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향기
제 초등학생 수학여행기를 읽어 주셨으니 보너스로 고등학생일 때 떠난 수학여행기를 올립지요.
고등학교 2학년 땐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어요.
바로 이맘때, 정확하게 10월15일에 떠난 셈이지요. 5박6일로 기억하는데 수학여행비가 1,900원이었어요. 에개개 그걸 가지고 무슨 여행을? 제 기억이 틀림없어요. 공부는 별로지만 쓰잘데 없는 건 비상하게 기억하지요.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가면서 아무래도 경비가 모자랄 거 같다고 100원을 더 걷었으니 2,000원에 5박6일 제주도 수학여행을 다녀온 건 틀림없는 사실이 걸랑요.
하나마나한 생각 하나, 지금 수입 가지고 그때 물가로 살아간다면 월매나 좋을까요. 재벌 부럽지 않을텐데.... 밸 소릴 다한다고요?
아~ 처음으로 귤 구경을 했다는 거 아닙니까. 신기하대요 귤이. 맛도 대단했어요.
제가 바나나를 대학 1학년 때 처음 먹어봤으니 귤이야 언감생시. 제주도엘 간 건 문화적 충격이었어요. 다른 나라에 간 거 맨치로.
갈 때는 제주호 300톤 짜리 조그만 배를 탔는데 부산에서 오후 5시쯤 남해안을 미끄러지듯 항해를 할 때는 낭만적이었지요. 저녁 노을이 먼하늘부터 잔잔한 바다에 깔릴 때 그럴듯한 영화를 찍는 듯 로맨틱한 분위기였고만요. 나 신혼여행 갈 때 꼭 이 바다를 배를 타고 지나갈 거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벨 소릴 다 한다고요?
여기까지 낭만적인 남해 다도해 여행이었습니다.
한데 밤이 깊어가자 웬걸 풍랑이 일어서 밤이 새도록 갑판에 쭈그려 앉아서 오바이트 하고 개고생했지요. 나중에 나올 게 없어 거시기물만 게워냈어요. 넓디넓은 선실 장판에는 토사물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데 어떻게 들어가요. 선실에 들어갈 엄두도 내질 못하고 파도가 사정없이 치는 갑판에 쭈그려앉아 밤이 새도록 토한 제 꼬락서니를 상상해 보시구랴. 저만 아니고 거의 대다수가 그랬어요. 검은 양달양 기지(옷감)로 만든 교복이 토사 흔적으로 꼴이 말이 아니었어요. 거지가 따로 없었다고. 돌아올 때는 겁이 나더라고요 배멀미 땜시.
왠걸, 멋진 배를 타고 돌아올 줄이야.
도라지호 900톤 짜리. 이건 뭐 미국 영화에서 나오는 여객선, 하얀 제복을 입은 선장이 마도로스 파이프를 물고서 갑판을 다니는데 기가 막히더군요.
아~ 이때도 저녁 무렵 황혼에 물든 바다가 나를 유혹하더군요. 제가 폼을 잡았지요. 야~ 멀리 프랑스 마르세이유 항구로 향하는 여객선을 타고 가는 환상에 젖었더랬어요. 그럼 넌 신혼여행을 멀리 가는감? 아니, 독립운동 하느라 가슴에 상해 임시정부에서 보내는 밀서 한 장 들고서 파리에 암약하던 아나키스트, 무정부주의자 테러단체로 가는 길이라고라. 그럼 테러리스트라면 품에 권총 한 자루는 차고 있었겠지. 무시기 테러리스트까지 간담요. 소설에 보면 테러리스트야 말로 허무주의자 가 아니던가요. 놀고 있네, 아주 놀아 국제적으로.....흐흐흐
오후 5시 즈음, 황혼녘에 부우웅~ 쌍고동이 울어쌌는 부두,
우리가 타고가는 배가 부두를 벗어날 때 제가 뭘 했는지 아세요? 붉은 색 테이프를 던졌답니다, 부두를 향해. 전송객 중에 하얀 세라깃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제가 던진 테이프를 받아들고는 이별의 손짓인가 행거치프를 흔들더이다. 놀랍다고요?
