그 아래 기환이는 원래 족보인 ‘환’자 돌림자이니 족보대로 이름 지은 것이다. 그 아래 딸들은 기환이의 가운데 글자인‘기’자(字)를 써서 기순이, 기옥이라고 이름 지었지만 돌림자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남녀 모든 남매가 빵틀에서 찍어낸 듯 비슷비슷한 생김새지만 셋째 아들 기환이가 다리를 절룩거리는 게 다르다. 그날은 고복 저수지 아래를 뒤져서 잡아올 참이다. 몰래 잡으러 간다는 소문이 나지 않았으니 잘만하면 한 양동이를 채울 수 있고 50원을 벌면 운동화 한 켤레를 사고도 10원이 남는다. 일단 동생들 몰래 혼자 다녀오는 게 가장 홀가분하다.
아무튼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아무도 없을 때 몰래 다녀오려고 작심하며 살금살금 소도구를 챙기는 중인데.
“오디 가?”
오줌을 누러 나온 기환이가 바지를 추슬러 올리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는다.
“앗!”
깜짝 놀라 양동이를 놓치는 바람에 안마당으로 쨍그랑쨍그랑 소리가 울린다. 안방에서 잠깐 ‘끄응’ 소리가 나긴 했으나 더 이상 부모님의 움직임이 없어서 다행이다.
“웨 깜짝 놀랜댜? 그냥 물어본 건디.”
기환이가 바지 고무줄을 올리며 여전히 쓰뭉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서 있다. 어렸을 때는 뒷간 출입도 손바닥에 고무신 끼우고 엉금엉금 기어 다녔으나 지금은 지팡이 없이도 손바닥으로 벽을 짚으며 변소까지 오갈 수 있다. 그 기환이가 재작년부터 그림 실력이 엄청 늘었으므로 정환이는 가끔 동생에게 크레용을 선물하는 꿈에 빠지기도 한다.
“쉿!”
기환이도 얼떨결에 검지손가락을 코에 붙이며.
“쉬이…….”
눈을 찡끗하더니 숨을 죽이며 맞장구를 친다.
“새히 민……훌장허. 이.”
“그걸 잡으러 간다구? 민물짱아.”
목소리가 크게 나오는 바람에 안방에까지 들릴 참이다.
“조용힛. 그걸 잡으야 돈이 되능 거여.”
정환이가 눈을 찡끗거리면서 주의를 시켰으나, 아차, 문이 열리면서 연년생 여동생 기순이(7세)와 기옥이(6세)까지 꼼지락거리며 나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초저녁 잠이 많은 부모님은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부모 모두 원래 초저녁에 잠에 빠졌다가 여명의 신새벽 즈음 아주 빨리 일어나 아궁이 불도 때고 퇴비도 나르는 새벽형 체질이다.
기순이와 기옥이는 키의 차이는 있지만 생김새가 비슷해서 때로는 쌍둥이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언니 기순이는 몸이 토실토실한데 동생 기옥이는 팔뚝이 가느다랗다. 그랬다. 기순이는 뱀에 물렸다가 나은 뒤로 몸이 더 튼튼해진 것 같다.
고추 따러 갔다가 방울뱀한테 물렸는데 처음에는 아프지 않다며 상처 부위를 무심히 펌프 물로 닦아내기만 했었다. 그런데 이틀 후 종아리가 호박처럼 시커멓게 부풀어서 ‘다리를 잘라야 한다.’소리에 온 식구가 울고불고 난리가 터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사흘째부터 가라앉기 시작했으니 엄청 다행이면서도 기적처럼 신기한 일이다.
“나도 따라갈래.”
“옵바, 나도.”
기순이는 그럭저럭 견딜 수 있지만 기옥이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은데 아까부터 총총 소매 끝을 잡아당기니 난감한 일이다. 여동생 둘 중 하나는 데리고 가고 하나만 따로 남기는 건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이.
“꼭 가볼 텡감?”
“나두 가고 싶은디 아무래두 빠지능 게 좋겄지? 이. 괜찮은감? 성.”
정환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결심이라도 한 듯 기환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구루마 끌구 가먼 되거덩. 츰에는 너 혼자 지팡이 짚고 따라오다가 아주 지치면 또 구루마에 태워 끌구 오구 그러면 될 껴.”
