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술
배영춘
대로변의 왁자지껄한 소리에 잠을 깬 나는 창문 밖을 내다봤다. 희붐히 밝아 오는 새벽이지만 많은 사람이 둘러서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 통화하는 사람들 사이에 노인 한 분이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예감에 나는 대충 옷을 걸치고 나가 사람들 속을 비집고 들어갔다.
할머니 한 분이 잠을 자듯 아주 평온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얼굴의 주름만이 지나온 세월을 말해 주듯 깊이 팼고, 흐트러진 흰 머리카락은 차가운 새벽바람에 처량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이미 굳어진 할머니의 눈가에는 눈물이 흐른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언제 숨을 거두었는지는 모르지만, 할머니 옆에는 파지들이 차곡차곡 쌓여 허름한 손수레에 실려져 있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 문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천근만근 납덩이를 매달아 놓은 것 같았다. 사는 동안 가슴 아픈 이별이 없었으면 좋으련만, 크고 작은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했던 탓에 내 곁에서 떠나간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절절히 느꼈다. 누군가 가난은 불편할 뿐, 죄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예민하게 자라고 있는 자식에게 부모가 가난하게 산다는 것은 참으로 큰 부끄러움으로 여겼고 부모를 멀리하는 경우도 보아왔다. 또한 부모의 눈에서 폭우 같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뒤로하고 집 떠나서 처절하게 망가져 버릴 만큼 ‘악바리’로 돈을 벌려고 하는 친구도 보아왔다.
‘수욕정이풍부지 자욕양이친부대, 왕이불가 추자년야 거이불견자친야, (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父
待), (往而不可追者年也 去而不見者親也)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고자 하나 부모는 연로하여 기다려 주지 않네. 한번 흘러가면 쫓아갈 수 없는 것이 세월이요. 가시면 다시 뵐 수 없는 것이 부모님이시네.’
이 구절은 효도를 다 하지 못한 채 부모를 잃은 자식의 슬픔을 가리키는 말로 부모님 살아 계실 때 효도하라는 옛 선인의 가르침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내가 겪은 아픔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각오로 살아오면서 가끔 부모님을 잊기도 했다. 이 또한, 세월이 지나면서 슬픔만이 아닌 그리움이 되기도 했다. 30여 년 전, 가난한 생활에 나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업을 그만두었다. 어머니를 도와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이 좀 나아질 줄 알았지만, 세월이 흘러도 점점 더 궁핍해지고 답답한 현실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것을 보고, 나도 땅을 팔고, 집을 담보로 고금리로 돈을 빌렸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 형제들은 차례로 한국에 왔고 어머니는 홀로 중국에 남게 되었다. 쾌활한 성격의 어머니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말수가 적어졌고, 모든 일에 흥미를 잃어 갔다. 내가 국제 전화 때마다, 어머니는 같이 살자는 말만 되풀이했다.
매년 설날, 다른 가족은 오붓하게 즐거운 명절을 보내지만, 어머니는 혼자서 좋아하시는 소고깃국 한 그릇으로 단출하게 지냈고, 우리가 보내온 돈으로는 조금씩 조금씩 빚을 갚아 나갔다. 한두 잔씩 홀짝홀짝 마시는 술이 어머니의 유일한 친구였다. 슬퍼도 술, 기뻐도 술, 가슴에 맺혀오는 응어리들을 술로 풀었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다 보니 술 마시는 일이 일상으로 바뀌어 갔다. 자식들에게 해준 게 없어서 느끼게 되는 심한 죄책감과 일찍 떠나보낸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고독과 함께 엄습해왔던 것이다. 이러한 감정과 고통은 더더욱 술을 마시게 해 악순환을 거듭하게 했다.
그러한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는 불만을 드러내며 짜증을 내기만 했었다. 가난한 것을 부모 탓으로 돌리고 어느 순간부터 냉정한 태도로 엄마를 대하고 있었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고향을 등지고 떠난 나는 오직 타향 생활에 후회와 중도포기를 생각하다가도 오직 잘 살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살아왔다.
