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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피에르항의 농무<3>
3.
사람이 죽어나가지 않은 집이 없듯이 선박들마다 한 두 차례 사고를 당하고 무수한 선원들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회사마다 선박들이 무사고 안전조업을 하면 육상근무에는 특별한 어려움이 없었다. 박 대리는 틈이 날 때마다 송도해수욕장을 지나 해변 데크로 산책을 나갔다. 하루는 암남공원 벤치에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 있을 때 묘령의 여인이 나란히 옆에 놓인 의자에 와서 앉았다. 선글라스 속의 곁눈질로 그녀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손에는 한권의 책이 들려있었다. 한동안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손에든 책을 펴서 읽었다. 바닷가 벤치에서 긴 머릿결을 날리며 책을 읽는 여인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원양어선을 타고 파도와 싸우며 고기를 잡아 올릴 때는 잡생각이 머릿속에 자리를 잡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고기를 많이 잡을까 하는 일념에 파묻히고, 배고프면 먹고, 잠자리에 들면 꿈을 꿀 틈도 없이 곤한 잠에 빠졌다. 선원들에게 잠자는 시간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데이트 시간처럼 기다려질 때도 있었다. 잇달아 고기가 올라올 때는 24시간 작업을 계속해야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잠자는 시간이 먹는 것보다 귀했다.
제대를 하자마자 배를 타고 원양에서 2년을 보낼 때는 언뜻언뜻 여자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육상근무를 하고부터는 사정이 달랐다. 틈만 나면 여자 생각이었다. 길을 갈 때나 음식점에서도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은 그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그것은 금녀의 우리에 오래도록 갇혀있었던 건강한 남성에게 나타나는 본능의 발로였다. 한편으로 혼기가 가까웠다는 징조이기도 했다. 때로 혼자서 공원을 산책하는 것도 그런 마음을 달래고 혹 자신과 같은 외로운 마음의 여인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처럼 그러한 기대감이 현실로 다가왔다. 박 대리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녀는 책에다 시선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그녀의 생각을 비집고 들어갈 틈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곁을 지나는 사람들이 보면 흡사 데이트하는 남녀가 서로가 좋아하는 것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마도로스 같은 남자는 바다를 보며 생각에 잠겨있고 여자는 책속으로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선글라스를 낀 그는 누가보아도 마도로스의 모습에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선글라스를 낀 채로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말을 건네는 것은 그림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는 안경을 벗고 용기를 내었다.
“실례지만 말씀 좀 묻겠습니다. 이 근처 혈청소가 어디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요. 혹시 어디쯤인지?”
그는 아가씨 쪽으로 다가앉으며 물었다. 혈청소가 암남공원 근처에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어디 있으며 그 것이 무슨 뜻인지 의미도 알지 못했다.
“저쪽으로 좀 더 돌아가면 나옵니다.”
그녀는 왼손으로 오른 쪽을 가리키며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빨간 표지의 책 제목은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 이었다. 그녀는 상냥하게 대답을 하면서 고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들어보기는 했는데−. 혈청소는 무엇 하는 곳입니까?”
그는 이야기를 이어가기위해 ‘혈청소’의 뜻을 물었다.
“저도 말은 들었지만 확실히는 잘 모릅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그 일에 관여하셨다는 얘기를 아버지로부터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만 대답하고 일어나 가볍게 목례를 하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혈청소란 우역혈청제조소(牛疫血淸製造所)를 줄인 말이었다. 혈청소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는 100년이 훨씬 넘는다. 일제는 1909년 이곳에 ‘수출우역검역소’를 설치했다. 2년 뒤인 1911년엔 우역혈청제조소를 만들고 일본으로 수출되는 모든 한우에 대해 검역절차를 거치도록 제도화했다. 당시 한반도에는 소에게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질환인 우역(牛疫)이 창궐했다. 그녀와의 만남 이후 회사 도서실에 비치된 책 『부산이야기』에서 혈청소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다. 그리고 그녀가 들고 있던 빨간 표지의 책도 사서 읽었다. 그때까지 몰랐지만 그 책은 당시 베스트셀러 2위에 올라있던 소설이었다. 그 내용은 참으로 달콤한 사랑의 이야기였다.
그 후에도 몇 차례 암남공원을 산책했지만 한동안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늦은 봄 어느 날 암남공원에 들렸을 때 같은 자리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뱃놈’의 눈에는 여자란 다 신비롭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뜯어보면 그녀는 특별히 인물이 예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친절한 첫인상과 어딘지 모르게 성실해 보이는 모습이 그를 끌어당겼다. 이날도 한권의 책을 들고 있었지만 무슨 생각에 잠겨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그가 먼저 인사를 하며 그녀가 앉은 벤치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것 같았던 그녀가 그를 쳐다보고 인사를 받으며 벤치 한쪽 자리를 내어주었다.