그러다가 일부러 여유 있는 표정으로.
“까이꺼.……어두워두 대충 아는 길이닝께.”
그렇게 동생들을 안심시켰으니 드디어 출동 준비 시간이다. 빤쓰바람으로 나왔던 기옥이가 치마를 걸치고 나타났으니 아래 피붙이 4남매의 밤나들이 출정이 구성된 셈이다.
“지금이 딱이다. 다른 애들이 눈치채먼 클 낭께 몰래 샛길루 가자.”
불안하지만 조금은 기쁘다. 혹시 떼어놓고 갈까 봐 긴장되었던 동생들의 표정에 안도감이 서렸고 특히 기순이와 기옥이의 흐뭇한 표정들이 어둠을 밝히듯 환하게 비춰서 가슴이 싸-하다. 고복저수지는 신작로 진입 직전에 샛길로 빠지는 부성사 계곡 쪽인데 거기부터 오르막길이 된다. 기환이도 언덕바지에서 낑낑대긴 했지만 물고기를 잡는다는 설렘으로 지팡이를 꾹꾹 짚으며 화사한 표정을 짓는다. 그때까지는 4남매 모두 밤마실처럼 신바람 나는 출정 기분만 내게 되는 줄만 알았다. 게다가 도착한 고복저수지 물길 옆 웅덩이에서.
“아!”
숱한 물고기 지느러미들이 꿈틀거리는 횡재 사태를 만났으니.
“노다지닷!”
“심 봤다.”
정환이와 기환이가 연달아 탄성을 지르며 귀에 걸리도록 쫘악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랬다. 웅덩이에 덮인 솔가지를 치우자마자 민물고기들이 떼잡이로 지느러미를 꿈틀꿈틀 출렁이니 ‘물 반 고기 반’이 아니라 아예 ‘민물고기 바구니’이가 되어버렸다. 송사리와 미꾸라지도 있지만 대개 반짝반짝 빛이 나는 새끼 민물장어 떼 지느러미이니 ‘노다지’이고 ‘심’이 확실하다.
“생전 츰이여. 이런 사탠.”
기순이도 너무 좋은 나머지 치마를 펄럭이며 팔짝팔짝 뛰어다가 미끄러질 뻔했다.
“잡구 있으랑께.”
정환이 혼자 바지를 걷더니 웅덩이에 들어가 뜰채를 들어올린다. 딱 한 차례만 훑었는데도 열 마리 이상의 물고기들이 지느러미를 팔딱팔딱 튕기며 하얀 속살을 드러낸다.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놈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손가락으로 너무 오래 비틀면 숨이 막히거나 허리가 잘리며 죽을 수도 있으므로 양동이에 빨리 넣는 게 중요하다. 고샅에 주저앉은 기환이가 즈이 형이 올려준 체를 받아 팔이 긴 기순이에게 넘긴다. 여섯 살 기옥이는 이를 옹물고 세숫대야가 흔들리지 않게 꽉 잡기만 하면 되니 비교적 편안한 일이다. 그런데도 아까부터 바닥에 떨어진 놈 하나를 잡아넣으려고 씨름하지만 자꾸 놓치는 게 불안하다. 뛰쳐나간 새끼 민물장어를 잡아 대야에 넣으면 모래알들이 물밑 바닥으로 사르르 가라앉는다. 미꾸라지는 죽더라도 그냥 닭장에 던지면 되지만 새끼 민물장어는 황신상회에서 돈과 바꾸기 위해 반드시 살려야 한다. 배도 고프기 시작했지만 민물 고기를 꽉 채웠다는 포만감으로 행복이 넘치는 중이었다. 여기까지가 행복한 고기잡이였던 것 같다. 여기까지가.