4년 전 여름, 기회가 되어 어머니가 한국에 오셨다. 야속한 세월에 인제는 힘없고 허약한 할머니 모습으로 변했고 알콜 중독으로 치매 증상까지 나타났다.
다행히도 6개월간 요양병원에서의 입원 치료로 많이 호전되어 퇴원했다. 어머니는 여동생네 집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근처에 있는 광교 호수공원을 산책하곤 했다. 나는 쉬는 날이면 어머니를 찾아뵈었고 마음의 여유까지 생기면서 엄마의 짜증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재밌게 들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온 가족이 함께 여행 다니고, 어머니가 음식을 즐겁게 드시고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서, 오랜만에 가족의 행복을 느꼈다. 가끔 엄마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언제까지 지속될까? 라는 생각을 하며는 마음이 아팠다... 그날도 어머니는 광교호수공원서 석양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기 시작하자 집으로 돌아오려고 신호등이 있는 건널목을 건너는 순간, 갑작스러운 차 사고로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해 여름, 나는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껴안고 서서 저 세상 가신 부모님이 있는 곳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여기 누워 계시는 할머니도 얼마나 추웠을까 싶다. 왜 이렇게 급히 가야만 했을까? 무엇이 바빠 어머니처럼 급히 가셨을까? 자식의 효도 한번 받아 보지 못하고 갖은 고생만 하다가 돌아가신 어머니, 인제 와서 무관심과 옆을 지켜주지 못하고, 말동무가 되어 주지 못한 죄책감에 나는 목 놓아 어머니를 불러본다. 어머니가 계신 곳, 더는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햇볕이 따가워 났다. 할머니의 시신은 운구차로 어디론가 향했다.
우리는 가파른 인생길 걷다 보니 어느새 지천명이 훌쩍 지났다. 많은 지출, 적은 돈으로 여유 있는 생활을 즐긴다는 건 너무 어렵다. 급변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가정의 중임을 책임지는 나를 포함한 가장들은 명예퇴직이란 압박감 때문에 끊임없는 노력과 치열한 경쟁으로 심신이 날로 지쳐간다. 가정주부 역시 가사와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병행하며 정신없이 살아가느라 노후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늦게나마 자신의 시간을 갖고 최대한의 지출을 줄이며 급급히 노후 대비를 하곤 한다. 간혹 늙어서 자식에게 의지하겠다는 분들도 계시지만, 젊은 세대도 사회의 유행을 따라가기 바쁘게 살다 보니 항상 부모님께 소홀할 때가 많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일반 서민들, 특히 사회적 약자로 살아가는 일부 노인들이 무척 힘들다. 찾기 힘든 일자리와 일자리를 찾았더라도 적은 월급으로 생활만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이니, 아무리 일에 대한 의욕이 넘쳐도 결과적으로 허무할 때가 많다.
혼 가족이 증가함에 따라 외로움의 울타리 안에서 사는 독거노인도 많다. 이분들이야 말로 힘든 환경 속에 살고 있으니 언제나 생명의 위험이 뒤 따른다. 그러다보니 고독사 하셨다는 우울한 소식도 가끔 들려온다.
고령자를 위해 모든 세대가 통합 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노인의 자원봉사, 취업을 위한 환경을 만들어 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노인들이 자식들의 무관심 속에서 열심히 살아가려는 의욕을 상실하고 있다.
어머니는 한없이 무거운 짐을 어깨에 걸치고 힘든 삶을 살아 오셨다. 때문에 나도 자식에게 더 힘든 삶을 대물림하는 짓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고,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싶다. 지금이라도 게을리하지 않게 운동하고, 가족들과 논의하며, 준비가 조금 미흡한 부분을 보완, 대처하고 노력하는 중이다.
2019년 4월 06일 한국에서