“바다를 좋아하시는가 보지요.”
그도 바다를 향해 앉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것은 가쓰오선을 탈 때 첫 낚시를 바다에 던질 때와 같이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이곳에 자주 나오십니까?”
그녀는 대답대신 되물었다.
“바다를 바라보면 바다처럼 생각이 깊어지지요. 살아온 일들이 자꾸 파도처럼 밀려오거든요.”
그는 선원생활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바다에서 사셨나보지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바다에서 살았던 것을 어떻게 아셨어요. 하하하!”
그는 밝게 웃으면서 그녀를 마주 보았다.
“여기서 처음 뵙게 되었을 때 그렇게 느꼈어요. 흡사 마도로스 같았거든요. 호호호.”
그녀도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따라 웃었다.
“바다위에서 살 때는 육지가 그리웠지만 육상근무를 하고 있으니 다시 바다로 나가고 싶어지네요.”
실제로 그는 두 번째 승선을 계획하고 있었다.
“저는 자영업을 하시는 아버지의 일을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마음이 갑갑해서 이렇게 나와 있으면 바다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아요.”
그 후로 두 사람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같은 장소에서 만났다. 그는 원양어선 생활의 단면을 조심스럽게 한 자락씩 늘어놓았고, 외국 항구에 입항했을 때의 낭만도 털어놓았다. 그리고 해상생활은 한 남자의 꿈을 이루기 위한 무한 도전의 장이라고 강조했다. 언젠가는 그가 바라는 미항에 도착할 것이라는 자신감도 피력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신뢰감을 더했고 마음도 차츰 가까워졌다. 그해 가을에는 감천동에 있는 아가씨의 집을 방문하고 부모님께 인사도 드리게 되었다. 서로가 아직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결혼이 전제된 발걸음이었다.
겨울에 접어들면서 천성수산 원양어선들의 귀항이 늘어나면서 임금정산 작업 등 뒤처리가 바빠 2~3주 동안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한동안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지만 1년 정도 지속되었던 둘의 관계는 조금씩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거의 매일 오후시간에는 암남공원으로 나가보았으나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퇴근길에 용기를 내어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그녀는 서울에 취직이 되어 가고 없었다. 부모님께 정중히 결혼 의사를 밝혔으나 대답은 절망적이었다.
“배 타는 사람에게는 내 딸을 줄 수 없네!”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들은 퉁명스런 마지막 말이었다. 처음에는 사윗감을 대하듯 함께 식사도 했던 분의 생각이 돌변하고 말았다. ‘뱃놈에게 딸을 줄 수 없다’는데 그는 달리 더 할 말이 없었다. 생각을 돌이켜보면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다시금 배를 탈 것이라는 포부를 밝힌 것이 잘못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미소 짓던 그녀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다시 만나 자신의 꿈을 수정제안하고 싶었으나 그런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다. 요즘처럼 스마트폰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녀의 서울주소도 알 길이 없었다. 어디까지라도 찾아가 만나야 한다, 말아야 한다, 갈등하며 괴로워하다 단안을 내렸다.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며 아픈 마음을 접기로 했다. 그런 서러움과 괴로움을 하루 빨리 털어버리는 길은 어떤 치열한 일에 몰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을 빼돌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육상근무를 끝내고 서둘러 승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지난번 가쓰오 선의 2항사로 책무를 잘 감당한 이력으로 이번에는 냉동운반선 1항사로 승선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마음을 다잡고 선원구성에 몰두하고 있었다. 서른 살이 가까워지는 그의 나이를 생각하던 먼 친척이 한 여인을 소개했다. 출항을 앞두고 어떻게 새로운 여인을 사귈 수 있을까? 한번 깊이 입은 가슴의 상처가 체 아물기 전이라 다시금 마음에 갈등이 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과의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예쁜 여자였다. 사슴의 눈망울 같은 맑고 선한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의 마음이 송두리째 빨려드는 것 같았다. 오래도록 가문 땅에 빗물이 쓰며 들 듯 그는 온통 그녀의 생각에 젖어있었다. 균형 잡힌 몸매인 그녀와 함께 걸어가면 사람들이 한 번씩 돌아볼 정도로 두 사람은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나이는 그보다 세 살 아래지만 마치 소녀같이 아리따웠다. 