그런데 어둠이 덮이면서 갑자기 마음이 심란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달님이 먹장구름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사위가 썩은새처럼 까맣게 덮이면서 불안감이 엄습했다. 지금은 그렇게 집에 되돌아가는 게 가장 큰 문제가 되었다. 올 때는 그냥 어둑어둑해도 길을 더듬을만했는데 가는 길은 칠흑 같은 절벽이니 암울하다는 생각이다. 당재와 마룡고개 두 개를 넘어 집에까지 가려면 빠른 걸음으로 40분 이상은 걸리는데 동생들 때문에 지금 걸음으로는 족히 한 시간은 넘게 걸릴 거라는 계산이 나온다. 다리 아픈 기환이와 어린 여동생까지 데리고 오솔길 언덕을 헤쳐야 한다는 게 생각만 해도 까마득하다. 게다가 올 때처럼 빈 대야와 빈 양동이가 아니라 새끼장어를 담아 물까지 채웠으니 그릇의 무게가 비교가 안 되게 무거워졌다. 정환이가 고심 끝에.
“바께쓰 물 절반은 쏟으야 쓰겄다.”
“웽?”
“다 쏟는 게 아니라 엥간히만 쏟능 거여. 장어 새끼가 죽지 않을 만큼만 물을 담으먼 절반은 가벼워지닝께. 집 앞꺼정만 버틴 다음 진둔벙 징검다리 민물을 부어서 죄다 살릴 거여.”
그렇게 물을 반쯤 쏟아내면서 조금은 가벼워졌지만 여전히 뭐 하나 만만한 게 없다. 기환이를 태울 구루마는 괜히 끌고 온 게 확실하므로 앞으로는 그런 쓸데없는 준비를 하지 않을 참이다. 이리저리 생각을 해봐도 정환이 혼자 양쪽에 대야를 들 방법이 마땅치 않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배고파.”
기순이와 기옥이 연년생 자매가 동시에 울상을 짓기 시작하니 어린 여동생들도 문제이다. 이런 때에 ‘그럼 왜 따라왔어’ 하고 냅다 야단이라도 치면 동시에 울음보가 터질지 모르므로 살살 달래면서 조심조심 가야 한다. 기옥이는 벌써 두 번이나 넘어져 무르팍에 생채기까지 생겼으므로 툭 건드리기만 해도 금세 울음이 꺼이꺼이 터질 판이다.
“집이만 가먼 부뚜막에 찐고구마가 있으야. 한 개씩 먹으먼 배가 불룩헤질 겨.”
특히 대야는 두 손으로 받쳐야 하므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민물이 위로 찔끔찔끔 넘쳐흐르니 그것도 문제이다. 게다가 양동이와 함께 들을 수 없으니 두 개 다 정환이의 몫이다. 혼자 대야 하나를 스무 발자국쯤 옮겨놓고 아까 그 자리로 되돌아와서 또 민물장어 양동이를 들고 오는 식으로 그렇게 띄엄띄엄 이동 중이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며 여러 차례 번갈아 옮기다 보니 무게도 무게거니와 머리까지 빙빙 어지러운 것이다. 또 있다. 집에 돌아가는 길이 어두워서 기약도 끝도 없는 것이다. 기환이가 타지도 않을 구루마는 괜히 끌고 온 게 맞으므로 어쩔 수 없이 동생에게 맡겨야 한다. 일단 기환이는 자기 한 몸만 건사하면 다행이고 기옥이도 그저 몸 하나만 무사히 가기만 바라며 기순이는 빈 구루마만 끌게 가도록 일을 맡겼다. 그러다가 절벽처럼 앞을 콱 막는 어둠을 보며 문득.
‘너무 멀다. 하나를 놓고 나중에 가져가야 하나?’
결정이 쉽지는 않지만 무사히 집에 도착하는 게 가장 중요해졌으니 아무래도 양동이 하나는 포기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수풀 속에 놓고 솔가지로 덮은 다음 내일 다시 가지러 올까도 생각하다가 설레설레 흔든다. 내일 다시 혼자 오는 것도 아득한 일이지만 길을 가던 산짐승이 툭 건드려 넘어질 수도 있고 어떤 나그네가 슬쩍 가져가면 민물장어와 대야를 동시에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담긴 물의 산소가 모자라면 민물장어가 숨이 막혀 죽을 확률이 높다. 아니, 죽는 게 확실하다. 한 마리만 죽어도 나머지 모두 전염병처럼 삽시간에 죽는 걸 여러 번 보았다. 죽은 새끼 민물장어는 절대로 매입하지 않으므로 모든 게 헛수고가 된다.
