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년 겨울, 서울 지구 운동권 2년차 대학생이었던 제자 임지연(지금은 문학평론가)은 모교 쌘뽈여고의 교지에 해직교사가 된 두 스승들의 얘기를 수록했는데.
‘벌판의 채소와 곡식들이 시들고 백성들도 허기지던 지난한 가뭄의 여름 강원도 원주 어디쯤 농막에서 글에 몰입한 반백의 작가가 있었단다. 그미는 소설을 쓰다가 바깥에 나와 우물의 물을 텃밭에 뿌리곤 했는데 감자나 채소, 화초뿐만 아니라 밭두렁 잡초들에게도 똑같이 물을 적셔주었다. 그 이름은 박경리라는 작가인데.’
라고 화두를 떼시던 선생님이 계셨는데.
단발머리 소녀들은 ‘박경리’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아, 하는 감탄사 합창을 내뿜었던 것 같다. 그 말을 들려준 사람이 강병철 선생이라고 적혀 있지만, 기실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다가 함께 해직되었던 유도혁 선배한테 들은 이야기다. 그즈음 나는 ‘글 쓰는 교사’로 컴백하는 게 지상의 목표였고.
그리고 27년 후 나는.
학습연구년을 맞이하여 마침내 토지문화관 작가촌에 입소하게 되었다. 강원도 원주시에서 시내버스로 50분 정도 더 걸리는 매지리 종점에서 무거운 배낭을 지고 다시 고바위로 15분쯤 오르던 그 길을 잊을 수가 없다.
십여 년이 넘은 얘기지만.
나는 박경리 선생께서 전업작가들을 위한 작업실을 개소했다는 신문 기사를 두근두근 읽은 적이 있다. 그리고 가끔 그네들끼리의 무게추를 비교해보곤 했다. 열다섯 명의 작가가 동시에 저울에 올라서면 선생의 무게와 수평을 이룰 수 있을까. 아니면 낱낱이 일대일 겨루기가 가능한 것일까. 무릇 프로는 저마다 고혈을 쥐어짜며 처절하게 싸우는 상황이므로 아무래도 후자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었던 것 같다.
도대체 입소 작가들은 어떤 모습일까. 사법고시생들처럼 머리띠 동여매고 하루에 스무 시간씩 글만 쓰는 야행성 동물들일까, 하는 궁금증을 끌어안고 사무실에 들어섰다. 토지문화관은 세 동의 건물로 구성되어있는데, 가운데 3층 건물이 본관이고 양쪽으로 작가들의 집필 사동이 있다. 매지관에 열 명이 집필 중이고 흰색 건물 귀래관에 소설가 강석경 선생을 위시한 다섯 명이 있으니 도합 15명이다.
자택 앞 텃밭에 야채들이 엽록소를 쏟아내고 있었는데.
선생께서 생전에 텃밭의 상추를 따서 작가촌 후배들의 밥상에 얹어주기도 했단다. 그래서일까, 그가 망자가 된 후로도 토지문화관의 식탁에는 유독 푸성귀 천지였다. 얼핏 자상한 툇마루 어머니를 떠올릴 수 있지만 기실 중생들은 그미의 도도함에 기가 죽기도 했으니.
2003년 SBS 드라마에서 대하소설 ‘토지’를 상영하게 되었는데.
남자 주인공 길상 역을 맡은 젊은 탤런트는 원작자 박경리 선생과 소통의 시간을 갈망하며 전화를 걸기로 마음 먹었는데 왠지 불안하게 설레는 것이다. 발신음이 조마조마 떨어졌고.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는 이번 드라마 ‘토지’에서 길상 역을 맡은 유준상입니다.”
“그래서요?”
서늘하다. 소심증이 현실화되었더라도 일단 부딪쳐봐야 하는데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어쨌든 먹한 가슴 누르며 젊은 배우답게 차분하게 다음 말을 잇는다.
“이번 SBS 드라마 토지를 시청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에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여긴 SBS가 안 나오는 지역인데요.”
수화기 속의 침묵보다 더 무거운 것이 있을까. 안기고 어리광부리고 싶은 속세의 잔정은 그렇게 슬며시 묻히는 게 당연한 지도 모른다. (2003년 '오마이뉴스‘에서 발췌한 내용.)
이듬해 여름, 진부한 신록의 절정 즈음이었던가.