만남의 횟수를 더해가면서 활달한 그녀의 성격은 쉽게 정들 수 있었다. 상처받았던 마음이 치유되고 정신적 안정도 되찾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로부터 놀라운 말을 듣게 되었다. 자신은 한번 결혼에 실패한 사람이라는 충격적인 고백이었다. 이런 믿기지 않는 말을 들으면서 다시 마음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하느님은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것인가?’ 잊었던 기도를 다시 시작했다. 다른 남자들과 관계를 맺었던 음란한 고멜을 받아들인 호세아 선지의 일을 생각했다. 그토록 젊은 나이에 인생의 쓰라림을 맞본 그녀에 대한 측은함과 연민의 정이 끓어올랐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부족함을 더 크게 느꼈다. 상처를 딛고 다시금 사귀기를 시작한 그녀와 헤어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과거는 불문에 붙이고 두 사람은 앞날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부모님을 설득하고 여자 측 어머니께 말씀드려 태종대 곤포의 집에서 조촐한 약혼식을 가졌다. 두 사람의 마음은 하나가 되었지만 그의 부모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모는 고맙게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오팔 반지를 약혼 선물로 내어주었다. 그가 미처 약혼반지를 준비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머니가 아끼던 반지라면 모든 것을 대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예비 처가에 들려 식사도 하며 가까워졌다. 회사 일에 바빠 들리지 못하면 내일은 올 수 있느냐고 전화가 오곤 했다. 그는 생굴, 시금치, 김 등을 특별히 좋아했다. 그녀는 연산동 시장에 없으면 서면이나 자갈치까지 나가 시장을 보아 와서 그의 밥상에 올려주었다. 장모의 흡족해하시는 모습이 늘 감사했다.
약혼식을 올린 지 보름 후에 출국을 했다. 장모에게 딸을 부탁하고 부모와 형제들에게도 그녀에 대한 당부를 하고 기쁜 마음으로 부산항을 떠났다. 출항 후부터는 이틀에 한 번씩 일기를 쓰다시피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책상 위에는 약혼 사진을 걸어두고 하루에도 몇 차례 씩 쳐다보며 그녀를 생각했다. 첫 기항지는 파푸아뉴기니의 라바울이었다. 그곳에서 냉동수산물을 싣고 괌으로 가야했다. 스미즈에서 라바울까지는 15일, 라바울에서 괌까지는 10여일이 소요되었다. 라바울은 국제전화가 되지 않았으나 괌에서는 가능했다. 일본을 떠나면서 라바울과 괌에서의 스케줄과 주소를 미리 편지로 보냈기 때문에 도착하면 반드시 답장이 와 있을 것이라 믿고 즐거운 항해를 했다. 이처럼 자주 편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선장에게 허락을 받지 않고 통신사에게만 특별히 부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라바울에 도착했을 때는 한통의 편지도 와있지 않았다. 당시에는 항공편지도 한 달이 넘어야 도착하는 경우가 있었기에 회답은 받지 못했어도 그는 10여 통의 편지를 계속 보냈다. 육지에서처럼 속달로 편지를 부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괌에 도착해서도 편지가 없으면 국제전화를 걸어보리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물을 싣고 괌을 향해 출항을 했다. 1기사에게 할 수 있으면 최대한의 속도로 항해 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해상도를 들여다보면 배는 늘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 드디어 괌에 도착했을 때 반가운 한통의 편지가 와 있었다. 재빨리 편지를 개봉했다. 달콤한 사랑의 얘기로 가득 차있을 줄 생각했던 편지내용은 수고한다는 인사와 함께 일반적인 격식을 갖춘 것일 뿐이었다. 몇 번이나 읽어보아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는 아니었다. 지면에는 ‘사랑’이란 말이 한마디도 들어있지 않았다. 참으로 이상한 편지였다. 약혼녀의 집으로 전보를 쳐놓고 전화를 걸었으나 아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자기 집으로 부모님께 전화를 하고 동생들을 보내어 약혼자를 찾아보게 했으나 그녀의 집에는 아무도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괌을 떠나기까지 계속 연락을 취했으나 불통이었다. 이상한 예감 속에 마음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결혼한 선원들 가운데도 이러한 일은 종종 있었다.
어느 날 털보로 불리는 선원이 울상이 되어 있었다. 털보는 집으로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으나 도무지 통화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번 냉동선이 다른 어선에 비해 작업이 어렵지 않고 대우는 더 좋았으므로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집 한 칸이라도 마련하기 위해 승선을 했었다. 결혼한 지는 3년이나 되었지만 아직 아기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슬이 좋던 아내가 전화연락이 안 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아내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게 틀림없습니다.”