“하나는 버려야겄다.”
“싫으.”
정환이의 말에 두 여동생들의 얼굴이 동시에 하얗게 질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음먹은 대로 과감하게.
“뭐를 버릴까? 대야가 낫겄지? 양동이가 흠씬 많이 들었응께.”
순간 기순이가 절망의 표정을 지우며 재빨리.
“내가 들을 거여. 옵바.”
달라붙어 대야를 들었으나 몇 발자국도 못가 돌에 걸려 비틀거리더니.
“조심햇!”
소리치는 찰나 그대로 넘어지면서 통째로 홀라당 엎어진 것이다.
푸다다다다.
바닥에 떨어진 민물장어들이 꼼지락거릴수록 흙속에서 범벅이 된다. 꿈틀댈 때마다 지느러미에 흙덩이가 우툴두툴 달라붙으면서 움직임이 잦아지다가 결국은 모두 죽게 될 것이다. 정환이가 재빨리 달려가 흙투성이 민물고기 두어 마리를 시냇가 쪽으로 던져준다.
푸푸푸푸.
물속에 빠진 미꾸라지들이 금세 지느러미를 치면서 성성하게 헤엄치는 소리가 쟁쟁 들린다. 역시 새는 하늘을 날아야 아름답고 물고기는 물에서 헤엄칠 때가 가장 아름답다. 그런데.
“아. 오똑헌댜?”
기순이의 울상을 풀어주기 위해 정환이가 일부러 표정을 강하게 굳히며.
“괜찮당께. 양동이 것 하나만 팔어두 30원은 받을 수 있어. 30원이 워디여. 종이돈 석 장이 하늘이서 뚝 떨어지남?”
지금은 동생들을 다독다독 달래서 집에까지 무사히 데리고 가는 게 가장 중요하다. 어두워질수록 더 잘 달래야 한다.
하필 마룡고개에서 웬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불쑥 나타난 게 가장 골치 아픈 사단이 되었다. 언덕 아래에서 흐릿하던 물체 하나가 가까워지더니 진한 그림자로 불쑥 나타난 것이다. 서늘하다. 그림자가 저벅저벅 다가오면서 점차 불안감이 커진다.
“귀신인가?”
웬 중년의 남자 한 사람이다. 더구나 플래시를 비추며 다가오던 그가 손에 쥔 불빛으로 다짜고짜 4남매의 얼굴을 하나씩 비추는 것이다. 불빛에 비칠 때마다 남매들 모두 얼굴을 찌푸리는데 이번에는 사내가 플래쉬를 거꾸로 올려 자기의 얼굴을 비춰준다. 불콰하게 달아오른 입술로 불빛이 반짝이는 순간 몸에 밴 술 냄새가 폭포처럼 솟구치는 것 같다. 앗, 고두리 포도밭에서 일하는 점박이 아저씨이다. 왼쪽 볼 아래로 손톱만 한 점이 있고 그 점 한가운데에 굵은 털이 박혀있는데 지금은 어두워서 얼굴 형체조차 흐릿하다. 아, 그래도 알겠다. 냇물 양쪽을 막고 사이나를 풀어 민물고기를 몰살시킬 뻔하던 탱자나무 집 그 아저씨이다. 동시에 자기 아내와 아들을 두들겨 패던 풍경이 퍼뜩 떠오르니 좋은 기억이 전혀 아니다.
작년 여름인가, 이유는 모른다. 바깥마당에서 도리깨질 중이던 여자는 체격이 컸고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모습이었다. 그런데 키가 작달막한 점박이 사내가 퇴비장 쪽에 나타나더니 즈이 아내에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늙은 오이 하나를 집어 던지는 것이다. 여자의 뒤통수를 맞춘 늙은 오이가 두 동강이 났는데도 그대로 모른 척하며 연신 도리깨질에 열중일 뿐이다. 서리태콩이 바깥마당에 쏟아지자 엎드려 줍는 와중에 점박이 아저씨가 또 늙은 오이 하나를 더 던졌던 것 같다. 바다로 가다가 그 광경에 맞닥뜨린 정환이가 깜짝 놀라.