아내 박명순 선생은 국어과 교수들과 대학원 수강생들이 동행한 원주 발 문학기행을 떠난다. 이차구차 도착한 회촌 언덕 회색집에 작가는 부재중이었다. 땡벌과 호랑나비들이 부르르 날개치는 산골의 초여름을 배경으로 오리 두 마리가 다라에 채워진 물을 마시며 하늘보기 하는 마당에서, 그들은 하염없이 서성이며 대본처럼 토지의 배경을 조마조마 떠올리는 중이다. 작가가 한 번도 답사해보지 않은 통영과 만주 벌판 모두가 실제 장소와 똑같이 배치시켰다는 전설 같은 문장도 두런두런 곱씹어보는데.
“누구신데 남의 집 마당에 허락도 없이.”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단호했다. 국문학자들 모두 ‘허락도 없이’라는 말을 곱씹으며 어리버리하는 중인데, 아내 박명순이.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선생님의 작품 ‘토지’의 현장 답사를 한 다음 학생들에게 바르게 전달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납작 엎드린 이후 쬐끔씩 긴장이 풀리고 비로소 화해와 소통의 분위기를 만들었다던가. 선생께서도 상추 이파리도 한 소쿠리 씻어주는 여유도 보였으나 동반했던 국문학도들은 첫 상봉의 서스펜스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나.
십여 년 후 그 자리에 내가 입소하게 된 것이다.
토지문화관의 일상은 한가하면서도 벽 속의 중압감으로 어깨가 무거웠으니.
주로 먹고 자고 글을 쓰는 일상의 쳇바퀴요, 가끔 양념처럼 술상이 차려지기도 한다. 숙취의 다음날 옥수수밭 사이로 산책하고 노트북 앞에서 두어 시간 글을 쓰다가 완행버스로 원주 시내 나가서 혼자 영화 ‘은교’ 보고 센치해지다가 시장골목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다시 버스타고 들어와 당뇨병 약 먹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 노트북과 씨름한다.
아침부터 베란다 감자밭 보며 담배 피우고 커피 마시면서 책 보고 영화 ‘코리아’를 볼까 하다가(솔직히 나는 평소에는 영화를 전혀 보지 않음) 기다리는 시간이 지리해서 포기하고 저물녘에는 혹시 술쾌 없나 하며 옆 방 작가를 노크도 한다. 저무는 논두렁길에서 개구리 울음소리에 취했다가 일회용 커피잔 치우고 다시 당뇨병 약 먹고 창작과 비평 펼쳤다가 빨래비누로 머리 감고 글을 쓰다가 창문을 열면 신새벽이다. 아,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막막해 하다가 하하하 심심하게 행복하다며 이빨 닦다가 ‘밥 먹으러 가자’ 혼잣말 하며 식당으로 올라가는 침목 계단 또각또각 다져주며 ‘어렵쇼 물상은 변화가 없는데 생명은 성장하네요’ 상념에 취한 채 내 생애 최초로 한가한 세월을 보냈다. 순간은 지루한데 세월은 쏜살같다.
주당 이틀 정도는 작가들의 술판에 끼어들었다. 가겟방이 머니까 주로 피티병 맥주를 마셨는데 그게 떨어지면 2차가 불가능하므로 쿨하게 끝나는 편이다. 안주는 주로 과자나 오징어채가 주류였지만 언젠가 십오 분 거리에서 치킨을 시켜서 별식처럼 먹는 방법도 배웠다.
휴게실에 가스 렌지가 없는 건 ‘주(酒)사파’ 작가들의 ‘밑 빠진 독’에 대한 우려 때문인 것 같다. 가스 불 켜놓고 깜빡 잠이 들 수도 있으므로 커피보트와 전자렌지만 있다. 그러니까 뜨겁게 데워먹을 수는 있지만 찌개를 끓이는 건 불가능한 것이다.
식단은 푸성귀 웰빙 식단이지만 일요일이나 휴일은 제공이 되지 않으므로 각자 알아서 먹어야 한다. 그러니까 달력의 빨간 숫자가 문제다. 나도 생전 처음 인스턴트 누룽지나 일회용 봉지 김치 그리고 컵라면과 햇반 같은 물품들을 냉장고에 재워 넣었다. 김치 두 조각으로 라면 두 끼니를 때우기도 하면서 일반 라면 끓이는 법도 전수받았다.
먼저 라면을 용기에 담는다. 커피보트에 물을 끓여 컵라면처럼 그릇에 물을 붓는다. 그 그릇을 다시 전자렌지에 3분간 돌리면 라면이 되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그냥 커피 포트 뚜껑을 열고 끓이는 방법도 있긴 하다. 스프를 미리 넣으면 커피보트를 닦기가 힘드니까 그냥 라면만 넣고 끓여 용기에 옮긴 다음 맨 나중에 스프를 합치는 방법이다. 그마저 없으면 생라면을 깨물어먹어야 하지만 잇몸이 흔들려서 아주 고생을 했다.