밤새 눈이 붓도록 울고 나서 다음날 아침 귀국시켜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항해 중 바다에 뛰어내리겠다고 소리치며 술을 마셔댔다.
“내가 오래도록 배를 타면서 아내에게 고생만 시켰으니 그럴만도 혀.”
털보는 자책을 하며 가슴을 치기도 했다. 회사로 긴급 연락을 하여 아내의 거처를 알아달라고 요청을 했으나 ‘연락불가’라는 회신만 돌아왔다. 다음날은 아예 식음을 전폐하고 작업장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는 아내가 어느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간 것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사흘간 계속 다이얼을 돌렸지만 연결이 되지 않으니 당연한 생각이었다. 내일까지 연락이 되지 않으면 그를 귀국조치하고 괌을 떠나기로 사관들과 협의를 하였다. 다른 선원들은 이런 일을 보며 아예 국제전화가 되지 않는 곳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선박은 하역을 완료하고 3시간 후면 출항할 준비를 끝냈다. 풀이 죽은 털보는 서둘러 귀국준비를 하고 있었다. 짐을 챙기는 모습이 하도 측은해 선상의 일을 총괄하는 1항사로서 그는 견딜 수 없었다.
“한번만 더 전화를 걸어보자.”
털보를 이끌고 선원회관으로 들어갔다. 한사코 마다하는 그에게 억지로 다이얼을 돌리라고 말했으나 끝내 거부했다.
“그럼 전화번호를 대라. 빨리!”
그를 다그쳐 1항사가 직접 전화를 돌렸다. 신호가 두 차례 가자 수화기를 드는 소리가 들렸다. 옆에 서있는 털보의 눈동자는 썩은 동태눈마냥 흐릿하게 초점을 잃었다. 수화기에서는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거기 석암 씨 댁입니까?”
통화가 되는 것을 본 털보는 눈을 크게 뜨고 1항사를 주시했다.
“그렇습니다. 누구십니까?”
“실례지만 이석암 씨 부인 계십니까?”
“제가 아내 되는 사람인데요−.”
“진짭니까?”
“왜 그러시는데요?”
“잠시, 잠시만 기다리이소.”
그는 왼손으로 수화기를 막고 옆에 있는 털보에게 고함을 질렀다.
“야, 이 자슥아, 너거 마누라다. 전화 받아봐라!”
클럽에 있던 외국인들이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모두들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진짠기요?”
털보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빨리 전화나 받아봐라. 전화비 올라간다.”
털보는 그제사 수화기를 받아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상대방을 확인하고는 핀잔부터 늘어놓았다.
“야, 이 여편네야. 니 어디 갔더노?”
“−−−”
“뭐라꼬? 진짜가? 나는 그것도 몰랐네. 가만 있어보래이······.”
그는 호주머니에서 급히 수첩을 꺼내어 보고는
“맞구나! 깜빡 잊었네. 내가 참으로 바보고 멍청이제! 큰 집에 전화해 봤으면 됐을 낀데.”
희색이 만면한 그는 정겹게 대화를 나누고 통화를 끝냈다.
“고맙심더. 초사님(1항사 통칭) 아니었어믄 큰 일 날 뻔 했네요. 귀국하면 칼로 콱 찔러죽일라 켔는데, 아버지 제삿날을 몰랐으니 내가 죽일 놈 아잉교. 큰집이 촌이라 놓으니 마누라가 제사지내러 갔다가 밭일 좀 거들어주며 며칠 있었다 카네요. 반찬거리 좀 싸들고 올라온 지가 한 시간 밖에 안됐답니다. 몸이 찝찝해서 목욕갈 준비를 하다 전화를 받았답니더.”
“어휴−, 이 사람아, 맥주나 한 깡 하자.”
남의 일은 해결해주었지만 자신의 일은 아직 숙제로 남았다. 배는 다시 라바울로 향했다. 그 후에는 괌, 팔라우, 사모아, 타이티로 항해를 계속해야 한다. 가슴은 텅 비고 일에 대한 의욕도 생기지 않고 그저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하루 8시간의 근무가 끝나고 잡무를 처리하고 나면 머릿속은 온통 약혼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영문인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그가 사관이 아니고 일반 선원이었다면 당장 귀국 요청을 했을 것이다. 다시 라바울에 도착하였으나 역시 한통의 편지도 와있지 않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원망스럽게 약혼녀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독한 위스키로 마음을 달랬다.