‘저 사람들도 사랑해서 결혼한 걸까?’
설레설레 흔들었던 것 같다.
또 있다. 그의 아들인 다섯 살 공이와 여섯 살 성이가 치고받고 싸울 때이다. 구슬 치기를 하다가 ‘먹었다. 아니다.’로 싸움이 붙었는데 연년생 형제의 힘이 막상막하 비슷했으므로 붙었다 하면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싸우는 걸로 소문이 난 상태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점박이 아저씨는 형제간의 싸움 이유를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무조건 동생 공이만 두들겨 패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자는 무조건 남자를 받들어야 하고 동생은 이유 여하간에 형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내이다. 그게 해결이 안 되면 일단 두들겨 패고 나중에도 이치를 따지지 않는 사내였다. 싫다.
정환이 혼자서만 점박이 아저씨에게 꾸벅 인사를 했는데.
“얘야.”
부르면서도 정작 아이들을 쳐다보지 않으니 요상한 자세이다. 정환이네 나머지 동생들 모두 모두 몸이 지쳐 대답할 힘이 없어서 아예 못 들은 체했다. 그런데 바싹 다가와 하필 기환이를 한참 쳐다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헛기침을 하며.
“넌 다리도 아픈 애가 너무 욕본다.”
기환이는 불쌍하다며 혀를 끌끌 차는 그 소리를 가장 듣기 싫어한다. 누구든 그런 소리를 하면.
“됐어유.”
평소에도 그렇게 고개 돌려 외면하는데, 하필.
“너 같은 애가 야밤중에 이런 딜 오먼 특히 위험허지. 애덜 머리에 생각이 그리 텅 비었으니 워쩐댜? 고생을 꽁으루 사서 허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조금 높은 목소리로.
“됐다구유.”
그가 다시 플래시로 기환이 얼굴을 비추며.
“다리 아픈 니가 너무 불쌍헤서 그러능 겨.”
기환이는 여전히 이맛살을 찌푸리며 점박이가 던진 동정의 말투를 간신히 참아내는 중이다. 점박이 아저씨가 다시 허리를 웅크려 민물장어 대야에 플래시를 비추더니.
“아이고 불쌍혀. 미꾸라지 새끼가 뭐라고.”
“새끼 민물……장언디유. 황신상회에 팔 뀨.”
기순이가 뙤똑 쳐다보며 대꾸하자.
“어럽쇼, 절룩거리는 애네 여동상이 말 하나는 야무지게 허네. 넌 야중에 한 자리 헤먹겄다. 그땐 저 불쌍헌 느이 오빠 점 잘 살펴라. 이.”
하며, 기환이 어깨를 붙잡더니.
“아이고 불쌍혀.”
얼굴을 들이밀수록 술 냄새가 풍풍 넘쳐 나왔다. 달님이 먹구름에서 빠져나오면서 사위가 잠시 환해졌다. 동시에 얼굴 안쪽으로 쏙 오므려졌던 점박이의 시커먼 점이 한마디 꺼낼 때마다 바깥으로 활짝 펼쳐지는 표정이 눈에 잡힌다. 정환이가 하마터면 웃을 뻔했는데, 기환이는 견디다 못해 마침내 아주 큰 소리로.
“가시윳! 아저씨.”
“오티게 가니? 불쌍헌디……나두 인정머리가 있는 사람이란다.”
“가시라구횻!”
“얘 좀 봐. 성깔도 엉간하네. 으른덜헌티 뭇 배웠남?”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네가 불쌍해서 그런다닝께. 도대체 왜 화를 내넌 이해헐 수 읎네. 니가 원체 불쌍헤서 내 가슴이 짠허게 아프다닝께. 진짜여. 고마워헤야징.”
기환이는 손바닥으로 쥐똥나무 밑동을 북북 긁으며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만 좀 괴롭히라구횻! 지발.”
사내가 ‘우이씨’ 하며 기환이 머리에 꿀밤 때리는 시늉을 하자 허리 숙여 피하려다가 발꿈치가 삐끗하면서 바람 받은 허수아비처럼 휘청거린다. 아차.