열다섯 명의 입주 작가 중 교사는 나 하나뿐이었고.
소설가 강석경 선생은 내가 젊은 날 ‘숲속의 방’으로 감동했던 기억이 있으므로 낯설지 않았다. 목사 시인 고진하는 집이 근처여서 양계장을 돌보며 오락가락 입주한 상태였고, 싱가포르의 작가 Ohviar는 30여 편의 시니리오를 올린 재원인데 수사가 밝고 명랑하다. 베를린의 설치 미술가 이옥련 선생은 입주하자마자 텃밭에 물을 주는 모습이 생경해서 나는 가끔 베란다에서 그미의 뒷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로봇콩’이란 동화책을 선물한 신정민 선생을 비롯한 동화작가가 의외로 가장 많았다. 이미애, 김란주, 임정자, 김난중 등 모두가 인터넷에 접속하자마자 몇 십 권에서 몇 백 권의 이름이 떠서 뜨악했다. 소설가 마윤제는 문학동네 신인상 출신이고 평론가 신형철의 ‘몰락의 에리카’는 아내의 책꽂이에 소장되어 있어서 낯이 익은 상태였다. 르뽀 작가 송기혁으로부터 ‘강물처럼 흘러서’를 받았는데 그는 나를 알아본 유일한 작가다. 작년 가을 한겨레신문에 4대강에 대한 르뽀를 기고한 적이 있었는데 그의 저서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김희정, 민용근 등 젊은 영화감독들이 있어서 그들이 제작한 독립영화를 몇 개 보았다. ‘열세 살 수니’ ‘혜화, 동’(가운데에 쉼표가 있음. ‘혜화’는 소녀 이름이고 ‘동’은 중의적 의미를 지닌다고 했음.) ‘청포도 사탕’(‘사랑’이 아니라 ‘사탕’임) 등을 함께 관람하기도 했다. 대박을 치는 영화들을 소위 추리 소설로 비유한다면 독립영화는 한편의 서정시였다. 일반 영화 시장에서는 화려하지 못하지만 독립영화관들이 따로 산재해 있으며 특히 매니아들은 한 편의 영화를 여러 차례 반복해서 감상한 다음 토론의 시간도 갖는단다.
“제작비가 얼마가 들지요?”
“저는 최소 경비입니다. 아주 적게 들었어요. 2억 정도.”
작가들은 보통 소요 예산이 달랑 복사비 3,000원과 볼펜 몇 자루면 해결되는데 참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보면, 예술가 중에서 가장 최소 경비로 시작할 수 있는 게 문예 창작이며, 밑천이 안 드는 만큼 중도 포기자도 많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문장에 전혀 동의하지는 않지만.
꿈나무들은 지금도 ‘시지프스의 돌’처럼 예술 세계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내 아이들이 시인을 꿈꾸며 무수히 문예창작과에 입문했고 가수를 꿈꾸며 실용음악의 행진으로 방향키를 틀곤 했다. 더러는 화가를 꿈꾸며 이젤을 들고 캠퍼스 화폭에 몰입하며 착한 영화를 꿈꾸며 대본을 쓰고 무대를 설치한다. 그러나 현실은 당장 경제력부터 위기를 맞이한다. 생활비가 턱없이 딸리므로 논술학원이나 기타학원에서 경제를 충당하며 고단한 꿈을 지탱한다. 문제는 스무 살에 결정한 첫 선택이 세월이 흘러가도 잘 바꿔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대로 갈 수밖에 없다. 혹자는 구름 잡는 사람이라고 자르기도 하지만 누가 구름잡는 지는 정확한 답이 없다.
그미의 사위 김지하 시인의 이름을 듣게 된 아주 짧은 스냅 하나.
나는 태생적으로 부끄러움이 많아서 처음 맞는 눈빛들과 살갑게 마주치지 못한다. 그래서 한 동안 혼자였다. 입소 작가들이 저녁 식사 후 개울 따라 매지리 종점까지 산보를 떠난 사이 나 혼자 사무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저물녘이다. 트럭의 시동이 그치고 중년의 택배 기사가 총총총 계단에 오른다.
“우편물이 왔는데……누구 없나요?”
“지금 아무도 없는데요. 저는 여기서 입소 중인 사람이구요. 누구인가요? 수신인요?”
“김지하라는 분인데 혹시 아시나요?”
“……그 분은 저를 모르죠.”
그랬다. 70년대가 있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아, 하는 감탄사가 나오던 암흑 속의 시국이다. 창작과 비평과 자유실천문인회가 있었고, 평화시장 전태일과 민중가수 김민기 그리고 시인 김지하가 희망의 등불을 밝히던 어둠의 시국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싸-해진다. (누나 강병옥의 국문학도 시절 나에게 말하기를) 아내와 합의 하에 아이를 4.19에 낳았다는 시인의 기억도 있으나 정확하지 않다.