공부 빼놓고 영악하기로 나만큼 빼어난 사람 있던가요. 색색이 테이프는 자꾸만 늘어나고 이별하는 연인들의 마음은 애간장이 끊어지는데 뱃고동은 부우웅 슬피 울고, 아~ 가노라 내 사랑아!
마치 독립운동하러 상하이로 떠나는 독립군 밀사같이 온갖 폼을 잡고서는 제주도의 이쁜 여학생과 이별했지요. 부두에는 저처럼 색색이 테이프를 들고서 이별하는 연인들이 많더이다.
니는 그런 못된 거는 어디서 배웠노?
아이구 행님요, 시골무지렁이가 배 타고 하는 거 우예 알았을까요. 그 제주도 처자가 갈체주더라고요.
우리 촌놈 중에는 저만 군계일학이었지요.
어떻게 그 사이에? 뭘요, 제가 일찍이 팬레터로 사귄 여학생이 있었걸랑요. 학원에 글을 올렸더니 금새 펜이 생긴 거라고요. 저보다 한 학년 위인 누나였는데 첼로를 전공하려는 고3이었거든요. 몇일 후에 수학여행 간다고 편질 했단말예요. 대단하다고? 공부 빼놓고는 다들 저한테 놀라요. 머리 회전이 쌈박하다고요.
어때요, 보너스로?
배를 타고 이별하는 연인은 으례 테이프를 던집답니다.
차마 이별하기 싫은 안타까움이 그리하겠지요. 이별의 예식은 이렇더라고요. 떠나는 사람이 갑판에서 테이프를 던지겠지요. 부두에 전송 나온 연인에게. 하나는 갑판에서 다른 하나는 부두에서 그 테이프를 쥐고서 이별의 예식이 거행 되더라고요. 영원히 이 배가 떠나질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애달프네요. 붕 부우우웅~ 기적을 울리며 배가 부두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면 서로의 이름을 부를테지요. "춘자야~" "영철~씨!" 그들의 마음을 이어주던 테이프도 마침내 툭~하고 끊어질 때면 가슴이, 억장이 무너질 거예요. 하지만 어떡해요.
이별이란 항구에 있어온 영원한 슬픈 엘레지가 아닐까요.
보내고 떠나가는 연인들은 눈물 젖은 채 돌아설테지요. 하지만 그 사랑 영원하던가요? 고무신 3년이면 다 바꿔 신는다더라만.
후후 그 누나, 항구에 나오느라 조퇴를 하고 나왔대요. 배 떠나는 시간에 맞춰서 무슨 약방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터였지만 육지에서 온 나를 보려고 두어 시간 기다렸다고 해요. 얼굴을 알았냐고? 우리 사랑이 운명이라면 단번에 알아 볼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냥 기다린 거지요. 그때 우리가 사랑을 했던가요?
이런 시 아세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낙엽이 쌓이는 날/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모든 것을 헤메인 마음 보내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헤메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최양숙 말따나 펜팔 누나의 그대가 되어 짠~하고 나타난 거지요 뭐. 가을엔 누구나 편지를 쓰고픈가 봐요. 청마 유치환도 우체국에 들려 수신자도 없는 채 봉투에 우표를 붙였다잖아요. 멀미한다고 박카스 한 병 나눠마시고 뭔가 대화를 나누었던 거 같은데........
배가 떠나야할 시간이 다가오자 이러더이다.
사랑 할 때보다 이별 할 때가 더 멋져야 한다며 테이프를 건네주더라고요. 그리곤 내게 이러더군요.
"너, 글 보고 상상 많이 했는데....의젓하긴하다만"
내 자신이 못생긴 걸 그때만큼 후회한 적 없어요. 그 누나 실망했던 거예요. 펜팔이란 어떤 경우라도 만나지 않는게 좋은가 봐요.
여행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첫걸음이고 세상을 품는 크고도 원대한 꿈이랍니다. 하지만 가슴 떨리게 하는 수줍음이 없다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지요.
보너스로 읽을만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