쨍그라랑.
기환이의 몸이 흔들리며 양동이 손잡이를 건드려 훌러덩 엎어진 것이다. 재빨리 뛰어 손잡이를 낚아챘으나 나머지 물고기들까지 절반 이상 흙바닥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정환이가 먼저 흙바닥에서 팔딱이는 민물장어를 담기 위해 땅바닥을 이리저리 기어다니자 기환이도 잡으려고 납작 엎드리다가 무르팍에 콧등을 지찐다. 취한 사내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형제들을 바라보다가 아까보다 더 꼬부라진 목소리로.
“정말 불쌍허구나. 이.”
그러자 정환이도.
“제발 평범하게 봐주시고 빨리 지나가셨으면 좋겠습니닷!”
아주 또렷한 목소리로 한 마디 던지긴 했다. 그러나 순간 기순이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다리에 생채기가 생긴다. 다행히 울지는 않고.
“전부 엎질렀어. 아!”
안타까움에 동동 구르기만 한다.
“전부는 아냐. 주워 담으면 찌끔은 챙길 수 있어.”
이번에는 미꾸라지 몇 마리가 흙바닥에 배를 납작 깔고 꼼지락꼼지락 흩어지면서 지느러미를 움직이니 곧바로 물가에 닿을 것 같기도 하다. 새끼 민물장어는 이미 집에 가져가도 죽을 게 뻔하므로 양동이에 집어넣는 게 아무 의미가 없다. 정환이가 두어 머리를 덤불 속에 던져주었으니 어차피 집에 못 가져갈 바에는 살려 주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빗물 줄기 흔적 따라 실개천까지만 헤엄친다면 살아남을 수도 있다. 그런데 주정뱅이 점박이 사내가 또.
“니가 성깔을 부리니 바구니가 엎어진 거여. 몸이 아픈 애라 성격도 삐뚤어졌구나. 신체가 장애를 먹으먼 정신두 장애를 먹는다는 옛말이 용코읎이 맞는구먼.”
정환이가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사내에게 다가가.
“아저씨. 지발유. 네. 빨리 가세유 네.”
정환이가 사정하면서도 눈빛이 이글이글 끓는 걸 까맣게 놓치시는 것 같다. 사내는 잠시 서 있다가.
“딱혀. 헛수고 헝 게 정말 불쌍허구나. 다리 아픈 장애인덜은 바깥이루 나오기만 허먼 넘들헌티 짐이 되니 싸돌아 댕기지 말구 그저 집구석이서 편안히 있으야 되능 거여.”
‘불쌍하다’는 말만 예닐곱 번 반복하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니 그나마 다행이다. 열 마리쯤 남긴 했으나 물을 뜨러 개울에 갈 힘이 없다. 기순이가 대야를 뒤집으며.
“마흔 마리는 놓쳤어. 나머지 열 마린 내일 와서 다시 가져가먼 안 되남?”
“괜찮어. 원래 돈이 들어간 게 아니닝께 밑지야 본전이여. 그럴 거먼 차라리 츰버텀 새루 잡능 게 나을 거여.”
그렇게 위로하는 정환이의 종아리까지 삐꺽삐꺽 흔들린다. 지금은 딱 1분이라도 쉬고 싶은 마음뿐이다.
“어차피 모두 죽는 겨. 민물장어는 워낙 성격이 급헤서 환경이 쬐끔만 변헤도 그 자리에서 죽어. 내가 헤봐서 안당께. 키울 수 읎는 장어는 양어장이서 절대로 사지 않응께 내가 진즉 버린 거여. 닭장에 던지면 좋겠지만 우리 집은 닭이 두 마리밖에 읎으니.”
기환이가 고개를 숙이며.
“나 때문인디.”
“너 때문이 아니여……운명이지.”
도랑에 버려진 몇 마리가 촐랑촐랑 상큼하게 들리는 게 벌써부터 생기있게 헤엄치는 것 같다. 기순이가 흐릿한 어둠의 개울을 들여다보며.
“헤엄치는 건 이쁘다.”