‘약혼식이 아니라 아예 결혼식을 올리고 왔으면 좋았을 것을······.’ 마음이 괴로우니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 5시께는 당직근무를 하다 상황판단에 큰 실수를 저질렀다. 본선 우현에서 거대한 선박이 접근하는 것을 보면서 ‘저건 예인당하는 선박이구나’ 의식하면서도 머릿속은 약혼녀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순간, 갑자기 큰 기적이 울렸다. 눈앞에 거대한 선박의 검은 그림자가 들이닥쳤다. 그가 재빨리 좌현으로 방향타를 잡아 가까스로 충돌을 피했다. 일촉즉발의 순간을 모면하게 되었다. 등에는 씩은 땀이 흥건하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다시 괌으로 돌아왔으나 그녀의 편지는 역시 한통도 와있지 않았다.
팔라우에서 사모아로 항해할 때는 곳곳에 거대한 산호초를 볼 수 있었다. 레이더에도 잘 나타나지 않는 산호는 달밤에 멀리서 보면 주위에 하얀 파도가 일어났다. 자칫 잘못하면 산호초에 좌초될 수 있기 때문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휘영청 밝은 달밤, 때로는 호수같이 잔잔한 바다를 항해하며 한없는 고독을 되씹었다. 영롱한 별들 가운데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유성의 꼬리를 보며 ‘왜 사는지?’ 인생의 의미를 생각했다. 끝없는 바다위에 하나의 나뭇잎 같은 자신을 생각하면 마음은 다시금 절대자에게로 기울었다.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났다. 참으로 긴 시간이었다. 식사를 제대로 못하자 몸은 야위어 거동하기조차 힘들었다. 얼굴에는 병색이 드러나기까지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할 때는 파도와 싸우면서도 용기가 솟아났지만 실연당한 사람에게는 위로가 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수척한 몰골을 본 털보선원이 침실로 찾아와 위로를 했지만 그는 더욱 허탈감에 사로잡혔다. 잊히지 않지만 잊는 것이 최상의 치료방법이란 결론을 얻었다.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이란 책 제목이 떠올랐다. 암남공원에서 우연히 만났던 첫 번째 여인이 손에 들고 있었던 책이다. 그때 그는 집으로 돌아와 밤을 새우며 그 책을 읽었다. 참으로 재미가 있었고 순간순간이 그대로 머무르고 싶은 장면들로 이어지는 소설이었다. 드라마나 소설의 결말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언제나 재미가 없었다. 그 소설속의 연인들의 마지막은 이별이었다. 여인은 남자를 잊으려고 애쓴다. 아니 어떻게 하면 복수할 수 있을까, 앙심을 품는 자리에 까지 이른다. 배신당한 여인은 ‘망각은 가장 잔인한 복수’라 생각하며 마음을 접는다. 그도 그런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주어진 현실에 몰두해야 한다는 쪽으로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다.
약혼녀에게는 「그간 고마웠소. 행복을 비오. 서로의 길을 갑시다.」 전보를 띄웠다. 이를 본 선원들은 틈만 나면 약혼녀 사진을 들여다보던 그의 돌연한 태도에 적이 놀랐다. 이제 그는 자신을 위한 생각보다는 선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1항사로서의 본분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마음을 고쳐먹으니 못할 일이 없었다. 사관들도, 선원들도 그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늘 육지로 향하던 그의 마음이 배 위에 머물자 선상생활이 즐거워지기 까지 했다. 사모아, 타이티 항구에 도착해서는 이국의 정서를 만끽하면서 비로소 뱃사람의 강인한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파도와 싸우면서 담력을 얻듯 잇따른 시련이 그를 굳게 세워주었다.
그로부터 8개월이 더 지나 마침내 선장발령을 받고 귀국을 했다. 이제는 돈도 있고 명예도 있었다. 그가 쫓던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그가 육상근무를 할 때 부지런히 출석했던 성당의 신도 가운데 한 사람이 그의 귀국 소식을 듣고 안부를 물어왔다. 그 신도가 헌신적이고 신앙심이 깊은 규수를 중매했고 마침내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이 신부감을 예비하셨고, 오늘까지 그의 삶도 인도해주셨다고 굳게 믿었다. 그가 선원생활을 그만두고 나서도 성당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잇달아 SOS가 수신되는 상황에서 백파에 휘둘릴 때, 항구에 입항할 때 거대한 상선과의 충돌을 피하게 한 일 등, 해상생활의 위기 속에서 언제나 하느님의 손길이 그를 붙잡고 순간순간 지혜를 주셨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