85년 학교를 쫓겨나던 날, 소녀들이 느티나무 까치집 아래 교지편집실로 모여.
마지막으로 부른 석별의 노래가 양희은의 ‘아침 이슬’이었고 나는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부르며 그 학교를 마감했다. 떨리는 몸 떨리는 마음 치떨리는 가슴으로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만세.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채우지 못한 채 ‘꺼이꺼이’ 흐느끼면서 담장 밖으로 떠났던 슬픈 기억도 이제 수십 년 지난 과거가 되었다.
한때 나는,
거목들의 그늘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도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토지의 그미나 시인 김지하, 태백산맥의 조정래나 농무의 신경림, 그리고 공주의 조재훈 스승의 그늘에서 글만 읽어도 평생 행복으로 충만할 거라는 믿음을 추호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 ‘하수와 고수’의 관계로 살아가는 게 가장 큰 행복인 줄 알았으나 그네들도 내 예상과 빗나가기도 했다. 게다가 세상이 바뀌듯 내 몸도 변했다. 언제부터였나, 그늘을 벗어나고 싶은데 굳은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것이다. 세상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음을 알았을 때 나는 이미 쇠해있었다.
그렇듯 과거의 감동은 영원하지만.
내가 몸 담고 있는 학교 현장은 촘촘한 발(廉)처럼 발디딜 틈이 없었다. 그러니까 교단에서 바라보면 삶 자체가 망망대해의 섬이요, 또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나는 큰 산을 넘어서자마자 다시 막힌 더 큰 산을 보며 도움닫기를 분비하곤 했지만 뜻대로만 되지는 않았다.
교직생활 기십 년, 초등학교 수업만 빼놓고 안 해본 게 없다. 중학생과 고등학생을 가르쳤고 인문계 실업계 모두를 통달했으며 대학 강의와 문학 영재반, 연구소 특강 그리고 해직교사 시절 대입학원과 검정고시반까지 전천후로 뛰는 사이에 머리카락에 서리가 내렸고 속알머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문제는 학교가 갈수록 조급해진다는 점이다.
모두가 문서고 모두가 신속 보고를 요한다. 일제고사가 겹쳐졌고 교원평가까지 가세하면서 가르침과 문서의 주객이 완전히 전도되었다. 마찬가지다. 더러는 보고서 가산점으로 승진 대열에 들어서기도 하고 민주노동당 후원비를 내었다는 이유로 해직의 길을 걷기도 하니, 허망함과 눈물이 시계추처럼 흔들린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한 때 아이들을 식물성 미소와 아가위 눈동자로만 규정하기도 했으나 그도 지난 얘기다. 노여움의 스승이 되어 미운 놈 용서하지 않으려 옹매듭진 적도 있으니 진정 행간이 필요했던 차이다. 껴안고 싶은 눈동자가 있었고 다가서기 멈칫거리던 몸도 있었다.
그 와중에 평교사를 걷던 벗들이 명퇴 릴레이에 빠진 것도 어쩌면 필연이다. 이문복 선배, 김흥수 형, 정혜실 선생이 명퇴를 했고 글벗 조재도 선생도 서류가 진행 중인데 나 혼자 ‘글 쓰는 평교사’로 정년을 채우겠노라 어깃장을 놓는 중이다. 그러다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은 필시 목마름 탓이다.
지금은 본관 로비에 걸린 그미의 사진을 살피는 중인데.
빛바랜 배지색 건물 2층이 배경이다. 슬라브 아래로 그미가 장독대까지 호스를 빼어내어 다라에 물을 담는 흑백사진이다. 옥수수나 감자들은 오월의 햇살 받으며 묵묵히 수도하듯 엽록소를 성장시키는데 슬리퍼 차림으로 넌지시 오리 두 마리를 바라보는 장면이 암연히 수수롭다. 대가의 살핌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먹는 데만 몰입하는 오리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곱씹어본다.
저무는 산책로에서 노구의 사내가 두 명의 기자와 인터뷰 중이었고.
나는 그들 옆을 지나야 내 작업실로 들어갈 수 있다. 옷깃이 스치면서 누군가 목덜미를 잡는 것 같다. 아, 김지하 시인이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으나 여전히 인상이 진했고 목소리에서 카리스마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나는 예나 지금이나 안부를 나누는 방법을 모르므로 그렇게 옷깃만 스쳤고 그게 끝이다. 그렇듯 스쳐 헤어지면서 회한에 시달리기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