그 소리 때문에 아주 잠깐 흐릿한 상큼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새 절벽처럼 앞을 막아서는 어둠, 도저히 뚫리지 않는 벽 같은 어둠이 막막하게 막고 있다. 그 어둠을 밀어내며 발자국을 옮기는 종아리가 사슬에 묶인 듯 출렁거린다. 정환이 혼자 얼떨결에 튀어나온 ‘운명’이란 말을 곱씹는 중이다.
이제부터는 버리고 포기한 새끼 민물장어보다 집에까지 돌아갈 길이 더 까마득한 것이다. 빠르게 움직여도 40분 이상은 걸릴 텐데 기환이까지 데려가려면 거기에 30분은 더 잡아야 한다. 양동이와 대야가 없어졌으니 걸음이 조금은 편해졌지만 여동생 둘은 어느새 눈이 감긴 듯 흐느적거린다. 다리에 힘이 없으니 길도 더욱 안 보이는 것 같다. 기옥이의 비틀거리는 손을 잡았는데 생뚱하게. “귀신이 진짜로 있남?”
기옥이가 무서움증에 빠지기 시작하니 새로운 불안감이 보태진 것이다. 달님이 먹구름 속으로 들어가면서 칠흑처럼 어두워진 탓도 있다. 기환이가 지팡이에 힘을 주며.
“절대로 읎어.”
딱 잘랐으나 기옥이는.
“동물원엔 귀신두 있을 거 아닝감?”
“쓰잘떼기 읎넌 소리 말랑께. 삼십 분은 더 걸으야 집이여.”
“다리 아프당께.”
“무조건 가야 혀.”
정환이는 ‘그러니까 따라오지 말랐잖아.’라는 말을 절대로 꺼내지 않는다.
“졸려.”
기옥이의 눈이 반쯤 감겨 있다.
“심을 내지 않으먼 죄다 고아가 되능 거여.”
그 소리에 기순이가 언니처럼 동생의 손을 꼬옥 잡아끈다. 작은 언덕을 힘겹게 넘어도 훨씬 더 높은 고바위 언덕이 또 하나 남아있다.
“움직일 수 읎당께. 죽을 것 같으.”
정환이가 참고 또 참다가 노여운 표정으로.
“자꾸 그러면 너만 놓고 간다, 귀신이 와서 네 대가리를 파먹어도 나는 물른당.”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기옥이가 한동안 입술을 실룩거리더니 그예 울음을 터뜨린다. 기순이도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더니 금세 눈시울이 젖는다. 정환이와 기환이는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입술을 옹물고 바라본다.
“언능 인나랑께. 워뜩허든 가야 혀.”
다리에 파들파들 힘을 주며 걸음을 옮기니 다행이면서도 안쓰럽다. 기환이도 지팡이를 땅에 팍팍 꽂으며 바득바득 움직이고 여동생들은 눈을 반쯤 감은 채 반사적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 잠시 쉬고도 싶지만 자칫 잠이라도 들면 이슬에 젖은 채 날이 밝을 수도 있다. 어쨌든 모두들 뽀드득뽀드득 어금니를 갈며 따라오다 보니 집까지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졌으니 신기한 일이다. 다행이다. 어린 4남매끼리 밤길을 헤쳐 무사히 집에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 정환이네 옴팡집은 여전히 불이 까맣게 꺼진 채 고요, 고요에 덮여있다. 자식들이 문을 열고 오그르르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는데도 부모님 모두 쓰러진 몸이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어린 자식 네 명이 그렇게 언덕 넘고 징검다리 건너 세 시간 넘게 천신만고 끝에 집에 간신히 도착했으나 아무 기척이 없는 것이다.
‘왜 늦게 왔어.’
강철이네 집처럼 야단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게 쓸쓸하다. 정환이 혼자.
‘운명이다. 그래도 무사히 돌아온 게 징하고 장하다.’
그런 안도감으로 가슴을 다지는 중이다. 눈을 감으면 금세 새벽이 올 것이다. 배가 고프지만 절대로 울지 말아야 한다며 보드득뽀드득 손마디 꺾는다. 그랬다. 밀기울은 아무리 씹어도 껌이 되지 않았고 조약돌은 냇물에 파묻고 새도록 기다려도 비누가 되지 않았다. 그해 열한 살 늦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